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76화 (576/1,277)

##  576화

아나스타샤는 피에르 상캉의 토카타 이후로 더 연주하지 않았다. 겨우 3분 남짓한 연주는 아쉬웠지만, 마카로프는 그 뒤로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높은 수준을 갖춘 피아니스트들은 음악을 언어로 대화를 나눌 줄 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은 그 수준을 넘어서서 거의 마음을 읽어 내고 있었다.

기술적 자유를 얻고 음악을 원하는 형태로 벼릴 줄 아는 음악가들은 얼마나 반짝이고 아름다운가.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마카로프에게 있어서 단순히 음악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예술의 진전이었다.

마카로프는 내부적인 사정은 잘 모르지만, 타티아나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곁에서 보고 싶다. 기록하고 싶다.

“…….”

세 사람은 합주용 부스에서 나와 메인 컨트롤룸으로 돌아왔다. 마카로프는 녹음 중인 컴퓨터를 중지시키고 돌아섰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는 약간 데면데면해하고 있었다. 방금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도 하고, 진지했던 자신들의 모습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던 모양이다.

마카로프는 음악가에서 소녀들로 돌아온 두 사람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차를 끓이려 했다.

그때 먼발치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다가와 말했다.

“제가 끓여도 될까요?”

“……예?”

상황이 어쨌든 아나스타샤는 고객이자 손님이다. 마카로프가 되묻자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지금은 피아노 말고, 이런 일부터 하고 싶어져서요.”

단순 작업은 머리를 가볍게 정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 마카로프도 종종 머리가 복잡할 때면 쓸데없이 기기들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아나스타샤에게 찻잔의 위치 등을 가르쳐 주고, 마카로프는 다시 소파 쪽으로 돌아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 보는데, 전혀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척척 알아서 물을 끓이고 찻잔을 세팅했다.

잠시 후, 아나스타샤가 찻잔 세 개를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여기 드세요, 마카로프.”

“고맙습니다.”

타티아나가 오기 전 미팅했을 때 마셨던 홍차와 똑같은 색이었다.

“자, 타티아나.”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정말 차를 끓이면서 모종의 정리가 되었는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고, 타티아나 역시 그 분위기에 따랐다.

타티아나가 찻잔의 향을 맡더니 물었다.

“히비스커스 티인가요?”

“응. 똑똑해져 보려고.”

“히비스커스에 그런 효능은 없는데요…….”

“똑똑해진 기분 좀 느껴 보려고.”

“그런 거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평소에 그렇게 바보 같았니?”

“아하하, 아니에요.”

두 사람 사이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흐르고, 뒤섞인다. 마카로프는 웃음과 차 향기 속에서 조용히 대화를 들었다.

한참 장난을 치던 아나스타샤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예.”

“걱정하지 마.”

갑자기 나온 이야기에 타티아나가 움찔한다. 합주용 부스에서 했던 이야기에 연장선, 아나스타샤의 어떠한 결단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너무 맥락이 없어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건 타티아나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어떤 걱정을……?”

“그냥 뭐든 간에.”

“뭐든 간에?”

“응.”

할 수 있는 걱정이란 끝도 없이 많을 수도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더더욱 혼란에 빠지긴커녕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도와 드려도 되나요?”

아나스타샤는 오늘 타티아나가 이 스튜디오에 와서도 계속 가만히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한 듯했다. 제대로 된 허락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미안함을 담은 얼굴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짧은 티타임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눈 깜빡하고 나니 두 음악가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훅 하고 입안에 남은 차 향기를 밀어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머리가 좀 아프긴 해. 네 말대로 난 최근에 계속 알캉 같은 고난도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곡에만 시간을 쏟아붓고 있었거든……. 물론 덕분에 테크닉은 엄청 늘었는데, 이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하고 싶은 걸 연주하셔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걸 모르겠어…… 나 진짜 바보 된 것 같아.”

“아하하, 선곡이란 게 그렇죠. 저도 한참 동안 그랬던 적이 있는걸요?”

“정말?”

“예. 정말.”

마카로프는 지금 타티아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든 적당한 음악을 몇 곡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꺼내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어떠한 이해나 통찰에 기반해 있다기보단 무작정 꺼내고 보는 경향도 꽤 짙었다.

마카로프가 그녀와 함께 모든 레퍼토리를 펼쳐놓고 몇 번이고 연주하게 했던 건 그런 그녀를 돕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차라리 모조리 다 연주해 보는 게 나았으니까.

지금은 스스로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좋은 연주자가 되었으니 다행이다.

마카로프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굳이 지금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알아서 잘해 나갔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볼까…….”

“예. 그래요.”

“추천해 줄래?”

타티아나는 마카로프가 했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적어 놓으시면 그거 보고요.”

아나스타샤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펜을 쥐었다.

오자마자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았던 것과 다르게 고민하고 중얼거리면서 아나스타샤는 펜을 움직였다. 노트 위로 바흐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작곡가들의 이름과 곡명들이 빼곡히 적혀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탄성을 발했다.

“현대까지 뻗어 나가니 정말 많네요. 대단하세요.”

“난 잘 모르겠어…… 맨날 까먹기나 하고.”

아나스타샤는 옆에 있는 친구가 얼마나 넓은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안다.

때문에 그리 자랑스러워하진 않는 것 같지만, 마카로프가 보기엔 두 사람 다 천재였다. 특히 현대로 가면 갈수록 아나스타샤 쪽의 레퍼토리가 훨씬 더 다양해졌다. 심지어 이게 겨우 1년도 안 된 사이에 만들어진 거라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노트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이 중에서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곡은 어떤 곡이었나요?”

그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생각에 잠겼다. 올해 열여섯 살인 그녀를 기록할 수 있는 곡을 찾아내려 한다면 분명 한 곡 정도는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 올해는 없는 것 같아.”

“없나요?”

“응.”

어마어마한 노력을 투자해서 준비한 알캉이 도구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말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도구를 정체성으로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다른 방도를 찾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먼 미국에서 대상을 거머쥐게 해 준 알캉조차 그 후보에 들어 있지 못할 줄은 몰랐다.

“그럼 작년으로 돌아가 볼까요. 쇼팽의 발라드도 있었고, 드보르작도…….”

아쉬운 내색 하나 않는 아나스타샤와, 또 그걸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타티아나.

조금이나마 아쉽다고 생각했던 마카로프는 초연한 두 사람을 보며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여러 작곡가들의 이름을 듣던 그는, 지금 해 줄 조언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제가 하나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 얼마나 이 순간에 진지하고 또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보였다.

마카로프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판매할 음반을 찾는 게 아니죠. 또한 올해나 작년에 국한될 이유도 없고요. 피아니스트의 성장은 한 해라는 기준에 좌우되지 않으니까 말이죠.”

1년. 그리고 365일이라는 기준은 그저 지구와 태양의 위치에 따라 정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사회적으론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지만 사실 개인으로 놓고 보자면 무의미한 기준이다.

사람의 성장은 행성의 위치에 따라 딱 떨어지지 않는다.

“계단을 찾아보시죠.”

“계단이요?”

“바깥의 사람들이 만든 한 해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딱 자를 수 있는 아나스타샤만의 기준이 있을 겁니다. 그 지점에서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다면, 현재 어디까지 왔는지도 알 수 있겠죠.”

사람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가지만 어떠한 계기를 통해 한 번에 계단 위로 뛰어오른다. 특히나 스스로의 개발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시점들이 존재한다.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에게도 분명히 그런 기준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정해질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나스타샤도 타티아나도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한 해라는 기준이 개인에게 의미 없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타티아나는 경탄과 책망을 함께 담은 묘한 목소리로 마카로프에게 물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왜 제겐 그런 조언을 해 주시지 않았죠?”

“각각 어울리는 조언이 있는 겁니다. 타티아나.”

“그렇긴 하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를 일찍 들었다면 무언가 더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지 살짝 토라진 것 같았지만, 곧 아나스타샤에게 집중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하다가 단번에 한 지점을 짚어냈다.

“재작년엔 뭘 했었더라.”

“재작년이요?”

재작년이라는 한 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정확하게 말했다.

“네가 전학 오기 전과 그 후가 달랐었거든.”

“…….”

“그 시점이 내 계단이지 않았을까.”

마카로프는 더 이상 해 줄 이야기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

아나스타샤가 잠시 부모님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타티아나가 슬쩍 다가왔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마카로프는 옆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있었던 음악가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느 때처럼 존재감이 희미하고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소녀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타티아나.”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당혹스러워하는데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일부러 제가 아나스타샤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 주신 것, 프로듀서였죠?”

“……?”

“합주용 부스에서 전화를 받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나요?”

마카로프는 뜨끔했다. 이 정도로 예리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는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하하, 그런 것까지 어떻게 예상합니까? 제가 신도 아니고.”

“전화는 운에 맡기셨겠지만, 그곳을 고르신 건 확실해요.”

타티아나는 그냥 찍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는 듯 분명히 말했다.

“지난 1년간 저는 단 한 번도 합주용 부스에서 녹음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

“합주용 부스는 피아노 한 대의 녹음을 하기에 완벽한 공간이 아니죠. 아무리 리허설이라 할지라도 프로듀서가 이런 상황을 조성하실 리가 없어요.”

타티아나는 일견 어수룩해 보이는 면이 있어서 가끔 방심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굉장히 예민하고 머리 회전도 비상한 사람이었다.

전화 너머의 소리를 듣고 그 공간을 특정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오른 사람이 당연히 그 상황 또한 상상하리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들은 것들을 믿고, 또 그간 봐 온 프로듀서를 믿었다. 마카로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알아채 가는 타티아나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타티아나는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나스타샤를 존중해 주셨겠죠. 그러면서도 제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셨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다시 한 번 짧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

아나스타샤를 단순히 고객으로만 대하면 타티아나가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감사를 받을 줄은 몰랐다.

그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보려고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건 헛소리이기도 했다.

“그것도 운명이겠죠.”

타티아나가 마침 그때 전화를 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던 건데, 완전 이상한 소리가 되어 버렸다. 마카로프는 종종 영생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즐겨 하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말 아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그런 말들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낚싯줄을 드리워 주시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운명이에요.”

“하하, 전 타티아나를 낚아 올린 겁니까?”

“그렇게 되겠네요?”

마카로프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는 타티아나를 낚아 올린 게 아니라, 되레 거기에 이끌려 바다에 풍덩 빠지게 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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