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0화
쇼팽 콩쿠르는 피아노 단독 콩쿠르 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피아노 외에도 여러 부문을 아우르는 종합 콩쿠르 중에서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콩쿠르였다.
난 피아노 연주자이지만 두 콩쿠르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 하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각 콩쿠르가 지닌 위상은 거의 비슷했으니까.
대신 대회 방식과 레퍼토리 등에서 차이가 크게 나니까,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우선 자세한 일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난 선생님이 주신 자료들을 조금 더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올해 12월 초까지 지원서를 접수받고 내년 2월 중순 경에 비디오 사전 선택 후보자를 선정한 뒤, 5월 한 달 내내 모든 후보자들이 경합을 거쳐 수상자를 가린다.
“역시…… 쉽지 않은 일정이네요.”
“항상 그렇지. 다른 콩쿠르들과 비교해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많이 버겁다는 이야기들을 자주 듣곤 하니까. 약간 여유 있게 하겠단 이야기도 나왔던 것 같은데, 전통에 어긋나게 하진 않겠다며 못 박았지.”
“저도 들었어요.”
역사가 오래된 다른 콩쿠르들도 엄격하긴 마찬가지이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그중에서도 유명한 편이긴 하다.
12월 초, 그리고 5월. 중요한 날짜들을 기억해 놓은 뒤 페이지를 다음으로 넘겼다.
쇼팽 콩쿠르. 올해 12월 초까지 지원서 접수. 내년 4월 중순부터 예선. 그리고 10월에 본선.
예선과 본선 사이에 시간이 상당히 있어서 그래도 앞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보단 여유가 있어 보인다.
“…….”
난 머리에 있는 날짜들을 쭉 늘어놓아 보았다.
12월까지 각각의 심사 비디오를 만들어 제출하고 통과한 다음에 4월에 쇼팽 콩쿠르의 예선을 치루고 바로 5월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 그리고 10월에 쇼팽 콩쿠르를 마무리 짓는다면 두 콩쿠르 모두 참가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규정에 어긋나지도 않고.
하지만 시간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그게 현실성 있다고 할 순 없었다.
하나에 집중해도 제대로 결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일 큰 콩쿠르를 두 개나 참가해서 양손에 거머쥐려고 하는 건 오만을 넘어선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래도 둘 다 참가하는 연주자들이 있을 테고, 또 두 콩쿠르 모두 지원했다가 비디오 심사를 통과한 곳에만 참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직 결정은 못 내릴 것 같아요. 하지만 한 곳에만 나가겠어요.”
아예 선생님 앞에서 그렇게 말해 두었다.
보험을 들어 두듯 지원서를 내는 건 자존심도 상하고, 다른 정당한 경쟁자들을 방해하는 일이다. 어정쩡한 집중은 심사위원들에게도 발각될 테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년 전과 달리 이젠 콩쿠르 무대에 서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진 않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느끼는 책임감은 똑같다.
깔끔하게 한 곳만 골라서 지원한 뒤 모든 것을 집중할 생각이다.
딱 잘라 이야기하니 미하일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아마 지금도 내심 마음이 가는 곳은 있겠지만.”
“……예?”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아, 아뇨…… 두 콩쿠르 모두 매력적이라…….”
“하하. 아직 고민이 깊구나.”
“…….”
선생님은 그럴 법도 하다는 듯 웃으셨지만, 난 깔끔하게 고르기는커녕 특정한 선호나 이렇다 할 이유조차 바로 못 내놓는 스스로에 대해 조금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콩쿠르에 출전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큰 콩쿠르가 동시에 두 개나 열린다는 건 이미 한참이나 전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진 계속 눈앞에 놓인 일들에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 내가 도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먼 미래의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두려움과 허무함에 빠지곤 했다. 피아노를 계속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희박했었다.
다시 그때를 떠올려보면 변명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그동안 너무 생각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 않나 싶다.
하지만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내 입은 멋대로 열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하일 선생님은 이미 내가 말도 못 할 무렵부터 날 지켜보신 분이다. 그 까닭인지 생각 없어 보이는 질문들도 선생님에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만 느끼는 기분인진 몰라도, 내가 이렇게 물어 볼 때면 선생님은 조금 기뻐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내 사견이지만…….”
선생님이 노트북을 가볍게 손가락 하나로 닫아 버리곤 말씀하셨다.
“피아니스트로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싶다면 쇼팽 콩쿠르 쪽이 좋겠지.”
그 말씀대로였다. 쇼팽 콩쿠르는 피아노 연주자들만 참가하는 콩쿠르이다. 그리고 그 많은 연주자들은 쇼팽이 작곡한 곡들만 연주할 수 있다. 다른 콩쿠르에서 찾아보기 힘든 완고함이다.
나쁘게 말하면 고루하지만, 클래식 연주자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주어진 한계 내에서 발전과 발전을 거듭해 더더욱 쇼팽의 음악을 완벽에 가깝게 만들 뿐이다. 그게 벌써 백 년 가까이 이어졌다.
때문에 각기 다른 곡들로 겨루는 일이 많은 수많은 콩쿠르들에 비해, 쇼팽 콩쿠르는 보다 공고하고 탄탄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그 견고함은 곧 전문성이자 공신력이 된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연주자가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피아니스트들과 다양한 레퍼토리로 경합을 하고 싶다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쪽이 낫겠구나.”
그에 비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4년간 피아노, 첼로, 성악, 바이올린의 순서로 개최되며,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곡들도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콩쿠르이니만큼 참가하는 연주자들의 수준 높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콩쿠르에 나간다면 내가 가진 모든 곡들을 활용해서 그런 연주자들과 겨룰 수 있다. 쇼팽의 곡만 쓸 수 있는 것보단 사실 이쪽이 더 설레고 기대되는 면이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생각하면…… 네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지원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지만. 결정은 네가 내리는 것이니 참고만 하거라.”
“예.”
그냥 딱 결정하셔도 상관없었을 텐데, 미하일 선생님은 선택권을 내게 주시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했다.
어영부영 표류하던 정신에 바람이 불었다.
각 콩쿠르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니 이젠 어느 하나에 지원하더라도 제대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니…… 급하거나 복잡할 건 없고. 그래, 이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견학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면 되겠구나.”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더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 국제 콩쿠르들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만, 근 2년 사이엔 한 번도 없었다. 이참에 제대로 봐 두고 결정을 내릴 셈이다.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티켓은 구했고?”
“저번에 함께 했던 에이전트 분께서 구해 주시겠다 하셔서…… 아,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서도요.”
“다행이구나.”
“예, 그리고 친구들도 함께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마 같이 보러 가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것 같다. 난 지금 모스크바에서 직관이 가능할 친구들을 몇 명 떠올렸다.
그런 날 보던 미하일 선생님은 안경을 만지시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번 콩쿠르를 보면서 네가 친하게 지내는 다른 아이들과도 이야기를 해 보거라. 어느 콩쿠르에 지원할지 말이다.”
“아…….”
그냥 단순하게 생각나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이게 단순히 결정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선생님들의 입장에선 효율성의 부분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없으실 테니까.
콩쿠르에 지원할 때 심사위원이 누군지 체크하는 건 물론이고 레퍼토리 등도 어떤 곡이 유리할지 전략적으로 분석하시는데, 학생들을 한 콩쿠르에 몰아넣길 바라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혹시…… 저나…… 다른 아이들이 각각 다른 콩쿠르에 나가길 바라시나요?”
조심스레 물으면서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의 이름이 나올 뻔했던 걸 간신히 집어넣었다. 오늘 들었던 아나스타샤의 연주가 아직도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미하일 선생님은 안경을 벗어 내려놓더니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하하하, 혹시나 중요한 무대에서 너희들끼리 경쟁할까 봐?”
바로 그 말이긴 한데, 선생님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선생님이 다시 안경을 썼다. 참 귀여운 생각도 한다는 눈빛과 동시에 말실수를 지적하시는 목소리가 함께 내 쪽으로 향했다.
“선생들이 그런 걸 두려워할 것 같으냐?”
“아.”
창피해 죽을 것 같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찮단다. 나름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하고. 지금처럼 대형 콩쿠르가 동시에 열렸을 땐 더더욱.”
큰 대회에서 잘 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을 분산하는 게 대회 수상이란 목적만 놓고 보면 합리적일지 모른다. 실제로 세상 어딘가의 학교에선 그렇게 지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중앙음악학교의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타티아나, 너도 잘 알겠지. 피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기에, 더더욱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한다는 걸.”
경쟁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두려워서 친구들과 큰 무대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피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다른 콩쿠르를 찾거나, 아니면 아예 참가하지 않아 버려도 되니까.
그러나 그런 방식은 계속될 수도 없고, 친구이자 음악가로서 해선 안 될 일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 표정을 보더니 큭큭거리며 웃었다. 선생님은 이미 나라는 음악가를 잘 파악하고 계셨고, 큰 걱정은 하지 않으시는 듯했다.
“그리고 너희들도 그런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데? 아니, 더 중요한 무대에서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군.”
“그건…….”
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되레 에르네스트는 같은 콩쿠르에 나가서 결선까지 가자고 할 것 같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경쟁하지 말자고 할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선생님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는지 연신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모두 한마음으로 쇼팽 콩쿠르에 우르르 지원서를 넣진 말거라.”
“아…… 물론이에요.”
스스로 잘 생각해서, 스스로 선택해라.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그게 전부였다.
난 알아들었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선생님은 흡족하게 웃으며 가볍게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자세한 건 2주일쯤 뒤에 이야기 하자꾸나.”
겨우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매우 짧은 대화였지만 내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한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난 방금 전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알게 된 정보들을 다시 머릿속에 되새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도 바로 떠나지 못하고 무언가 더 이야기할 만한 게 없을까 서성이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도 뭐 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고 그냥 날 바라보고만 계셨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선생님이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른다.
“타티아나.”
어떤 이야기든 상관없었는데, 선생님이 꺼낸 말씀은 뜻밖의 감사였다.
“혹시…… 아니다, 오늘 확실하게 참가해 주겠다고 말해 줘서 고맙구나.”
“예?”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단다. 가 보거라.”
그 말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도 않고, 선생님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다시 책상 쪽으로 시선을 내리셨다.
난 잠시 자리에 서서 미하일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종종 내가 기억을 찾은 뒤에도 무대를 대하는 진지함 등에 변함이 없다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시곤 했다.
변함없이 피아노를 연습하고 변함없이 무대에 서려고 하는 게 내겐 당연한 일이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시나 보다.
난 무언가 말을 더 늘어놓는 대신 가만히 웃기만 했다. 복잡할 것 없었다. 선생님이 아끼시는 제자가 무대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증명해 낼 뿐이다.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보자꾸나.”
살그머니 문을 닫고 나왔다.
레슨실에서 묻어 나온 따뜻한 향기는 내 주변에 잠시간 머물러 있다가, 곧 어디론가 휩쓸려 사라졌다. 고개를 드니 학교 복도에 서 있음을 비로소 자각한다.
그대로 왼쪽으로 돌아 발을 뻗었다. 내년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쩐지 크게 걸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난 평소와 다르지 않게 한 걸음씩 신경 써서 또박또박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