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9화
아나스타샤와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 들렀다. 갓 만든 신선한 샌드위치는 식사량이 별로 많지 않은 나도 두 개나 먹었을 정도로 괜찮았다.
한참이나 근처를 산책하면서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원래 난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나스타샤를 만나서 무언가 잔뜩 해 주려 했었다. 에르네스트에게 이어폰을 해 준 대신 아나스타샤에겐 다른 걸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인지 정해진 건 없었지만, 무엇이라도 좋았다.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것이라면.
“이 동네는 조용해서 좋다. 타티아나.”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냥 같이 산책하는 이 시간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난 기분 좋게 늘어져 흔들거리는 그녀의 손에 무언가 쥐여 주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쥐고 싶지 않았다.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그녀도 나도 딱히 살 건 없었기에 거리를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날은 쾌청하고 바람은 시원했다. 분수대에 물이 올라오는 곳이 있는 걸 보니 조금 있으면 본격적으로 더워지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더워지면, 또 아나스타샤를 불러내야지. 시원한 곳에 가자고 하면 기뻐해 줄 테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추위가 찾아오면 따뜻한 방에서 함께 차를 마실 수 있겠지. 난 언제부터인가 그런 날들을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나스타샤에 대해서 계절처럼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건 그녀를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경계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 모든 게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건 그녀의 옆에서 사르르 녹아 버리니까.
“슬슬 가야 할 시간이야. 타티아나.”
“아…… 그렇네요.”
시간을 확인하니 2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이제 출발해야 미하일 선생님과 약속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빅토르를 부르자 어디선가 대기하고 있던 그가 순식간에 차를 도로가에 세웠다. 먼저 우리는 아나스타샤의 집으로 향했다.
차에 탄 뒤에도 우리는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늘 들어가시면 무엇 할 예정이시나요?”
“글쎄…… 피아노 연습이나 해야겠지?”
“연습 다 하고 나시면요?”
“자려고.”
“바로요?”
“응. 확인할 것들만 확인하고 나면…… 잘 거야. 오늘은 자도 될 것 같아. 요즘…… 이것 봐, 타티아나. 나 피부 거칠어진 거.”
“어디가 거친가요? 여기?”
“뭐야, 나도 잡아도 되는 거지?”
“아!”
멀쩡한 피부가 거칠어졌다고 하길래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았더니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콱 잡았다. 순식간에 좌우로 몇 번 흔들어지자 정신을 못 차리겠다. 가뜩이나 차 안인데 절 죽일 셈…….
“으…….”
“잠깐만, 괜찮니? 타티아나?”
“……멀미 날 뻔했어요.”
기억이 합쳐지면서 감각적인 부분이나 건강 등의 몸 상태는 훨씬 더 나아졌지만 반대로 없던 게 생기기도 했다. 대표적인 부분이 멀미였다.
이전까지 난 한 번도 차에서 멀미를 하거나 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선 차에서 책 같은 걸 보면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어질어질하곤 했다.
평형감각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달라진 걸까? 대충 추론하기로는 그런 것 같았지만 의사가 아니라 정확한 건 모르겠다. 이런 걸로 검사를 받을 수도 없는 일이고.
“미안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정신을 못 차리는 날 보며 미안해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 멀리 가 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되찾았다. 아나스타샤가 걱정하는 모습은 되도록 보고 싶지 않다.
고개를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잠깐 오셨다가 가신 것 같아요.”
“뭐가 왔다 갔니……?”
“으음, 이런 거요.”
난 약하게나마 가능할까 싶어 아나스타샤의 팔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 보려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
흔들리는 척도 못 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무력감이 든다. 난 한숨을 쉬며 팔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연신 웃어 댔다.
대화와 웃음소리, 장난이 오가길 잠시.
자동차는 너무 빠르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아나스타샤의 집 앞이었다.
“안녕. 타티아나. 이만 갈게.”
그녀는 차에서 훌쩍 내리고는 인사했다. 난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후후 하고 웃었다.
“오늘 미하일 선생님이랑 상담 잘 하고…… 혹시 결론 나오면 이야기해 줘.”
“예.”
“다음에 봐.”
아나스타샤는 짧게 작별인사를 건네곤 빙글 돌아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난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창문을 올렸다.
좋은 시간을 영원히 보낼 수는 없었지만, 또 다른 좋은 시간을 맞이할 따름이다.
***
미하일 선생님은 학교에 나와 계셨다. 사무실에 볼일이 있으셨다는 것 같다.
“어서 오려무나.”
“안녕하세요.”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향긋한 차 냄새와 다정한 목소리가 날 반겼다.
난 저편에 있는 책상에서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미하일 선생님을 찾았다. 뵙지 못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굉장히 오래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얼마 전 있었던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마티네 연주회에 미하일 선생님은 오지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셨던 일은 잘되셨는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묻고 싶기도 한데 혹시라도 실례가 될까 싶기도 하고, 살짝 쭈뼛거리며 근처로 다가가자 선생님은 웃으며 일어나시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셨다. 얌전히 앉아 기다리자, 잠시 후 선생님이 직접 끓여 주신 허브티가 내 앞에 놓아졌다.
묻고 싶은 게 있었던 건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메세나 협회 주최로 한 연주회는 잘 했다고 들었단다. 타티아나.”
“그……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래, 그래.”
미하일 선생님은 나지막이 웃더니 찻잔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네 독주회 능력은 당장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이니…….”
“그런 말씀은 제가 부끄러워요…….”
“하하하, 걱정 말거라. 그게 전부가 아니니까.”
비행기를 너무 태우시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자신의 안목으로 골라내신 제자들을 신뢰하고 자랑스럽게 여기시면서 동시에 객관적으로 파악하실 줄도 아시는 분이셨다.
“내년 있을 콩쿠르 전에 대형 오케스트라와 협주는 한 번쯤 해 봤으면 좋겠구나.”
“아…….”
난 할 말을 잃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했었던 협주 이후로도 연주회는 몇 번 했었지만 막상 2관 이상 편성의 오케스트라와 협주는 해 본 적이 없었다.
현대 피아노 연주자에겐 협주 능력도 크게 요구된다. 협주에 약하다는 건 굉장히 큰 약점이었다.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내가 무슨 문제인지 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미하일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더니 이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 전에, 콩쿠르는 나갈 생각이지? 타티아나.”
무슨 말씀이신가 했는데, 이전에도 난 선생님들에게 앞으로 청소년 콩쿠르에 나가지 않겠다고 한 적 있었다.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선생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에도 내가 갑자기 안 나가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전부 괜한 걱정이셨다.
내가 이제 와서 변덕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많게는 서른 살까지 되는, 내로라하는 연주자들과 세계에서 겨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엔 내가 축적된 시간으로 이득을 볼 수 없고 되레 불리함이 가득한 환경이었다.
그 어떤 거리낌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미 국제 콩쿠르에 나갈 수 있게 되면 바로 나가겠노라 선생님들 앞에서 약속드린 바 있기도 했고.
난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예, 약속드렸던 대로.”
“약속이 중요한 게 아니란다, 네 지금 생각과 자각이 중요한 것이지.”
선생님은 그런 약속에 내가 구속되는 걸 원치 않으셨다. 난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해요. 어떤 결과를 마주하더라도.”
예선은 어찌어찌 통과하더라도 본선에서 엉망진창으로 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난 전 세계의 천재들을 모아 놓은 전쟁터가 가뿐하리라 생각할 정도로 오만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손에 쥔 음악이 어디에까지 닿는지, 진짜 천재들의 틈바구니에서 한 번쯤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날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보시더니, 이윽고 바람이 새는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그래, 타티아나. 넌 언제나 무대를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지. 항상 처음이자 항상 마지막처럼. 변함없는 것 같아 좋구나.”
어딘가 마음이 놓이신 모습이었다.
난 선생님에게 최고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다. 때문에 선생님은 그런 나를 존중해 주시면서도 피아노 연주자로서 품고 있어야 할 향상심이 사라져 버린 건 아닐지 걱정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 같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한 내 향상심이 느슨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난 그 애들에게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좋아.”
미하일 선생님은 일단 내가 콩쿠르에 참가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확정지으시고는, 이어 말씀하셨다.
“그럼 콩쿠르 이야기를 자세히 해 볼까.”
보다 차분한 설명조의 어조였다. 난 조용히 경청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이미 관련 자료 등을 서류로 정리해 놓으셨다. 서류철 하나를 내 쪽으로 건네주시길래 받았다. 거기엔 내가 주시해야 할 두 콩쿠르의 정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내년에 있는 대형 국제 콩쿠르는 너도 알다시피 5월의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와 10월에 있는 쇼팽 국제 콩쿠르란다.”
벨기에의 브리셀에서 매년 열리긴 하지만 다른 기악 부문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4년 정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퀸 엘리자베스 국제 피아노 콩쿠르.
그리고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피아노 연주자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나가는 것 자체를 꿈으로 생각할 정도로 큰 무대고, 치열한 전쟁터였다.
미하일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씀하셨다.
“이제 슬슬 여기저기에서 이야기들이 들려오더구나. 선생들의 고민도 굉장히 많을 시기지.”
오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정보가 공개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를 출전시킬 수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이 콩쿠르를 목표로 해서 준비시키지 않는다.
“선생들은 나이 제한을 갓 넘자마자 딱 맞추어 열린 국제 콩쿠르에 바로 학생을 보내는 걸 그리 추천하지 않는단다.”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참가 연령 제한은 보통 17세에서 30세 사이이다. 나이가 곧 실력을 의미하진 않지만, 음악과 함께 보낸 시간에서 오는 절대적인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적게는 2~3년에서 많게는 10년 이상 경력 차이가 나는 피아니스트들과 정면으로 경쟁해야 하니 아무래도 더 공부를 하는 게 낫다고 보는 쪽이 많은 편이지.”
“2번 정도는 기회가 있으니깐요.”
“그래.”
이런 국제 콩쿠르는 참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준비할 것도 많고 부담이기에 17세의 기회를 그냥 보내더라도 22세에 돌아오고 27세에도 돌아온다. 충분히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기에 기회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10학년을 국제 콩쿠르에 보내는 경우는 보통 경험을 쌓고 오라는 뜻으로 보내는 일이 많은데…….”
안경 너머의 눈빛이 내 쪽을 살핀다. 살짝 탈출구를 보여 주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시는 느낌이다.
하지만 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기다렸다.
경험은 평소에 쌓아야지, 국제무대는 실력을 보여 주는 자리이다.
이윽고 미하일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난 널 그런 마음가짐으로 준비시킬 생각이 없단다. 타티아나.”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 말에 선생님은 더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나도 선생님을 따라 웃고 싶어졌다. 그동안 내가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던 적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걸까. 내 판단이 과거와 충돌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부터? 아니면 내년이면 열일곱 살을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아무튼 나쁜 변화는 아니니라. 그렇게 생각한다.
미하일 선생님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어느 콩쿠르에 출전하는 게 좋겠니.”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이셨다.
“둘 다라고 하진 말아 줬으면 좋겠구나.”
반쯤은 걱정인데 반쯤은 기대가 섞인 기묘한 어투였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많이 보신 분이기도 하지. 난데없이 내가 두 콩쿠르를 동시에 준비하겠다고 해도 그리 놀라시지 않을 것 같다.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을 조금 해 봐도 될까요.”
상식적인 대답을 내놓자 미하일 선생님은 괜한 소릴 해서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