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83화 (583/1,277)

##  583화

우리는 오프닝 갈라 콘서트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대화의 대부분은 콩쿠르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지금은 관람객으로 와 있지만 언젠가 참가자로서 무대에 서게 될 거란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자기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보게 되는 것 같다.

내년 쇼팽 콩쿠르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던 발렌티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기 있는 애들 중에 내년에 나올 애들도 있겠지? 이번에 실력을 봐 둘 수 있어서 잘됐네.”

발렌티나는 먼 곳을 보고 있었지만, 난 살짝 떨어져선 곁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 남은 두 사람은 어떻게 하고 싶어 할까?

에르네스트는 비밀이라고 했으니 쉽게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결정을 내린 다음에 똑같이 대답을 교환하거나, 아니면 내기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일단은 나중에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게 좋겠다.

“넌 어디 나갈 건데? 아나스타샤.”

“글쎄? 봐서.”

아나스타샤 역시 발렌티나와 내년 콩쿠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신이 어느 콩쿠르에 나갈진 밝히지 않고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발렌티나가 몇 번 물어봐도 소용없었다.

난 여러 상황을 생각해 보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 네 명 중에서 반드시 직접적으로 경쟁할 상황은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비단 넷뿐만이 아니라 자기 나라로 돌아가 있는 리처드나 한승우가 합세한다면 몇 명이나 만나게 될지 모른다.

“쇼팽 콩쿠르 쪽으로 올 건 아니지?”

“봐서라니까? 그리고 상관없잖아? 어차피 우리보다 더 괴물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즐비할 텐데.”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있잖아…….”

물론 상대가 누구든 간에 최선을 다해 상대할 뿐이다.

그러나 막심 선배가 니콜라이 선배와 대결할 일이 없음에 안심하는 것처럼, 지금 발렌티나가 머리 아프단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친구들 중 한 명이라도 더 피한다면 안심하고 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지금도 조금 혼란스럽다. 안도를 찾는 이 마음이 친구들과 적당히 모두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강적을 피하고 싶은 도피심리에서 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도피 심리라면…… 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내가 아는 강적이라 할 수 있는 에르네스트를 따라가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냥 우리 다 같이 같은 콩쿠르 나갈래?”

“……예?”

정확하게 미하일 선생님께서 우려하셨던 상황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약간 당황해서 되묻자 그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만약 내년에 열릴 대형 국제 콩쿠르가 하나뿐이었다면, 어차피 우리 모두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을까?”

아주 간단한 논리였다. 그녀의 말대로 하나만 열렸다면 피할 생각 따윈 없이 참가했을 것이다. 지금 혼란스럽고 괜히 친구들이 어디에 나갈지 살피게 되는 건 두 개의 대형 콩쿠르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런 빠져나갈 조건 자체를 없애면 되지 않냔 뜻이었다.

“…….”

난 아나스타샤의 말에 동조하지도 반론을 내지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쉽게 해결하자는 듯 쿨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녀도 자기 내면의 나약함을 떨쳐 내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칼같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좀 마.”

“뭐가?”

“그렇게 콩쿠르 지원서 넣고 나서 누가 왜 그 콩쿠르에 지원했느냐고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려고? 친구가 지원해서 같이 넣었다고?”

“…….”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 정론이었다. 마치 선생님 같은 어투였다.

아나스타샤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가, 맞는 말이라도 화가 나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남이 뭐라든 무슨 상관이야?”

“질문하는 누군가는 남이 아니라 너 자신일 수도 있어.”

두 번째 정론은 더더욱 날카로웠다.

다른 누군가의 질문은 사실 그리 두렵지 않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때, 바보 같은 답변이 나온다면 그건 어찌 방비할 도리도 없다.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스스로가 돌아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 판단을 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아직 열여섯밖에 안 된 에르네스트가 벌써 그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새삼 그가 많이 어른스러워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조금 더 어른스러웠다면 지금 이 상황에 그렇게 정론만으로 친구를 공격하듯 말하진 않았겠지.

“그러니 나중에 잘 생각해서…….”

이야기를 하던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그답잖게 말꼬리를 흐렸다. 정론에 두 번이나 당한 아나스타샤가 아무 말 없이 노려보는 시선이 너무나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매사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의 시선은 무섭나 보다. 그는 중얼거리며 대충 이야기를 덮으려 했다.

“괜한 소릴 했네. 네가 알아서 잘 할 텐데.”

대화의 저울이 꿈틀거리는 순간을 아나스타샤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야, 에르네스트. 네 조언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너도 알다시피 난 멍청해서 혼자선 바보 같은 발상밖에 못 하거든.”

“야…… 미안해.”

“미안할 게 뭐 있니? 그냥 내가 쓸데없는…….”

“제발. 아나스타샤. 눈치 없고 멍청한 건 나였던 걸로 하자.”

에르네스트가 저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조금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더 바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발렌티나가 한마디 얹었다.

“너희가 그러면 난 뭐가 돼? 슬퍼졌어 갑자기.”

“너도 끼워 줄게. 바보 트리오네.”

바보 트리오라는 건 그리 좋은 트리오가 아닌 것 같은데, 발렌티나는 굉장히 기뻐했다. 난 그녀가 왜 기뻐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는 건 이쯤 하기로 했다. 다른 말이 더 나오기 전에 나도 살짝 끼어들었다.

“저도 함께할게요. 콰르텟으로 하는 건 어때요?”

“……가장 모범생인 네가 끼면 안 될 것 같은데?”

“아니라는 거 아시면서.”

이 애들만큼이나 나도 혼란스럽고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니 모두 똑같은 입장인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상황이 우습긴 한가 보다.

그렇게 농담 등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화의 흐름은 내년의 콩쿠르에서 다시 지금 이 시간으로 옮겨왔다.

7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슬슬 입장할까?”

“그럴까요?”

이야기를 마치고 우리는 함께 그레이트홀로 향했다. 홀은 그리 멀지 않았다. 친구들을 따라 복도를 걷길 잠시, 티켓을 내고 입장하니 마치 마법처럼 거대한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난 지금까지 몇 번 이 음악원에 와 봤으면서도 그레이트홀은 처음이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봤었던 홀을 직접 보니 탄성이 나왔다.

“아…….”

난 잠시 멈춰 서서 1737석이나 되는 거대한 홀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중앙 위쪽의 아치엔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고, 좌우로는 차이코프스키, 발라키레프, 림스키 코르사코프 같은 러시아의 음악가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다른 콘서트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음악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박물관처럼 긴 시간 동안 쌓여 온 예술성과 역사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공간처럼 보였다.

1901년에 개장한 이 그레이트홀은 단순히 음악원 학생들만의 홀로 쓰이지 않았다. 수많은 유명 음악가들과 오케스트라들이 이 홀의 음향을 원해서 찾아왔고,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을 땐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한때는 영화관이 되기도 했었다.

클래식 콘서트 전용 홀로서의 유구한 전통은 물론이고 모스크바 사람들의 역사 역시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

한참이나 감상에 빠져 있다가, 에르네스트가 돌아보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바보 콰르텟에 가입하긴 했지만 멍하니 있으면서 진짜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여기지?”

“응.”

베르너가 구해 준 티켓 덕분에 우린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발렌티나가 안쪽으로 먼저 들어갔고, 다음 에르네스트와 내 순서였다.

자리에 막 앉고 나자 어수선한 주변의 열기가 느껴졌다. 이 홀은 냉방 시설이 없어서 조금 덥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 저녁인데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수천 명의 열기가 한꺼번에 불타오르면 얼마나 더울지 상상도 안 간다.

난 신기해하기도 하고 기대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기다렸다.

잠시 후, 청중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는지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 고요를 기다렸다는 듯 무대 옆에서 오케스트라가 등장했다. 50명도 넘어 보이는 대형 오케스트라였다.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야.”

아나스타샤가 작게 속삭였다. 나도 이 홀을 주 무대로 사용하는 오케스트라에 대해선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모스크바 방송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

1930년 창단되어 본래 국영방송을 위한 오케스트라였지만, 지금은 그뿐만이 아니라 두루 활동하면서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교향악단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였다.

입장할 때 봤었던 붉은 군대 오케스트라도 그렇고, 확실히 콩쿠르에 동원되는 오케스트라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은 것 같았다. 점점 더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수 소리에 휩싸이며 들어오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몇 명의 사람들도 입장했다.

그중 사회자로 보이는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제16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중한 인사 멘트, 그러자 바로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그 멘트를 그대로 따라서 영어로 말했다. 국제 콩쿠르이니만큼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으니 필요한 일이었다.

“귀중한 시간, 귀빈들을 모시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국제 차이코프스키 대회 조직위원회 공동 의장, 디아나 레오니예바 젤레스나께서 잠시 말씀하시겠습니다.”

사회자가 옆으로 손을 펼치자 디아나라고 소개된 분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이 유서 깊은 대회를 총괄하고 있는 의장이니만큼 대표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1958년부터 시작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오늘로 16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가자 역시 계속해서 늘어나 올해는 227명의 참가자들이 선발을 거쳐 본선에 올 수 있게 되었죠. 전 이 순간에 함께 할 수 있다는 데에 크나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 말과 다시 영어로 번역됨과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디아나 의장은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227명의 참가자들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성악, 목관, 금관의 각각 부문에서 경쟁하여 총 6명의 1등상, 클래식 음악계의 신성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중에서도 한 명의 그랑프리 대상자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랑프리 대상은 어떤 음악을 다루느냐에 관계없이 큰 틀에서 아우르는 음악성을 보고 주는 상이다. 상금도 가장 많다고 하고…… 이 대회의 진정한 대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인사말이 이어졌지만, 아무리 짧게 말해도 영어로 반복되면서 길어진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의장은 너무 길지 않고 적당하게 마무리 지었다.

“이 뛰어난 젊은 음악가들의 국제적인 경쟁과 교류가 아름답고 건설적이길 바랍니다.”

박수와 함께 그다음으론 러시아 문화부 장관의 축하연설이 있었는데, 디아나 의장의 인사보다 훨씬 더 짧게 끝났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마이크를 쥔 사회자가 더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16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개최를 선언합니다.”

그렇게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음악인들의 행사가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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