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7화
마카로프의 조언에 따라 계단을 찾아 과거를 더듬던 아나스타샤는 몇 년 전을 떠올렸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발레, 골프, 체스 등 잘하는 것들을 모두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선택했었던 피아노는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진창처럼 아나스타샤의 모든 노력과 시간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잠깐 찾아온 슬럼프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기만 했다.
건반을 약하게 누르면 소리가 붕 뜨고, 강하게 누르면 깨지는 것 같은 소음만 느껴졌다.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그 부피감과 무게감을 아나스타샤는 구현할 수가 없었다.
도움을 구해 보려 해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 댔다.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연습을 더 해 봐도 소용없었다.
무언가를 늘 쉽게 다루고 익혀 왔던 아나스타샤에겐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시간만이 흘러갔다. 쌓이는 건 신경질적인 짜증뿐이었다.
결국 진창에 가슴께까지 잠겨선 그냥 다 그만둘까 생각했던 것이 바로 8학년, 가을이었다.
그 가을에 타티아나를 만났다.
“……그 시점이 내 계단이지 않았을까.”
타티아나는 창백하고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건반 하나를 제대로 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가느다란 손목으로,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한 번에 진창에서 끌어올려 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몇 시간이나 그 애를 붙잡고 어떻게 한 건지 가르쳐 달라고 괴롭혔었지. 타티아나는 그때 조금 난처해했음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아나스타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알려 주려고 애썼다.
그 후론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 사이에 관계가 이어졌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가 피아노를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아나스타샤는 평소 생활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상식이 부족해 위태로워 보이는 타티아나를 도와준다.
며칠 동안 가까워지고, 몇 주 동안 친해지면서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태도에서 은연중에 이 애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직감은 잘 빗나가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 애라면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기준들은 잘 모르겠는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작년…… 아하하, 생각해 보면 저에게도 계단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9학년을 보내고 10학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지금은 안다.
그때 타티아나는 겨우 6개월 된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든 세상에 적응하고자 필사적이었다. 자기 정체성조차 흐릿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피아노를 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6개월 만에 중앙음악학교에 편입해 왔다.
당연히 자기 앞가림이 급하니 다른 사람에겐 신경도 못 써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친구는 절대 그냥 못 지나쳤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타티아나의 착한 성격으로부터 이런저런 수혜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음, 글쎄요. 작년에도 계단이 몇 개 있었다고 생각하고, 올해도…… 너무 많은 건가요?”
“많으면 어때? 분명하게 계단이라 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는 건 좋은 것 같은데.”
“나쁜 게 아니라면, 생각을 조금 해 봐야겠어요.”
“응.”
타티아나는 갈수록 훨씬 더 명료한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올해 초에 기억을 되찾았던 일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잊고 있던 기억들과 함께 타티아나가 되찾은 것 중엔 세상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기준 같은 것도 있으리라.
자기 논리와 자아가 분명한 만큼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그녀와 오래 있어 온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이전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달라지지 않은 건 아나스타샤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날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저 애는 바보가 아니다.
음악을 무기로 삼으려 하면서 음반을 만드는 건 모순되는 행동이라 했던 것이나 현명하게 음악을 골라 보자고 했던 건 전부 진심이었겠지만, 그 의중엔 에르네스트에게 심하게 하지 말아 달란 부탁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도 바보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와 우선적으로 같은 선에 서고 싶기에 아무리 공격적인 태도를 하려 해도,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할 거란 걸 스스로 잘 안다.
타티아나가 주변 사람들을 아끼는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냥 쳐 볼까?”
“지금요?”
“응. 생각난 김에. 괜찮죠? 마카로프.”
“그리하시죠.”
아나스타샤는 막 뇌리를 휘감아 도는 상념들을 치워 버리면서 일어났다.
요 2년 사이 그녀의 피아노의 계단을 떠올리자면 타티아나가 빠질 수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생각의 초점이 다른 쪽으로 기우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지금은 피아노에 집중해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옆을 내려다보았다. 연주하겠다고 말하니 타티아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바보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복잡하게 엉켜 있던 마음이 명쾌해진다.
타티아나는 어떤 결과가 따라 오더라도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사람이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말 지켜 낼 것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그 약속에 일방적으로 기댈 생각이 없었다. 계속 곁에 있어 주겠다면, 적어도 곁에 있기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마땅했다.
근래 평정을 자주 잃고 멋대로 날뛰던 머리가 간만에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다. 미래에 다가올까 두려워했던 회색빛 상상들은 조금 견디기 편해졌다.
“…….”
합주용 부스로 향한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건반으로 손을 뻗었다.
지금 바로 연주하고 싶은 곡은 한 곡뿐이었다.
‘그때 정말 놀랐었어.’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 op.16 4번째 곡.
타티아나가 도망쳐 다니는 아나스타샤를 붙잡아 연습실에 데리고 가선 어떤 신청곡이라도 연주해 주겠다고 했었을 때, 불현듯 생각이 나서 요청했었던 곡이다.
이 한 곡으로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슬럼프에서 건져 냈고, 또 제대로 된 피아니스트임을 증명해 냈다.
그 후로 쭉 타티아나는 어둠 속에서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등불이었다.
지금은 어디까지 따라온 걸까. 등불은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보인다.
타티아나는 이미 넘어섰다고 평했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멀리 가 버릴 게 분명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정체되어 있는 피아니스트가 아님을 분명히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티아나는 걸음을 딛고 있다.
보다 크게, 그리고 빠르게. 아나스타샤는 건반을 짚었다.
“…….”
피아노에서 뻗어 나가는 음악은 2년 전의 그 어떤 음악과도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이 곡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연주로 분명히 확인했다.
계단을 올라 그녀가 본 모든 풍경, 시간, 마음. 그 모든 것이 2분 40초 동안 이어진 격렬한 순간에 모두 담겨 있었다.
다시 컨트롤룸으로 돌아오자 마카로프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맞이했다.
“브라바.”
아나스타샤는 짧은 묵례로 인사했다. 타티아나는 무언가에 감격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그제야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이 곡…… 저희가 처음으로 함께 연구했었던 곡이죠.”
오래 전 일인데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려는 찰나,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기억하고 계셨군요?”
“응.”
“정말…….”
타티아나는 중얼거리다가 찻잔을 들었다. 갑자기 어떤 감정이 북받쳤는지 목이 메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본 아나스타샤도 목이 메어 왔다.
이 곡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자신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타티아나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공유하고 있는 곡을 오랜만에 꺼내어 봤는데, 말로 오가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없는 건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타티아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다 네 덕분이라고 해 주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기도 어색해져서 괜히 의자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자 마카로프가 넌지시 제안했다.
“그럼, 합주용 부스에서 리허설 하는 건 이쯤하고…… 오늘 녹음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엔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늘 바로요?”
“예. 타티아나도 사실상 하루 만에 모든 녹음을 다 했었죠.”
밤을 새면서까지 완료했던 걸 아나스타샤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었다. 끝내 탈진한 타티아나는 쓰러지기까지 했지만, 아나스타샤의 뇌리엔 그런 그녀의 모습이 평생 잊지 못할 장면으로 새겨져 있었다.
할 수 있을까?
오늘 이야기한 것들이 아직 제대로 정돈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짜고짜 모든 게 끝날지도 모르니까 단단하게 굳혀서 에르네스트를 상대할, 그리고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할 음반부터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어제보단 훨씬 나았다.
완성도만 만족할 만큼 나와 준다면, 오늘 해도 괜찮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무기가 아닐 테니 타티아나에게 줄 수도 있을 테고…….
“아, 죄송해요.”
잠시 고민에 잠겨 있는데, 타티아나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타티아나가 허둥지둥하며 가방을 뒤적였다. 연주 중도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으며 그녀 옆에 앉았다.
타티아나는 액정을 확인하더니, 곧장 받았다.
“예,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타티아나가 선생님이라 부를 사람은 몇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붙으며 귀를 기울였다. 타티아나는 같이 들어도 별 상관 없다는 듯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정말인가요? ……예. 알고 있어요.”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는 미하일의 것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목소리를 다 들을 순 없었지만 언뜻언뜻 콩쿠르라는 단어가 오갔다.
“…….”
얌전히 기다리자 한참 통화하던 타티아나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미하일 선생님이었어요.”
“옆에서 들려서 알았어.”
“내용도 다 들으셨나요?”
“아니, 잘 모르겠는데.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였어?”
“예.”
타티아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신청 요강과 심사곡이 방금 전 발표되었다고 하시네요.”
“와, 벌써 나오는구나.”
벨기에에서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는 5월에 열린다.
개최일만 두고 보면 아직 시간이 1년 가까이 남았지만, 사전 비디오 심사 등 때문에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신청을 올해 12월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잘 생각해 봐야 할 때다.
타티아나는 내년 있을 콩쿠르들을 골똘히 생각하는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예, 그래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아, 그리고 쇼팽 콩쿠르도……. 이건 정말 선생님과 상담을 해 봐야겠어요.”
내년은 대형 국제 콩쿠르가 두 개나 겹치는 해였다. 머리가 아플 만도 하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당장 미하일에게 가 봐야겠다는 투로 말하다 말고 고개를 잘래절래 젓더니 다시 아나스타샤 쪽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도 오늘은 아나스타샤가 녹음을 하시는 날이니까…….”
“아니야, 다음에 해도 상관없어.”
쿨하게 나온 말에 타티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않고 혼자 스튜디오에 올 정도면 상당한 각오로 온 것일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음반을 하나는 만들어 가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나스타샤도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모든 걸 단번에 끝내고 싶은 사람마냥 굴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연기처럼 머리에 가득했었다. 그 충동과 두려움을 발산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 보면서, 그런 감정들은 사그라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오늘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타티아나가 미하일에게 전화를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대형 콩쿠르에 집중해야 할 타티아나를 귀찮게 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곁에 있기 편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해 보라고 말해 줘서 고마웠어.”
“…….”
“작년에 음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건…… 나중에 지킬게.”
“……알았어요.”
타티아나는 다시 권유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표시였다.
“마카로프, 죄송하게 되었어요.”
“아닙니다.”
아나스타샤에게 바로 녹음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마카로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욕심이 많았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요?”
“하하, 신경 쓰지 마시죠. 아나스타샤가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물끄러미 마카로프를 바라보니 그가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대로.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 상황에선 하고 싶은 대로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른다.
그 난센스에 지치면 결국 후회할 행동을 하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뭘 하고 싶은지부터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