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82화 (582/1,277)

##  582화

저녁이 되면서 점점 음악원의 학생들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든다.

기대감에 들뜬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흐른다.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언뜻 들어도 몇 개나 되는 언어들의 홍수였다.

저절로 주변의 분위기도 음악원보다는 콘서트홀과 비슷하게 변해 갔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공통된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떠들썩한 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쉽구나……. 난 타티아나도 이번에 참가할 줄 알았단다.”

“아하하…… 그렇게 되었네요.”

막심 선배의 어머니와는 돔 무지키에서 했던 자선 연주회 이후 이번에 두 번째로 뵙는다. 저번 좋은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어머님은 날 굉장히 친근하게 대해 주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이를 한 살 더 많은 걸로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어디서 잘못 전해진 걸까.

당연히 화살은 선배 쪽으로 향했다.

“이게 다 이 녀석 때문이지. 왜 타티아나의 나이를 잘못 가르쳐 준 거니? 막심.”

“전 두 살 차이라고 정확하게 말씀드렸어요.”

내 나이를 두고 모자가 티격태격하는 기묘한 상황을 보니 어쩐지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든다.

끼어들어 말리는 것도 이상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자 곧 막심 선배가 한숨을 내쉬더니 재빠르게 어머니에게 사과하고는 날 데리고 옆으로 도망쳤다.

뒤이어 내게도 사과한다.

“미안, 정말 미안.”

“괜찮아요.”

“나 참…….”

선배도 곤란한지 머리를 긁적인다.

간만에 봤는데 어색한건 싫었다. 난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돌렸다.

“저기, 이번에 참가하신 거라면…… 혹시 니콜라이 선배님도 콩쿠르에 참가하셨나요?”

“어. 맞아.”

막심 선배도 지금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덥석 대답했다. 그러더니 웃으며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첼로는 저기 위쪽이지만.”

“아, 첼로와 성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는 거였죠?”

“맞아.”

본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모스크바에서 모든 부문의 콩쿠르를 동시에 진행했지만, 2011년부터는 모스크바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만 하고 나머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한다. 두 도시를 아우르는 콩쿠르가 된 것이다. 심지어 올해는 목관과 금관이 추가되어서 규모가 보다 더 커졌다.

물론 오프닝 갈라 콘서트도 두 도시에서 동시에 할 순 없어서 모스크바에서만 열지만, 바로 내일부터 콩쿠르 일정이 진행되므로 니콜라이 선배는 첼로를 가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미리 가 있는 모양이었다.

말쑥하고 선한 인상에, 날 늘 후배님이라고 불러 주던 목소리가 기억난다. 가까이에서 응원도 한 마디 못해 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살짝 말해 보았다.

“전화를 해 볼까요?”

“전화까진 필요 없고. 메시지나 하나 보내 주면 될 것 같은데.”

“…….”

막심 선배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말했다. 하지만 듣고 보니 갑자기 전화를 하는 것도 조금 어색해서 메시지를 먼저 해 보기로 했다. 내용은 당연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답장은 곧 날아왔다.

[고마워요. 타티아나 후배님.]

짧은 메시지인데도 마치 니콜라이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멀리에서 조금이나마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자 막심 선배가 픽 웃으며 말했다.

“멀리 있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니콜라이랑 나는 전공이 달라서 다행이지. 같은 무대에서 안 붙어도 되니까.”

“……다행인가요?”

“다행인 거 아냐?”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되묻자 조금 아리송해졌다. 미하일 선생님과 이야기 할 땐 친구들과 큰 무대에서 겨루는 것도 절대 피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바라보는 막심 선배를 보니 내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뭔가 어렵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막심 선배가 물었다.

“너희는 내년에 어떻게 할 건데? 다른 애들은 몰라도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는 내년 분명 어느 콩쿠르든 나갈 것 같은데.”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같은 무대에서 만날 수도 있겠죠.”

“그건 어쩔 수 없지.”

“…….”

이 선배,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거 아냐?

약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데, 막심 선배는 아무 눈치도 못 채고는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자며 날 불렀다. 난 작게 한숨을 쉬곤 그 뒤를 따라갔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그리고 예카테리나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예카테리나가 나와 막심 선배를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뚝 떨어진 곳에서.”

“저 위에 있는 다른 녀석 이야기.”

“뭐예요 그게? 이상해.”

짧은 한마디였지만 막심 선배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와, 조금 배우고 싶다.

예카테리나는 오늘 혼자 와선 복도에서 시간을 기다리다가 에르네스트를 만났고, 저절로 여기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막심 선배와도 인사를 하고 친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친해졌을 줄은…… 이 친화력도 배우고 싶다. 예카테리나, 부러워요.

대단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자 예카테리나가 살짝 더 다가오더니 물었다.

“그보다 타티아나, 여긴 누구 응원하러 온 거야? 아까 여기서 볼 줄 몰랐다고 한 거 보면 막심은 아닌 것 같고.”

잠깐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레 말한다.

“혹시 그냥 보러 온 거면 나 응원해 달라 하려구.”

“그럴까요?”

“농담 아니라 진짜로.”

지금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난 잠시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를 살피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번은 모두 나왔겠죠?”

“응? 응. 며칠 전에 한 제비뽑기로 2주일간 스케쥴은 다 정해졌어.”

“후후, 예카테리나가 무대에 서는 건 꼭 와서 볼게요.”

“정말? 정말이야?”

“예. 정말요.”

난 그녀에게 약속하듯 다시 말했다.

“쭉 응원할게요.”

“고마워…….”

문득 지난 송년 연주회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그녀는 무대를 앞두고 살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내가 안아 주며 잘 하라고 응원해 주자 출중한 실력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긴장하지 않고 제 실력을 낼 수만 있다면 응원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에틀링겐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라는 타이틀에 이어 차이코프스키 피아코 콩쿠르 우승자까지 된다면 그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부터 목소리가 내려왔다.

“나도 응원할게요.”

“!”

“!?”

우리 두 사람은 기겁해서 고개를 들었다. 난 내 머리보다 한참 위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큰 키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그의 이름을 예카테리나가 먼저 불렀다.

“세르히!”

“오랜간만이네요. 예카테리나. 잘 지냈나요?”

세르히 세르게예비치 칼루진. 그 역시 지난 송년 연주회 때 함께 무대를 꾸렸던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타티아나도 반가워요.”

“예, 세르히. 잘 지내셨나요?”

이미 연주자로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세르히는 그야말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음반 매장에 진열된 음반은 물론이고, 지나가다 뉴스 등에서 들었던 이름만 해도 몇 번이나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하는 대신 내 쪽으로 공을 넘겨주었다.

“덕분에. 메세나 협회에서 했던 저번 연주회는 영상으로 잘 보았습니다. 바흐의 샤콘느를 들어 보니 실력이 더 좋아진 것 같던데요?”

깜짝 놀랐다. 그가 내 연주회 영상까지 봤을 줄이야.

멍하니 올려다보자 세르히가 내 눈빛을 오해했는지 사과를 해 왔다.

“평가하는 것처럼 말해 버렸네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요.”

그는 나지막이 웃으며 나와 예카테리나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 다 이번에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내 기대가 빗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좋은 날이군요.”

강철 같은 피아노 타건과 달리 정말 부드러운 말이었다. 이런 격식 있는 태도는 처음 만날 때부터 굉장히 인상적이기도 했다. 난 나 역시 세르히를 보게 되어 좋다고 답하려 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가 갑자기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먼저 끼어들었다.

“잠깐, 세르히도 참가하신 건가요? 하지만 저번 제비뽑기 할 땐 없었…….”

“참가자가 아니니까요.”

“아, 그럼 청중으로?”

“아뇨.”

“?”

예카테리나가 어리둥절해했고,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다.

참가자도 아니고 청중도 아니면…… 심사위원? 하지만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세르히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긴 힘들 것이다.

물론 실력은 충분히 누군가를 심사할 정도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리에 앉기까지 필요한 명성은 지금의 실력을 최소한 10년은 넘게 유지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어떤 역할이 남지? 난 예카테리나와 함께 고민에 빠졌다.

세르히는 재미있다는 듯 우리 두 사람을 보더니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모르시는 것 같으니 말 안 해 줄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짜 모르면 가르쳐 주는 게 맞지 않아요?”

“여기 있죠.”

우릴 잔뜩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나서 세르히는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또 갑자기 뒤로 훌쩍 물러섰다.

“나중에 봐요, 두 사람 다.”

그러더니 그는 작별인사를 제대로 할 틈도 없이 군중들 사이로 사라졌다. 키가 190cm도 넘는 사람이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금방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와 예카테리나는 우린 사실 세르히의 귀신을 본게 아닐까 하는 이상한 결론을 내면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후 스피커에서 울리는 안내를 듣고야 정신을 차렸다. 콩쿠르 참가자들은 2층 로비로 모여 달라는 안내였다.

“오늘은 오프닝만 하니까 우린 할 거 없을 줄 알았는데? 음…… 모르겠다. 갔다 올게.”

“예,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도 막심 선배도 그렇게 안내에 따라가 버렸다. 막심 선배의 부모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남은 건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그리고 에르네스트였다.

에르네스트는 북적거리는 복도 한쪽을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이번엔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런가요?”

“내가 아는 얼굴들이 몇 보이는데, 다들 무시 못 할 사람들이야.”

에르네스트는 우리 중에서 가장 연주회나 콩쿠르 경력이 많다. 그 덕에 아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은데,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이번엔 굉장히 수준이 높은 모양이다.

“올해 이 정도면…… 내년도 재미있을 것 같아.”

에르네스트는 상대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즐거워하는 사람이었다. 요즘 작곡에 부쩍 힘을 쓰고 있지만, 내년엔 콩쿠르에 집중할 게 분명했다.

“내년 콩쿠르에 나가실 생각이신가요?”

“당연히 나가야지.”

“어떤 콩쿠르에요?”

혹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 둘 다 나가는 게 아닌가 싶어 살짝 물어보았는데, 그는 곧바로 알려 주지 않고 말을 빙글 돌렸다.

“비밀이야.”

“…….”

“너는? 타티아나.”

제가 바보인 줄 알아요?

“저도 비밀이에요.”

“……그래?”

“예.”

“못 정한 건 아니고?”

“!?”

내가 그렇게 읽기 쉽나?

난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고, 그건 곧 내가 바보가 맞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빠르게 지나간 심리전에서 완패하고 억울함을 곱씹고 있는데 발렌티나가 토끼처럼 폴짝 끼어들었다.

“비밀? 무슨 비밀?”

“발렌티나.”

에르네스트는 사냥감이 하나 더 걸렸다는 듯한 눈빛을 하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넌 내년에 무슨 콩쿠르 나가려고?”

“나? 쇼팽.”

“…….”

그런데 발렌티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말문이 막힌 건 에르네스트 쪽이었다.

“일단은 예선 진출을 목표로 하고, 본선에 간다면 남은 반년 동안 진짜 하루 종일 피아노 연습만 해서…… 너희들 표정이 왜 그래?”

왠지 모든 게 바보 같아졌다. 분명 에르네스트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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