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5화
아까 만났을 때 참가자도 청중도 아니라는 말은 갈라 콘서트 연주자라는 뜻이었다.
상상도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안내된 프로그램 리스트엔 모스크바 방송 차이코프스키 관현악단과 성악가 크세니야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 가미드의 이름밖에 올라와 있지 않았으니까.
난 혼자서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싶어서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보았다.
“세르히 세르게예비치가 오프닝에 무대에 올라온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아니?”
그녀도 고개를 젓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르히를 발견하고 작게 속닥거리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예상 못한 선물을 받은 것에 대한 흥분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냥 나중에 추가로 섭외했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
사전 공지된 프로그램에 없던 상황이지만 실수나 사고가 아닌 미리 준비된 상황이라면, 콩쿠르 주최 측 입장에선 대단한 도전이라 할 수 있었다. 수십 년간 비슷한 레퍼토리로 고정되어있다시피 한 콩쿠르 오프닝에 새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이니까.
사실 몇 년 전부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여러 변화를 꾀해 왔다. 콩쿠르가 열리는 도시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누기도 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그랑프리 상을 추가하면서 1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상금을 걸었다. 이번엔 목관과 금관의 분야를 추가하기도 했고.
그저 고루한 클래식 콩쿠르가 아닌, 현대에 요구되는 것들을 조금씩 추가해 나가는 느낌이었다. 난 이러한 변화도 굉장히 좋은 흐름이라 생각한다.
무대 위로 올라온 세르히는 세련된 몸놀림으로 인사를 보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으로 한창 만족한 관객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폭발적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 환호의 파도에 몸을 맡긴 것처럼 세르히는 자연스레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오케스트라는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았고 지휘자는 작게 손을 펼쳐 세르히에게 내보였다. 마음껏 실력을 보여 달란 뜻이었다.
세르히는 거기에 응했다.
“…….”
보통 빠르기를 뜻하는 모데라토moderato의 속도에 따라 내림마장조의 선율이 흐른다.
언뜻 음울한 색을 띠고 있는 것 같지만, 가만히 빨려들어가 보면 밤하늘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저녁 8시의 연주는 이 홀의 안과 밖의 구분을 지워 버리고 어두운 우아함에 몸을 담글 수 있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라흐마니노프의 환상적 소품 op.3의 첫 번째 곡. 엘레지elegie.
애도하는 노래라는 뜻의 이 곡은 피아노 소리만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정말 누군가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가사 없이 모음으로만 이루어진 성악곡 보칼리제vocalise에서 조금 더 음악적 본질 쪽으로 나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별히 어렵고 난해하지 않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히고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음악. 정말 많은 음악가들이 이런 음악을 구사할 수 있길 바란다. 나 역시 그렇고.
“…….”
감상자로서, 그리고 연주자로서 한껏 매료되어 세르히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의 연주는 고풍스러운 라흐마니노프식의 화법을 충분히 구사하면서도 마치 쇼팽과 같은 세련된 느낌도 담아내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를 쇼팽처럼 연주하는 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해석이지만, 세르히의 음악은 달랐다. 두 음악가를 정말 극한까지 분석한 끝에 액기스만 추출해서 손끝에 녹여낸 느낌이다.
덕분에 어두우면서도 마음에 편안하게 녹아드는 음색은 러시아적인 녹턴 혹은 발라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듣는 청자로 하여금 반쯤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밤하늘에 손을 뻗고 노래를 하던 여성은 곧 발코니 밖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대로 허공을 디디면 떨어져 버리고 말 텐데, 고개는 한 번도 밑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위쪽으로 향한다. 의심도 망설임도 없이 내민 발은 허공을 살포시 밟고 그다음으로 오른다.
가볍게 무릎을 들어 올린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하늘을 걷고 별을 쓰다듬고 달빛을 마신다. 하나의 풍경처럼 밤하늘에 녹아드는 선율은 환상적인 명화처럼 뇌리에 각인되었다.
“…….”
몇 분 정도 되는 음악이지만 흡사 몇 시간은 함께 한 기분이 들었다.
밤 산책이 끝나고 천천히 땅으로 내려온 여성은 다시 노래하며 걷다가, 커다란 나무 옆에 스며들듯 앉는다.
마지막까지 우아하게 맺음을 짓는 그 깔끔함에 감탄이 나온다. 청중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찬사를 보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연주해야 했었지…….”
그 뜨거운 환호 속에서도 난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살짝 돌아보니 그는 무언가 큰 감명을 받은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딱딱하게 목을 굳혔다.
“…….”
저도 모르게 말이 나온 게 부끄러운 걸까? 그는 무어라 말도 하지 않고 내 눈을 슬쩍 피해 버렸다.
이런 반응을 보여 줄 줄은 몰랐는데. 조금 더 장난을 쳐 볼까 했는데, 환호성이 곧 잦아드는 바람에 난 다시 고요한 청중들의 흐름에 함께해야만 했다.
그다음으로 세르히가 준비한 곡은 또다시 라흐마니노프의 곡이었다.
‘종?’
맑게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린다. 피아노 옆에 수십 개의 종을 매달아 놓고 동시에 울리는 것만 같다.
그 환상적인 음형에 혼을 빼앗길 것만 같다.
“…….”
라흐마니노프의 합창 교향곡 ‘종’ op.35
이 곡은 본래 인간의 생애를 그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된 대규모의 음악이었다. 1914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으며 라흐마니노프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세르히가 연주 중인 곡은 그중에서도 첫 번째 곡인 은으로 된 썰매 종the silver sleigh bells이었다.
“!”
세르히의 손이 퉁 하고 튀어 오르며 건반을 친다. 마치 쇠막대로 종을 친 것처럼 청명한 소리가 생겨났다. 그 소리에 응답하듯 썰매견들이 뒤이어 합창한다. 다시 세르히는 종을 울리고, 썰매를 타고, 개들을 부린다.
합창 교향곡이란 원곡에 맞추려면 정규 오케스트라에 테너, 소프라노, 바리톤 및 코러스까지 필요로 했다. 그러나 세르히는 그 모두를 제하고 간략하게 피아노로만 그 모든 것을 엮어서 표현하고 있었다. 당연히 수십 명의 사람을 동원하는 음악에 비해 그 부피는 줄어들었지만, 더더욱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종이라는 물건의 가치는 무언가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는 데에 있었다.
마을을 도는 썰매로부터 생겨나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곧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검은 피아노의 형태를 한 썰매는 기쁨과 환희의 종소리를 울리며 무대를 질주한다.
생명의 찬가가 홀의 천장까지 닿았다가 그대로 청중들에게 햇살처럼 쏟아져 내린다.
라흐마니노프의 곡 중에선 상당히 독특한 색깔을 가진 곡이었다. 이 곡 말고도 라흐마니노프는 종에서 많은 이미지를 끌어내어 곡으로 옮겨왔는데, 대부분은 엄숙함이나 죽음 등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은으로 된 썰매 종은 그런 무거운 주제 없이 굉장히 따뜻하고 선명하게 울렸다. 언뜻 들으면 라흐마니노프가 아니라 드뷔시의 곡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지만, 특유의 아르페지오와 화성 체계는 라흐마니노프의 그것이었다.
“…….”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쇼팽처럼 혹은 드뷔시처럼 해석하면서도 러시아적인 뉘앙스는 그대로 녹여내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갈라 콘서트에서 선보이기엔 보기 드문 선곡과 특이한 해석이었다.
하지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세르히의 연주가 그만큼 탁월한 덕분이었다. 그 누가 여기에 혹평을 할 수 있을까? 음악의 가치는 순간에 스치고 지나가는 파동에 전부 존재한다. 배경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난 세르히와 그가 연주하는 곡들을 들으면서 앞으로의 저변 확대와 포용성 등을 느꼈다. 올해 목관과 금관 등의 새 종목을 추가한 건 그 일환이리라.
검은 광택이 흐르는 썰매와 은색 종의 노래는 천천히 멀어지다가 곧 안개처럼 사라졌다. 짤랑이는 종소리만이 길게 여운처럼 남았다.
모두가 그 종소리의 끝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비로소 곡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브라보!”
가미드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메인 디쉬로 훌륭했지만 세르히가 가져온 디저트 역시 좋았다. 차가운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문 기분이었다. 아이스크림은 스르륵 녹으면서 기분 좋은 산뜻함을 안겨 준다.
세르히는 깔끔하게 두어 번 인사를 하고는 무대 뒤로 나갔다.
“감사합니다. 오프닝 갈라 콘서트에 함께 해 주신 연주자 그리고 모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 말씀 드립니다.”
마이크를 쥔 사회자가 엔딩 멘트를 하고 오케스트라가 무대 뒤편으로 나가는 것으로 1시간 20분 정도 이어진 오프닝 갈라 콘서트도 막을 내렸다.
“와, 마지막에 그 곡 뭐야? 너무 좋더라.”
“종.”
“종소리라는 건 나도 알아. 작곡가 이름이랑 제목을 몰라서 그렇지.”
“제목이 종이야. 라흐마니노프 합창 교향곡.”
“그 사람이 그런 종소리도 쓸 줄 알았어?”
홀을 빠져나오는 내내 발렌티나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녀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레퍼토리는 꽤나 가지고 있었지만 합창 교향곡엔 손댈 일이 없어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잔뜩 흥미가 생긴 것 같으니 다행이다.
나 역시 잘 몰랐던 곡들에 대한 가능성을 이렇게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대단한 연주였어요. 제가 지향하고 싶은 연주이기도 해요.”
“그래?”
“처음 연주한 환상적 소품은 애도의 노래이고, 종 역시 합창 교향곡이잖아요? 어떻게 하면 피아노로 노래를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요.”
난 기교적인 부분은 피아노에만 집중하지만 음색을 다루는 부분에 대해선 바이올린이나 성악의 색채감을 많이 참고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 2년 사이엔 더더욱 그렇다. 성악을 직접 배우게 되면서 내 목소리를 자신 있게 낸다는 것 자체에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연주자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노래하듯 연주하는 방법을 더 깊게 체득하기도 했다.
세르히 역시 높은 수준에 다다른 연주자이니만큼 피아노로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배울 수 있다면 그 노하우를 배우고 싶었다.
에르네스트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하더니,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말했다.
“나도 라흐마니노프라면 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아하하, 에르네스트도 그러시나요?”
“작곡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런가, 들리는 게 조금 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피아노만 할 때보다 지금 그는 음악을 조금 더 넓게 보는 듯한 시선을 할 때가 많아졌다. 그 또한 굉장히 긍정적인 변화라 생각한다.
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작곡가로서 어떤 부분을 보셨는지 궁금한데요. 나중에 가르쳐 주세요.”
“뭐…… 나도 네가 성악적 관점으로 뭘 느꼈는지 궁금하긴 해.”
“그러면, 우리 나중에 같이 공부할까요?”
“……그래도 좋고.”
피아노 연주자들의 대화라기엔 조금 이상했지만, 결국 궁극적으론 보다 좋은 음악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방금 들었던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홀 밖으로 빠져나오자,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조금 더 현실적인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세르히…… 아직 서른이 안 되었다고 했지?”
“예, 맞아요.”
“그럼 콩쿠르 무대에서 저런 연주를 만나도 안 이상하다는 거네.”
세르히와 만나기 전부터 난 그의 음반을 많이 들어온 팬이기도 하고, 작년 연말 송년 연주회에서 만나 듀엣 리허설도 해 보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연주자인지 몸소 체감하기도 했다.
그런데 콘서트 무대가 아니라 콩쿠르 무대에서 마주한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 오싹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의를 상실하거나 무력감을 느끼진 않는다. 되레 저런 대단한 연주자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에 환희를 느낀다.
내 표정을 본 아나스타샤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말고 결국 웃고 말았다.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더 잘하면 되지.”
“해야 할 건 단순한 법이죠?”
“응…… 어렵게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 일도 아니고. 피아노 잘 칠 궁리나 하는 게 맞겠지.”
그녀는 세상의 진리를 읊는 사람처럼 말하고는,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