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8화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나스타샤는 돌연 음반 녹음 계획을 취소했다.
오늘 스튜디오에 찾은 건 분명 충동적인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 기저엔 에르네스트에 대한 라이벌 의식 등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런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나누는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처음 보았을 때 느껴졌던 어딘가 불안정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한결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난 그 태도에서 아나스타샤가 냉철함을 되찾았음을 느꼈다.
아나스타샤가 녹음을 하려고 했던 것이 그냥 한순간의 충동일지라도 음악가로서의 충동일 테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듣더니 훨씬 더 신중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냉정해진 아나스타샤는 실수를 안 한다. 그러나 살짝 아쉽다. 지금 그녀의 음악도 충분히 아름답고…… 에르네스트와 직접 견주더라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았는데…….
“타티아나?”
“앗.”
“무슨 생각 해? 콩쿠르?”
“음…….”
아나스타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긴 어색해서, 난 방금 전 미하일 선생님과 했었던 전화 통화에서 대신 할 만한 이야기를 떠올려 냈다.
“미하일 선생님께서 이번 달 열리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티켓은 예매했느냐고 여쭈어보셔서…….”
“그거 얼마 전에 프리 리스닝pre listening 끝났다고 듣긴 했는데. 벌써 본선인가?”
우리는 나이 제한에 걸려서 나가지 못했기에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국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이미 올해 진행 중이었다.
비공개로 진행되는 최종 예선인 20분가량의 독주 심사, 프리 리스닝이 끝나고 이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 본선 진출자들이 공개 무대에서 경합을 벌일 차례였다.
3대 국제 콩쿠르라 불릴 정도로 수준과 위상이 높은 콩쿠르이니만큼, 2주 정도에 걸쳐 펼쳐지는 이 경합은 많은 관람객들과 함께하곤 한다. 빈 좌석을 기대할 수 있는 콩쿠르는 아니다.
“슬슬 구해 봐야겠는데? 꼭 그걸 다 볼 필요는 없지만 결승 정도는 보고 싶어.”
4년에 한 번 열리는 큰 콩쿠르이지만,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걸 다 보긴 힘들다.
콩쿠르가 진행되는 2주 내내 오후 1시경에 시작해서 밤 11시는 되어서야 끝나는 치열한 경합을 놓치지 않고 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물론 다 챙겨 보는 애호가들도 있긴 하지만, 보통은 응원하는 연주자들의 무대를 보면서 독주회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관람하곤 한다.
아니면 아나스타샤가 말하는 것처럼 결승전만 집중적으로 보거나.
나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콩쿠르 참가자들에게도 관심이 많긴 하지만, 우린 언젠가 무대에 서야 할 사람들이니까.
“저도 그래요. 음, 인터넷으로 예매하면 될까요?”
“모스크바 음악원 그레이트홀에서 열리니까 그쪽에 바로 문의해 봐도 될걸?”
“그렇게 할까요?”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는 올해부터 목관과 금관을 합쳐 총 6개 부문에서 한꺼번에 치러진다.
모두 동시에 진행하면서 한 곳에서 할 순 없으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그중 피아노와 바이올린 부문은 각각 모스크바 음악원의 그레이트홀, 스몰홀을 사용하게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을 딴 모스크바 음악원의 가장 큰 홀에서 피아노 콩쿠르가 진행되는 걸 보면…… 다른 부문들도 많지만 피아노 쪽에 비중이 상당히 무겁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일단 진행되고 있는 대회 상황이나 본선 티켓 예매 등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켜기 전에 메시지들을 확인했다가, 베르너 위넬의 메시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국제 콩쿠르 준비는 잘 되어 가고 계십니까? 혹시 필요하실지 몰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본선을 관람하실 수 있는 티켓을 구해 놨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베르너와는 이전에도 몇 번 함께 일을 해 보면서 얼마나 수완이 좋은 사람인지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해 주는 걸 보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막힘 반 고마움 반으로 무어라 답장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왜 그래?”
“음…… 베르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는데…… 콩쿠르 관람 티켓이 필요하다면 말씀해 달라 하시네요?”
혹시 미리 말해 놓은 거냐고 묻는 대신 아나스타샤는 픽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 좀 괜찮다?”
“제 마음을 읽고 계신 것 같아요.”
내가 그의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으면 이것보다 더 잘 해 주겠지? 그런 생각이 날 정도로 베르너의 메시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데 상상을 뛰어넘은 메시지를 보낸 건 베르너 혼자만이 아니었다.
“잠깐만……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서 온 메시지도 있어요.”
“응?”
“여기에서도 티켓을 구해 주겠다고…….”
“아하하하하.”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난 그녀가 왜 웃는지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아무튼 티켓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야기가 콩쿠르 쪽으로 흐르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우리 앞에 있는 노트와 종이 등을 정리하며 말했다.
“내년까진 정말 바쁜 시기겠군요.”
그는 일전에도 내게 지금은 콩쿠르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순수한 음악에 늘 목말라하고 때론 클래식 업계에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긴 역사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콩쿠르가 중요하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현실감각을 분명히 갖춘 사람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었다.
“오늘 음반 녹음은 못 하겠지만, 곧 비디오 제작에 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요.”
대형 콩쿠르의 예선은 거의 비디오 심사로 진행된다. 어디에 참가하든 간에 녹화를 하긴 해야 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마치 처음 스튜디오를 소개하는 사람처럼 과장스럽게 말했다.
“때가 되면 꼭 찾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본 스튜디오는 콩쿠르 예선 심사용 비디오 제작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최고의 장비들을 갖추고 있으며…….”
“알아요…… 알고 있어요. 프로듀서.”
프로듀서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난 더듬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 훌륭한 장비와 프로듀서가 있는 스튜디오를 두고 지금까지 너무 멋대로 굴었다는 기분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식 웃더니 말을 맺었다.
“언제든 좋으니 연락 주시죠.”
“아…… 물론이에요.”
난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나스타샤도 오늘 일에 대해 미안한지 반성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요. 음,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대로 할게요.”
“하하…… 알겠습니다.”
그런데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옆얼굴을 보면서 어쩌면 그가 오늘 같은 막무가내식 방문을 즐겁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오전 시간을 빼앗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만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
스튜디오에서 나오자마자 미하일 선생님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내서 오늘 찾아뵐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았다. 선생님도 시간이 나는 건 오후 즈음이라 여유 시간이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아나스타샤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잘되었다. 난 그녀와 잠깐 산책하기로 했다.
이 근처 지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목적지가 따로 없는 산책이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아무 말 않고 날 따라와 주었다.
“1년이 넘게 보면서 익숙해진 거리인데도, 늘 차로 다니다 보니 조금 생경하네요.”
“여긴 걸어 다닐 일이 별로 없지?”
“예, 그래서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 아!”
“?”
난 기억에 있는 몇 안 되는 곳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길거리에 있는 노천 카페였다. 일리야와 만나선 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들으면 일리야가 왜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는지부터 물어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숨기는 건 더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어…… 일리야와 이 근처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요.”
“그게 여기였니? 난 우리 집 근처인 줄 알았는데.”
“……? 제가 그 이야기 했었던가요?”
“무슨 이야기?”
“이 노천 카페에서 일리야와 만난 이야기요.”
“아니. 어제 들었어.”
뭔가 예상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간다. 고개를 갸우뚱했더니 아나스타샤가 킥킥거렸다.
“일리야한테.”
“아…….”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일리야와 대화를 하다가 내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다.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약간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이야기가 오르내린다는 건 상관없지만 나랑 친한 사람들이라면 기분이 묘하다.
살짝 궁금하단 눈치를 주자 아나스타샤가 노천 카페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 이맘때였다면서?”
“……그랬었네요.”
그녀는 그때 당시를 상상하는 것 같았다. 상상이라 해 봐야 별것 없다. 그냥 저 안쪽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셨을 뿐이니까.
아나스타샤는 카페에서 눈을 거두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그때 무슨 조언을 해 줬다고 하던데…… 있잖아, 사실대로 이야기해 봐. 타티아나. 그거 정말이니?”
“조언이요? 예. 정말이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어? 그 일리야가?”
당연한 관계인진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일리야를 상당히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대놓고 양아치라고 하기도 하고……. 요즘은 그래도 일리야가 착실하게 미술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덜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봐 왔던 게 어디론가 싹 사라지진 않는 모양이다.
난 일리야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조금 더 제대로 변호해 주었다.
“제가 해파리가 아니라 바닷가재를 좋아할 수 있게 해 준 게 일리야인걸요.”
“무슨 말이니?”
“일리야는 자신의 목소리를 손으로 표현해 본 사람이에요. 참을성 있고 견고하게 자기 의지를 지키는 법을 아는 분이죠.”
“…….”
일리야는 범고래처럼 영리하게 원하는 것을 낚아챌 타이밍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충분히 그걸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나온 진지한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지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그날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전 그다음 날에 바로 스튜디오에서 모든 녹음을 마쳤어요.”
“바로 전날이었구나…….”
“조금 충동적이기도 했죠. 음, 그래도 꽤 만족했어요. 작년 열다섯 살의 저에겐.”
지금과 달리 그땐 정말 복잡했던 시기였다.
제대로 기능하는 연주자인 척하기 위해, 그리고 주변에 해를 끼치는 망령이 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스스로를 옭아매었다. 불안정하고 어설펐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후회 같은 건 들지 않는다. 바로 그날 내가 한 계단을 올라섰기에,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던 기억을 되새기다가, 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일리야가 했었던 조언을 하나는 못 지켰었네요.”
“조언이 많았니?”
“급하게 굴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그날 기절할 때까지 있었으니…….”
물론 지킬 수 없는 조언이긴 했다. 난 기본적으로 느긋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난 급하고 필사적이어야만 했다. 비단 작년뿐만이 아니라 바로 얼마 전 봄에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날 곁에서 계속 지켜본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쓰게 한마디 하려나 싶어 조금 기대하고 있는데, 그녀가 예상외의 말을 했다.
“와, 우리 오빠가 그렇게 예리할 줄은 또 몰랐네?”
“……?”
뭔가 염두에 두었던 반응이 아니다. 처음으로 아나스타샤는 일리야를 인정하는 말을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그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나도 네 성격 파악하는 데에 꽤 걸렸는데 말야.”
“제 성격이…… 왜요?”
“난 네 성격 좋아해. 타티아나.”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았어요. 어떻냔 말이에요.”
“좋아한다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닌데요?
내가 붙잡고 물어보려고 해도 아나스타샤는 휙 피해 버리기만 했다. 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무슨 수를 써도 아나스타샤를 못 잡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말로 하자고 끌어들여 보기도 하고, 포기한 척하다가 갑자기 잡으려 하기도 했다.
그녀가 날 놀리는 데에 당해 주는 거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웃음을 터뜨리는 지금이 좋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