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86화 (586/1,277)

##  586화

오프닝 갈라 콘서트 연주자들을 다시 만날 순 없었다.

아직도 여운이 남을 정도로 훌륭한 무대였으니 이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할 수 있게 사인회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콩쿠르 위원회에서는 그 후의 이벤트 등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카테리나와 막심 선배도 오늘 보긴 어려울 것 같네요.”

콩쿠르 참가자인 두 사람 역시 오프닝 전부터 불려가선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금 제일 바쁠 사람들일 테니 기다린다고 해도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잠시 서성이며 있자니 주변의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너무 기다리지 말고 이만 갈까.”

에르네스트가 먼저 제안했고, 우린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다음에도 예카테리나나 막심 선배가 무대에 서는 날엔 꼭 와서 보겠다고 약속한 참이니까.

두 사람에게 이만 돌아간다는 메시지만 보내 놓고 모스크바 음악원 밖으로 나왔다.

해는 이미 다 지고 어두운 저녁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8시 30분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럼 우린 이만…….”

“데려다 드릴게요!”

세 사람은 돌아가는 것도 각자 돌아가려 했지만 난 어두워졌으니 데려다주어도 된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이럴 때 내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 이 아이들도 이제 잘 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발렌티나가 가장 먼저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곧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도착한 차량에 올라타자 아나스타샤가 알은체를 했다.

“레오니드! 맞죠? 야콥도. 오랜만에 뵈어요.”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아나스타샤가 놀러 왔었을 때, 체육관에서 야구 배팅과 배드민턴 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옆에서 시설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상대도 해 주었던 것이 이 두 사람이었다.

그때 가벼운 차림이었을 땐 말투도 가볍고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경호 임무 중이라 그런 건지 진지한 어투였다. 레오니드가 이어 말했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나스타샤 양.”

“당연히 기억하죠. 레오니드도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네요. 배팅 센터 전광판엔 아직 제 이름 올라가 있나요?”

“하하하하.”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오니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있습니다. 대단한 기록이니까요.”

그의 기억에도 아나스타샤는 강렬하게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레오니드는 보다 풀어진 얼굴로 다시 한 번 아나스타샤에게 인사했고, 아나스타샤 역시 밝게 웃으며 받아 주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던 에르네스트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 같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것도 했었어?”

“응. 너희들 오기 전에.”

“그래……?”

에르네스트의 기억엔 나중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와서 레오니드에게 사격을 배웠던 기억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작년에 같이 놀았었던 일들에 대해선 공유할 추억이 많다. 마피아가 되었던 에르네스트가 시작하자마자 날 죽이기도 했었고.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직도 물어보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런 즐거운 기억들이 생생하다.

하지만 발렌티나가 그 자리에 없었던 관계로, 여기 우리 세 명이서만 이야기하기엔 조금 미안하다.

“그럼 세 분 자택으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예. 부탁드릴게요.”

아나스타샤가 먼저 레오니드에게 집 주소를 불러 주었다. 주소를 들은 그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는 사이에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콩쿠르 쪽으로 흘러갔다.

“너희 또 언제언제 보러 올 거야?”

“글쎄, 캘린더 한번 볼까.”

콩쿠르 스케줄은 이미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미리 확인을 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어서 예카테리나나 막심 선배의 참가도 몰랐다는 게 이제 와서 조금 미안해졌다.

스마트폰으로 화면을 넘기며 아나스타샤가 어느 한 페이지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참가자 명단과 순서를 쭉 불러왔다.

치열한 비디오 심사와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참가자들은 총 227명. 그중 피아노는 25명, 바이올린은 24명이었다. 니콜라이 선배가 다루는 악기인 첼로도 25명이다.

6개 부문 중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만 유독 적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악은 한 부문으로 취급하긴 하지만 남녀에 따라 사실상 다른 곡을 부르기 때문에 남성 30명 여성 29명으로 나뉘어 있었고, 목관은 48명이나 되지만 세부적으로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연주자가 모두 한 부문이었다. 금관 역시 46명이지만 프렌치호른, 트럼펫, 트롬본, 튜바가 하나로 묶였다.

때문에 본격적인 경쟁률을 따져 본다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쪽이 더 치열하다 할 수 있었다. 실제 지원율도 그렇고.

우리들은 일단 피아노 부문만 집중적으로 살폈다.

“본선 1라운드 일정은 굉장히 빡빡하네요.”

“응. 그렇지. 다 보는 건 힘들어.”

1라운드가 진행되는 사흘 동안은 오후 1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정이 채워져 있었다. 굉장히 빡빡한 시간 같지만 25명의 참가자들에게 50분간 자신의 프로그램을 연주할 시간을 주기 위해선 이런 일정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수많은 연주자들 사이에서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일단 예카테리나의 첫 라운드는…… 바로 내일이네요.”

“막심도 내일이야.”

그사이에 빠르게 바이올린 부문도 찾아본 발렌티나가 말했다. 첫날에 둘 다 몰려 있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제비뽑기를 잘 못하나 본데?”

“잘한 것일 수도 있지.”

시간을 보니 두 사람의 순서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피아노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그레이트홀에서, 바이올린은 스몰홀에서 경합이 치러지니 두 무대를 직관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연주자에게 주어진 50분이란 시간 사이 적게는 6곡에서 많게는 8곡까지 들을 수 있으니 사실상 작은 리사이틀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꽤 기대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도 일정을 보면서 참가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난 그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두 분 말고도 관심 가는 분 있으신가요? 같이 봤으면 해서요.”

“글쎄…….”

아까 홀에선 아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길래, 혹시 괜찮은 연주자가 있다면 소개해 달란 뜻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별 생각 없다는 듯 짧게 답했다. 관심이 가는 거랑 직관하고 싶은 거랑은 다른 건가?

보아하니 사실 우리가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방송으로 봤을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꼭 오시는 거예요?”

“알았어.”

혹시나 싶어 다시 확답을 받았다. 괜히 피곤한데 약속을 받아낸 건가 싶기도 했지만, 난 그가 오늘 갈라 콘서트를 보고 했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모든 게 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하루가 지나 다시 우리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모였다. 모인 건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그리고 에르네스트로 어제와 같았다.

오후 4시 즈음 시작하는 예카테리나의 순서에 맞춰서 그녀가 연주자 대기실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보려고 조금 일찍 약속을 잡았다.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싶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연습실 주소와 함께 그곳으로 오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될 건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참가자들에겐 호텔방과 연습실이 배정된다. 당연히 연주자들 각 개인별로 주어지는 공간이고, 부외자들은 출입금지다.

“그렇겠죠? 하지만 괜찮으시다 하시는 것 같아서…….”

“모르겠다. 가 보지 뭐.”

그래도 오라고 해서 가는 건 상관없지 않을까? 일단 가 보고 누군가 안 된다고 하면 그때 돌아 나와도 상관없었다. 우린 예카테리나가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그녀가 있는 곳은 3층의 작은 개인 연습실이었다. 피아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작게 노크했다.

“예카테리나. 들어가도 되나요?”

“응, 들어와.”

허락을 받고 문을 열었다.

“안녕. 아나스타샤랑 발렌티나도 안녕. 에르네스트도.”

어제만 해도 활기찼던 예카테리나는 묘하게 수척한 얼굴이었다. 역시 그녀도 무대에 서야 할 순간이 오니 긴장감에 잠을 설친 듯하다.

난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 방해되는 건 아닌가요?”

“방해는 이미 충분히 받았어.”

“예?”

그녀의 말은 조금 묘하게 들렸다. 스스로의 긴장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방해를 받았다는 투였다.

내가 의아해하자 예카테리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들어 봐, 어제 개최식 끝나고 각자 배정받은 호텔에 갔거든? 호텔 자체는 꽤 괜찮았어. 깨끗하고.”

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니, 그런데 새벽 2시에 어떤 또라……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복도에서 고함을 지르고 다니잖아.”

“새벽 2시요? 무슨 일이에요?”

“모르겠어. 나도.”

이상한 사람이야 어디든 있지만, 조금 황당하다. 예카테리나가 말했다.

“제라르던가 뭔가 알지도 못하는 이름 찾더니 그다음은 옆 방 두들기고…… 순서대로 말야. 와, 내 방 두들길까 봐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놀라셨겠어요…….”

“결국 사람들이 나가선 입 다물게 하더라고.”

“…….”

신사적으로 입 다물게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봐도 얌전한 그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예민한 콩쿠르 전날인데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잠을 설친 거냐고 위로를 해 주려는데,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것까진 좋았어.”

“좋았다고요?”

“잠을 조금 설치긴 했지만 그 정도 문제는 웃고 넘어갈 수 있으니까.”

생각 이상으로 예카테리나는 쿨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쿨한 그녀도 계속되는 스트레스엔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제공받은 연습실에서 잠깐 자려고 했는데 문 두들긴 게 벌써 세 명이야.”

개인 연습실로 되어 있을 텐데 대체 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걸까요?”

“나중엔 깨서 연주하는데도 들어오더라니까. 참가자들 확인한다는데…… 개인 배정된 연습실에서 피아노 소리 들리면 확인 끝난 거 아니니?”

주최측 입장에선 무대 위에 참가자들을 시간에 맞춰 올려 보내야 하니 몇 번이고 확인하는 게 이해는 가지만…… 이런 식이면 힘들 만도 했다.

“피곤해 보이세요.”

“나도 모르겠어 이제.”

그렇지 않아도 바로 순서가 와서 긴장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텐데, 이럴 땐 누구라도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카테리나는 예민하지 않아도 화가 날 법한 일을 몇 번이나 겪은 것이다. 나 역시 연주자이기에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까? 사실 이럴 땐 옆에 누가 있기만 해도 귀찮은데. 그렇다고 혼자 남겨 두자니 마음에 걸린다. 예카테리나는 우리가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것 같고…….

“나도 비슷하게 콩쿠르 전날에 호텔에 불 난 적 있었어.”

그런데 난데없이 에르네스트가 툭 끼어들며 말했다.

호텔에 불이요……?

난 황당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예카테리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핫, 그게 뭐가 비슷해!”

“돌아다니다 보면 별일 다 겪기 마련이니까.”

에르네스트는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지만, 예카테리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이야기였다.

무대를 앞두고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건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는 풍부한 연주자 활동을 통해 겪었던 일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연습실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거리에 있는 피아노로 리허설한 적도 있었고.”

“너 그때 돈도 벌었었다며?”

“내가 받으려 한 건 아니었는데 누가 모자를 가져다 놓더라고.”

“불쌍해 보였나 보다.”

“턱시도 입고 있었는데?”

“……그럼 감상료 맞네. 얼마쯤 벌었는데?”

“80유로 정도 됐었나.”

그건 무슨 이야기예요?

내가 흥미를 보이자 에르네스트는 그냥 잊어버리라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이미 다 들었는데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한참 전 어릴 때 이야기일 텐데……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로 거리의 피아노로 연습을 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에게서 감상료까지 받았다는 것도 얼마나 잘 연주했길래 그런 상황이 일어나는 건지 상상도 잘 안 갈 정도였다.

“대단하시네요.”

“그러게…… 그건 대단하네. 길거리 업라이트는 도저히 못 써 먹겠던데.”

“피아노는 피아노니까…… 너희도 같은 상황이었으면 똑같이 했을걸.”

에르네스트는 그냥 콩쿠르 전에 겪은 불행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이야기의 흐름이 오는 건 싫은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다시 연습실 문을 열었다.

“마실 것 좀 사 올게.”

“저도 같이 갈게요.”

내가 얼른 따라나서자 그는 딱히 말리지 않고 손잡이를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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