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1화
연주자에게 있어 국제 콩쿠르란 경쟁은 필수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코스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성행했을 19세기엔 콩쿠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도 연주자들이 연주회로만 유명해지기도 했고. 현대에도 평생을 콩쿠르에 참가하지 않고 연주회와 음반 활동만 하는 연주자들이 많다.
그렇다면 왜 현대에 생긴 이런 삭막한 전쟁터에 부담과 긴장을 안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가길 바라는 걸까.
명성을 얻기 쉬워서? 흔치않은 이벤트이니까? 상금을 노리고?
셋 모두 분명 매력적인 목적이었다.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난 그런 목적들이 현대엔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가장 큰 목적은 젊은 음악가들의 음악적 교류와 성장에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네요.”
“왕.”
평생 지도 한 번 받아 보기 힘들 저명한 음악가들 수십 명 앞에서 연주를 하고 의견을 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천금을 주고라도 얻고 싶은 기회를 콩쿠르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각양각색의 천재들이 한데 모이는 것도 국제 콩쿠르라는 큰 무대가 아니라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비슷한 행사라면 올림픽이 있다. 전 세계에서 참가자들을 모은다는 것도 같고, 경합을 해서 1위를 가린다는 것도 같다.
하지만 거기엔 큰 차이가 있었다.
올림픽엔 최소 나이 제한은 있어도 최대 나이 제한은 없다. 때문에 50대의 선수도 참가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악 콩쿠르들은 거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17세부터 30세 사이라는 꽉 막힌 나이 제한을 두고 있었다.
연주자의 실력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급격히 쇠퇴하는 것도 아니고 명성이나 상금 같은 것이 30세 후부턴 필요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한창 활동할 나이에 콩쿠르 참가엔 제한을 받는 것이다.
이 나이 제한이야말로 음악 콩쿠르 존재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였다. 젊은 음악가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대회.
단순한 등용문을 넘어서 전 세계가 공유하는 클래식 음악의 새로운 성장이라는 목표가 음악 콩쿠르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난 콩쿠르에 참가하는 모든 음악가들을 응원한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성장이 곧 음악계 전체의 성장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람…….”
연습실에서 벨카를 옆에 두고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발작하듯 어깨를 푸르르 떨었다.
내가 미쳤나 보다. 겨우 열여섯짜리 학생 주제에 무슨 음악의 신이나 할 법한 생각을 하고 있다. 창피하게 정말.
스스로에게 어이없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괜히 손에 닿는 대로 벨카를 쓰다듬었다. 벨카가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 눈을 부라린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난 양손으로 벨카를 마구 쓸어 주었다. 결국 벨카는 마음대로 하라는 것처럼 늘어져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벨카가 커다란 인형처럼 되어 버렸으니 얼마든지 이 털뭉치를 만끽해도 된다. 귀한 기회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남은 시간이 그리 없었다.
“이만 출발해야겠네요.”
“?”
슬슬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시간이었다. 늘어져 있던 벨카가 고개를 들곤 내 쪽을 바라본다. 이 시간에 어딜 나가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난 마지막으로 벨카를 안아 주고는 일어났다.
“오늘은 오프닝 갈라 콘서트만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금방 돌아올게요.”
“……우웅.”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개막일이 밝았다. 날이 밝았다고 하자니 저녁 7시에 시작하는지라 느낌이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앞으로 2주일간 열리는 이 콩쿠르에서 200명이 넘는 음악가들이 경쟁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직접 참가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내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벨카는 날 못 나가게 막거나 붙잡지 않고 다시 연습실 바닥에 스르르 엎드렸다. 아예 눈까지 감아 버리는 걸 보니 내가 올 때까지 여기에서 잘 모양이다.
“…….”
연습실 문은 살짝 열어 둔 채 방으로 돌아왔다. 아나스타샤와 봐 두었던 이브닝드레스가 있었다. 말이 이브닝드레스지 약간 포멀한 형식의 원피스였다. 연주자가 아니니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나제즈다를 부를 것도 없이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혹시 밤이 깊으면 추워질까 싶어 얇은 카디건도 챙겼다. 겨우 2시간 정도 있을 예정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미리 가볍게 식사도 했고, 더 준비할 건 없는 것 같다. 몇 번이나 확인을 마친 뒤 다시 밖으로 나오니 이미 검은 벤츠에 시동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엔 경호원 두 명이 날 기다리는 중이었다.
투박한 스포츠머리에 굵직한 목이 인상적인 레오니드와 키가 큰 야콥이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레오니드, 야콥.”
내 전속 경호원들은 여름휴가를 떠나고 없었다.
그들이 휴가를 떠나고 나면 난 자체적으로 외출금지령을 스스로에게 내리는 게 그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번엔 나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레오니드에게 부탁했다.
빅토르에게 전화를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묘한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내 방학의 자유와 행복에 대해 중얼거렸다. 나중에 자하르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여행지에서 평소 잘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곤 취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야기했다간 그가 죽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그냥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아무튼, 그간 레오니드와 야콥은 저택 안에서만 몇 번 스쳐 지나가면서 만난지라 일할 때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척 보기만 해도 경호원 그 자체였다. 외모만 놓고 보면 경호원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가는 빅토르와 천지차이였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레오니드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더니 덧붙였다.
“안전하게 모시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빅토르가 으름장을 놓았으니 말입니다.”
“……그가 그랬나요?”
“그러니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제가 빅토르에게 말 잘못하면 큰일 나는 건가요……? 난 알겠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니드가 피식 웃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목적지는 미리 말해 두었다. 차량은 소리 없이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향했다.
“…….”
저녁의 스와레soiree 콘서트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길게 뻗어오는 태양빛이 건물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스마트폰을 들고 아나스타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내기가 무섭게 답장이 날아들었다.
[나도 거의 다 와 가.]
그녀는 에르네스트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고 있는 중이라 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먼 콘서트홀에서 열린다면 이번에도 친구들을 데리러 갈 생각이었지만, 모스크바 음악원은 우리가 늘 등교하는 중앙음악학교에서 몇 분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항상 가는 길을 가는데 복잡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아나스타샤의 말에 난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 함께 가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다.
대신 아쉬운 만큼 멍하니 있는 시간은 빨리 갔다. 체감상 몇 분도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익숙한 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안 익숙한 음악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브라스 밴드brass band 공연도 하네요?”
모스크바 음악원 앞에는 본래 차이코프스키의 커다란 동상만 있었는데, 오늘은 관악기들로 이루어진 브라스 밴드가 줄을 서서 환영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브라스 밴드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화려한 복장과 모자야 각 밴드마다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행진곡풍의 음악도 굉장히 강인하게 들린다.
“어느 밴드인지 알고 싶네요.”
혼잣말로 중얼거렸더니 레오니드가 대답해 주었다.
“군악대인 것 같습니다.”
“예?”
깜짝 놀라 되묻자 군인 생활을 꽤 길게 했었다는 야콥이 이어받아 설명해 주었다.
지금 모스크바 음악원 앞에서 공연 중인 취주악단은 정식 명칭이 ‘러시아 국방부 중앙 군사 밴드’로 길지만 일반적으로 붉은 군대 오케스트라red army orchestra라고 불리며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연주자 집단이었다.
세계적인 군악대들 중에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군악대로 인정받아서, 러시아 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오케스트라처럼 해외 공연도 자주 나간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정말 군악대가 맞긴 한지 의문이지만, 공연 모습을 보니 이해가 간다.
누가 듣더라도 이 정도로 강렬한 연주를 특정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건 아깝다고 생각할 테니까.
“…….”
난 차에서 나올 생각도 못 하고 연주를 듣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는데 벌써부터 넋이 나가 버렸다.
역시 대형 국제 콩쿠르답다고 할 수도 있고…… 다른 나라들에서 이렇게까지 환영 행사를 하는 경우가 그리 없다는 걸 생각하면 러시아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기도 했다.
한참이나 그렇게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갑자기 창문 앞으로 슥 다가와서 그제야 깜짝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에르네스트!”
“안녕.”
급히 창문을 내리니 단정한 정장 차림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좌로 까딱했다.
“한참 지켜봤는데, 왜 안 내리고 있어?”
“아, 그게…….”
환영 공연에 넋이 나가 있었다고 말하려다가 머뭇거리자 그가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럴만도 해.”
더 묻지 않고 그는 대신 문을 열어 주었다.
“자.”
“…….”
그제야 난 차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레오니드와 야콥은 경호 임무를 계속 진행하겠다면서 차를 몰고 사라졌고, 곧 난 에르네스트와 단둘이 되었다. 주변에 사람들은 많이 지나다녔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비로소 평상시처럼 진정된다. 난 가볍게 농담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오늘 연주자로 오신 건가요?”
“아니? 그냥 청중이야. 티켓도 네가 준 거잖아.”
“아하하, 꼭 연주자처럼 보이셔서요.”
“안 튈려고 막 입고 온 건데.”
대체 뭘 막 입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감색 정장은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작곡에 여념이 없을 텐데 이렇게 와 준 것도 고맙다. 밝게 웃으며 바라보자 그는 무엇이 어색한지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움직이다가, 곧 작게 한숨을 쉬더니 앞장섰다.
“가자, 애들 기다리더라.”
“알겠어요.”
난 연주하는 밴드의 멋진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 두고는, 곧 그 음악소리를 뒤로 하고 에르네스트를 따라 음악원 안으로 들어섰다.
모스크바 음악원엔 이전에 와 본 적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때 이곳 연습실을 빌렸었는데, 그때 난 우연찮게 아르카디 교수님에게 레슨을 받은 에르네스트와 만나기도 했었다.
작년 일인데도 바로 엊그저께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난 지금도 그가 올빼미와 부엉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즉석 퀴즈를 내기 전에, 난 복도 한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여기야!”
“타티아나.”
함께 콩쿠르 관람을 할 수 있게 티켓을 준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날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더 많은 친구들에게 티켓을 주고 싶었지만 방학에 모스크바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오랜만이네, 타티아나.”
킥킥 웃으며 인사하는 남자는 작년에 졸업한 막심 선배였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못 본 사이 진짜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난 반가움과 놀라움을 담아 말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난 당연히 여기에 있어야지. 학생이기도 하고, 참가자이기도 한데.”
“아…….”
막상 묻고 보니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
막심 선배는 중앙음악학교 졸업 후 그대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진학했다. 그리고 찾아온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인 선배가 참가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참가할 사람이 또 있었다.
“학생이자 참가자 여기 한 명 더 있어.”
애쉬그레이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녀와 포옹했다.
“또 만날 줄 알았어요, 예카테리나.”
“뭐, 뭐야? 저기 있는 막심은 만날 줄 몰랐고 난 알았고?”
“아하하하.”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 연말 연주회에서 만났던 인연이 여기에 있었다.
이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 출발하기 전에 혼자 생각했던 것들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다른 연주자들이 가진 실력을 마음껏 펼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막심 선배와 예카테리나가 좋은 결과를 거두었으면 좋겠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