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4화
지휘자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정중하게 묵례를 보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 서 있던 단원들이 의자에 앉아 연주를 준비했다.
곧 고요 속에서 지휘봉이 소리 없이 하늘로 향하고, 내려져 있던 악기들이 순식간에 똑같은 각도로 늘어선다.
수십 명의 사공이 동시에 노를 저었다.
“…….”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모음곡 중 두 번째 곡. 왈츠.
본래 백조의 호수는 발레곡이지만 워낙 큰 성공을 거둔지라 음악들 역시 유명해졌다. 오케스트라들이 발레 없이 이 곡을 연주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쫑쫑거리는 귀여운 음색이 발레를 하듯 무대 위를 떠돌다가, 퍼커션의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른다. 이후 이어지는 관현악의 합주.
‘이렇게 들어도 좋네.’
얼마 전 크로커스 시티의 콘서트홀에서 백조의 호수를 관람했었을 때 들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보다 강렬하고 무게감 있다. 이것을 발레로 표현하려면 정말 쉽지 않겠지만, 음악에 따라오는 기억은 곧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냈다. 발레리나는 없었는데도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왈츠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음악만 들어도 정말 많은 것이 짐작된다.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었고, 홀의 음향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심지어 지금 음악을 감상중인 청중들의 집중력까지도.
기침소리는커녕 작은 부스럭거림도 없는 고요 속에서 청중들은 하나로 흐르는 음악에 동화되어 있었다.
나 역시 눈을 감고 거기에 참여했다.
상냥하게 흐르던 선율은 슬쩍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서서히 크기를 키워 나가며 무대를 그렸다. 실제 무대가 커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다른 곡들을 시작하기 전에 서곡처럼 이 곡을 골랐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강하게만 밀어붙이지 않고, 그렇다고 힘없이 내려앉지도 않으면서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라는 이름에 걸맞은 중후함과 우아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 대단한 연주였다.
“……!”
연주가 끝나자 수천 명의 박수가 무대 위로 쏟아졌다. 환호하는 목소리보단 박수가 훨씬 더 잘 어울림을 모두가 아는 것 같았다.
단원들이 잠시 일어서 지휘자와 함께 그 박수에 화답했다. 깔끔한 인사와 답례였다.
박수가 멎고, 곧바로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예브게니 오네긴…….’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의 운문서사시를 원작으로 하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이 역시 관현악곡만으로도 따로 연주되기도 한다.
지금 연주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소절인 폴로네이즈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뿔나팔 소리 같은 금관의 소리가 먼저 밝은색을 칠하고, 곧이어 현악기들이 따라붙는다.
백조의 호수의 우아하고 정갈한 느낌이 경쾌한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무대가 확 밝아지는 것 같았다. 러시아적인 다이내믹의 향연이었다.
절로 미소가 나올 것 같은 행진곡은 군악대의 행진곡과는 조금 다르다. 한적한 시골의 남성들이 파티를 하면서 열을 지어 행진하며 부르는 노래에 가까웠다. 난 그 행렬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눈을 살짝 감았다.
멀리 떠나지 않고 가깝다. 목가적인 행진곡이란 이런 느낌일까. 같은 주제가 반복되면서 풍경을 몇 번이고 색칠하고 빙글빙글 마을을 돌았다.
그렇게 이 무대를 다시 한 번 소개하는 것 같은 음악은 금관의 화려한 클라이맥스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브라보!”
이번엔 환호가 일었다. 백조의 호수도 예브게니 오네긴도 애피타이저라 할 수 있는 짧은 곡들이었지만, 너무나 훌륭해서 사람들의 기대감을 만족시켜 주기엔 충분했다.
물론 갈라 콘서트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오케스트라가 일어나서 답례하고, 이번엔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음악으로 기억에 남으셨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가곡. 6개의 로망스 op.38가 되겠습니다.”
사회자가 무대 옆으로 손을 펼치며 말했다.
“이 곡을 선사할 성악가 크세니야 아르티예브나 코니체바를 소개합니다.”
청중들의 환영 속에서 드레스를 입은 한 성악가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난 성악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크세니야 아르티예브나라는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적 있었다. 근래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꽤나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성악가였다.
그런 성악가가 콩쿠르 오프닝 갈라 콘서트를 위해 나와 준 것이다. 그녀를 조금 더 잘 아는 팬들은 훨씬 더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크세니야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청중석 쪽으로 윙크를 보내며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러한 교류도 잠시, 곧 프로 성악가의 담담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지휘자가 크세니야로부터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받고 반주자에게 전달한다. 곧 반주자의 피아노 소리가 홀을 울렸고, 그보다 크게 크세니야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머나먼 알프하라스는 점점 어두워지고, 황금빛 거리에서…….”
성악을 배우면서 난 가곡들도 꽤 챙겨 듣곤 했고, 덕분에 이 곡이 어떤 곡인지도 알 수 있었다.
6개의 로망스 op.38에서도 첫 번째 곡. 돈주앙의 세레나데였다.
톨스토이의 글에서 따 온 음악으로, 돈주앙은 기타를 들고 니세타라는 사랑하는 여성이 발코니로 나와 주길 노래하고 있었다. 그저 애처롭게 부르짖는 목소리가 아니다. 칼과 피가 함께하는 정열적인 사랑의 노래였다.
쉽게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스페인의 노래라 생각하면 그 열정으로 말미암아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본래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곡인데도 크세니야는 아주 정열적으로 노래했다.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두 번째 곡, ‘이른 봄’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풀이 올라오는 이른 봄, 개울이 흐르고…….”
열정적인 사랑의 세레나데에 이어진 자연의 찬가였다.
피아노 반주자는 아주 노련하게 음악의 흐름을 어색하지 않게 조절했고, 크세니야 역시 목소리에서 이어지는 힘을 그대로 쏟아내면서도 감정선이 얽히지 않도록 했다.
난 손으로 음악의 색채감을 뒤바꾸는 것엔 익숙하지만, 목소리는 어떻게 저렇게 컨트롤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감탄만 하면서 감상했다. 남성의 곡인 돈주앙의 세레나데를 불렀을 때와 그다음의 이른 봄을 불렀을 때의 자연스러움은 정말 경탄을 자아낼 만했다.
성악가도 반주자도 정말 대단한 실력이었다.
곧 한 명의 목소리에 화답하여 수천 명의 환호가 쏟아져 내렸다.
각각 3분 정도 되는 짧은 가곡이었지만 크세니야가 준 인상은 정말 강렬했다. 그녀도 만족했는지 환하게 웃으며 청중들에게 답인사를 보내고는 조용히 무대 뒤로 나갔다. 아마 그녀도 내일 즈음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릴 차이코프스키 성악 콩쿠르를 관람하고 있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여러분.”
사회자가 짧은 감사 인사로 박수 소리를 멎게 했다.
모음곡과 가곡도 지나가고, 이제 메인 디쉬가 나올 차례였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오프닝 갈라 콘서트의 프로그램은 매회마다 다르기 마련이지만, 이 곡만큼은 빠지는 일이 없다.
“다음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입니다. 연주자는 가미드 페도로비치 치비로프.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가미드 페도로비치 역시 몇 년 전부터 클래식 애호가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던 피아노 연주자였다. 대형 국제 콩쿠르의 오프닝 갈라 콘서트답게 정말 구성원들이 화려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이 함께하고 있는 콩쿠르였다.
박수와 함께 입장한 가미드는 키가 크고 말쑥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객석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고는 지휘자, 악장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음악으로 교감하기 전 잘 부탁한다는 표시였다.
방금 전까지 가곡을 반주하던 피아노 앞에 가미드가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피아노의 존재감이 더 거대해졌다.
“…….”
곧 지휘자가 팔을 들어 올렸고, 그 팔의 움직임에 따라 내림나단조의 묵직한 화음이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금관악기들로 이루어진 하강 화음이 내려오고, 현악기들이 확 끌어올려 펼친다. 세 번을 반복하고 나니 이미 청중들의 모든 귀와 마음은 오케스트라에 빼앗긴 후였다.
긴장감을 한껏 끌어 올린 오케스트라는 다음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가져가고, 피아노가 5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의 반주를 맡았다.
엄청난 규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의 존재감은 전혀 뭉그러지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필적했다. 환상적인 균형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함께 음악을 이룬다.
이 독특한 서주는 현존하는 모든 피아노 협주곡들을 놓고 보아도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했다.
“…….”
난 이 협주곡을 혼자서도 연주할 수 있다. 총보독법에 익숙해지기 위해 오케스트라 파트도 빠르게 캐치해서 이어붙이는 연습을 많이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난 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앞에서 3악장을 혼자 연주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면 이런 음악이 된다. 차이코프스키가 안배한 진정한 음악성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작년에 연주했었던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이나 훔멜의 피아노 협주곡도 마음에 들고 만족스럽지만, 이 곡을 연주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욕심이 나기도 했다.
내년에 콩쿠르에 나가기 전에 오케스트라와 협주곡 연습을 해야 한다면, 이 곡도 연습할 기회가 있겠지.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린다.
‘집중, 집중.’
지금 연주 중인 연주자를 부러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음악 감상에만 방해될 뿐. 난 살짝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가미드와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신경을 쏟았다.
곧 피아노가 주선율을 이어받았고 오케스트라와 잠시간 함께 연주하더니 솔로 파트로 넘어갔다. 난 머릿속에 있는 악보를 꺼내 와서 따라 읽으며 그 흐름을 쫓아갔다.
구름 위를 부유하는 것 같던 음향은 이제 바람이 되어 날고 있었다. 화려하고 재빠르다.
다시 한 번 구름에 파묻혔다가, 그 위로 솟구친다. 처음의 주제가 되풀이되면서 구름을 밟고 뛰어올랐다.
느긋한 해석인가 싶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차이코프스키의 낭만주의적 화법을 굉장히 잘 이해하고 풀어내는 연주였다. 일반적인 음반에선 듣기 힘든 색다른 해석이라 난 귀로 들리는 모든 음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
피아노에 이어 클라리넷을 필두로 한 금관의 주제가 시작된다. 가미드는 옆으로 물러서면서 빠르게 그 구조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고 지휘자와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프로페셔널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클라리넷의 순서가 끝난 뒤엔 다시 가미드의 활약이 돋보였다. 옥타브 연주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빠른 아르페지오가 몇 계단이나 넘나들며 연주되고 곧 피아노의 독주 카덴차가 시작되었다.
연주자의 비르투오시티를 증명하는 순간이다. 가미드는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기교적인 파트들을 소화해 내고, 서정성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엔 마치 카멜레온처럼 상냥한 음색을 드러내었다.
환상적인 카덴차가 흐르다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오케스트라가 합류하면서 1악장은 피날레로 향했다. 모든 주제를 순식간에 아우르고, 그 주제로부터 나아가는 외삽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20분가량의 1악장이 화려하게 마무리되고, 숨을 몇 번 쉬기도 잠시. 2악장이 시작되었다.
“…….”
산뜻한 바람이 분다.
현악기들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피아노가 속살거리는 목소리로 노래했다. 강렬한 1악장과 대비되는 평온한 악장이다.
하지만 평온함만이 존재하는 악장은 아니었다. 곧 피아노가 다이내믹하게 튀어오르기도 하고, 질세라 오케스트라가 거기에 따라붙어 무대를 흔들어 놓기도 했다. 심심할 틈 없이 즐거운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는 하나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3악장…….’
장대함을 주로 하는 협주곡의 3악장들과 비교하자면 조금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분에 그 주제를 두고 있는 악장이었다.
마호가니 테이블 위의 고급 찻주전자를 떠올린다. 그 곡선과 문양은 한 바퀴 돌 때마다 바뀐다. 분명 똑같아야 할 텐데, 어떻게 잡고 돌려 보아도 천변만화하는지라 지루하지 않다.
마치 그런 음악이었다. 단순한 주제로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을 크게 빌리지 않고 시작한 음악임에도 그 다채로운 정교함에 넋을 놓고 만다. 시시각각 변하는 선율의 곡선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흔들고 춤추게 만든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세상의 수많은 협주곡 중에선 적당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그토록 사랑받는 레퍼토리가 된 것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요구하는 기교의 수준이 적당하니 어느 수준에 오른 연주자가 연주한다면 섬세하고 깔끔하게 음악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음악. 모차르트의 협주곡들이 그러한 정갈함이 두드러지지만 기교주의가 꽃을 피운 낭만으로 넘어오면 그런 협주곡은 흔하지 않다.
때문에 이 음악은 곧 피아노 부문 결승전 진출자들이 반드시 연주해야 할 필수곡이기도 했다. 난 다른 콩쿠르 참가자들이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할지 정말 기대되기 시작했다. 분명 지금 흐르는 이 곡선과는 다른 곡선을 보여 줄 것이다.
“……!”
청중 모두에게 마치 결승전을 먼저 보여 주는 것 같은 연주를 선사한 가미드는, 마지막까지 오케스트라와 완벽하게 합을 맞추어 음악을 마무리 짓고는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브라보!”
지금까지의 것 중에서 가장 큰 환호성이 울렸다. 이 메인 디쉬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연주자와 지휘자,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모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보러 오길 잘했죠?”
나 역시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에게 속닥거리며 물어보았다. 그녀는 날 보더니 웃으며 팔을 콕콕 찔렀다.
“그러게 말야.”
흔한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콘서트였지만, 언제나 봐도 만족스러운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게다가 다음 디저트까지 남아 있었다. 미리 본 프로그램 리스트에선 아직 두 곡을 더 연주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가미드는 무대 뒤로 나가 버렸다. 커튼콜이라도 보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청중들 사이에 번져 나갔다.
막 다시 커튼콜을 보내려는 찰나였다. 피아노 연주자가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먼저 나갔던 가미드가 아니었다.
“세르히?”
난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