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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88화 (588/1,277)

##  588화

캔을 주워 들고 일어서니 저편에 있던 잭슨 부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무슨 상황인가 싶었나 보다.

난 별일 아니라는 뜻으로 웃어 보이고는 바로 에르네스트를 데리고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얼른 가요.”

날씨가 더워져서 그런가? 왜 이렇게 덥지. 거울을 볼 순 없었지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냥 빨리 어디론가 가서 쉬고 싶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느긋하기만 했다. 뒤쪽을 보니 그는 연신 웃으면서 날 따라오고 있었다. 손목이라도 잡고 끌고 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끌려올 것 같지도 않다. 되레 그는 날 늦추려 했다.

“천천히 가, 타티아나.”

“……저 먼저 갈 거예요.”

“그래? 난 네가 뛰어가도 쫓아갈 자신 있는데.”

아, 그러시나요?

벨카와 특훈한 내 실력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아무리 기를 써서 뛰어도 그에게 상대도 안 될 건 자명했다.

눈을 흘기자 그가 혹시나 싶었는지 덧붙였다.

“그렇다고 뛰진 말고.”

“왜요?”

내가 뛰든 말든 어차피 상관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상관있는 이유가 있었다.

“탄산 터지니까.”

“……?”

생각도 못 했던 이유에 잠깐 머리가 굳었다가, 곧 내 가방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캔에 생각이 닿았다. 떨어지길래 뭔지도 모르고 일단 주웠는데, 탄산음료였었나?

난 우뚝 멈춰 섰다. 잠깐만, 어떻게 하지? 엄청 흔든 것 같은데…… 이미 다 소용없지 않나?

괜한 불평이 에르네스트에게 향했다.

“탄산음료는 왜 사신 건가요? 예카테리나에게 자극적인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요.”

“물도 샀어. 탄산은 아나스타샤 거야.”

“그런 건 빨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미국인 부부에게 콩쿠르에 대한 설명을 해 준 것에 모든 신경이 팔려서, 아무 생각 없이 아나스타샤에게 잔뜩 흔든 탄산음료를 건네주는 상상을 하니 갑자기 섬뜩해졌다. 물론 무슨 일이 생겨도 그녀는 장난으로 받아들여 주겠지만…… 난 내가 원치 않는 장난을 그녀에게 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당황해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날 보며 에르네스트는 태평하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아까 떨어뜨린 것 때문에 이미 폭발직전이긴 할 것 같아.”

“……!”

폭발직전인 건 내 인내심이었다.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다가, 너무 흥분해 있는 것 같아서 작게 심호흡했다. 그렇게까지 당황해하거나 그에게 화 낼 일은 아니다.

에르네스트가 눈치 못 챌 정도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나는 다시 차분히 물었다.

“어쩌죠. 새로 사 오는 게 나을까요.”

“안 터지게 열면 돼.”

“어떻게요?”

“잘 하면 될걸?”

탄산 캔 정도로 심각한 내가 이상한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난 진지했다.

장난치지 말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 역시 진담이라는 투로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캔이 안 터지게 여는 거 정말 잘하거든.”

어떤 방법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말 날 작정하고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면.

하지만 난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마냥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잘 한다고 해서 맡기는 거, 저는 반대예요.”

“괜찮아. 나도 도와줄 거니까.”

“…….”

뭔가 하려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다 지워졌다.

겨우 흔든 탄산 캔의 일인데도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와 같이 한다면 뭘 해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천천히 가요.”

아무튼 탄산이 걱정된다고 해서 우뚝 멈춰 선 채 끝없이 기다릴 순 없었다. 난 이전보다 훨씬 더 천천히, 가방을 흔들지 않도록 하면서 예카테리나가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예카테리나,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마실 것 사 왔어요.”

“왔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 사람이 이쪽을 돌아본다. 이미 꽤 친해진 모습이었다. 에르네스트와 나는 사 온 음료들을 그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에겐 캔을 막 건네주려다 말고 멈췄다.

“아, 잠시만요.”

“?”

막 흔들어 놓은 거라고 말하기도 이상해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더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가 옆에 다가와선 캔을 가져갔다.

“이거 손끝으로 때려도 되는데,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지 뭐.”

잠깐 캔을 보고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그는 캔을 옆으로 눕히고는 테이블에 대고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난 조금 당황스러웠다. 기본적으로 흔들면 안 되는데, 저래선 더 심해지는 것 아닌가?

아나스타샤 역시 멀거니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뭐 해?”

“탄산 안 터지게 하기.”

“더 터질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대답하지 않고 몇 번 더 굴리더니 아나스타샤에게 캔을 내밀었다.

“자.”

“…….”

갑자기 무슨 짓인가 싶었으리라. 아나스타샤는 그 캔을 잡기만 해도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보는 눈앞에서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무언가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아나스타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곧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는 캔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레 뚜껑을 젖혔다.

“……멀쩡하네?”

떨어뜨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했던 캔은 작은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열렸다. 아나스타샤는 왜 멀쩡한 캔을 굴렸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캔이 얌전해진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날 보며 웃기만 했다.

“자아, 자. 예카테리나의 성공적인 첫 라운드 무대를 위해 건배할까, 우리?”

모두의 손에 마실 음료가 돌아가자 자연스레 발렌티나가 건배를 권유했다. 예카테리나가 감사의 뜻으로 싱긋 웃으며 물병을 살짝 들어 올리고, 우리 역시 음료를 들어 올렸다.

건배를 하고 한 차례 목을 축이고 나니 조금 더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우리는 예카테리나와 함께 콩쿠르 곡들에 대한 이야기나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잘하는 사람들도 많이 올라왔는데…… 적어도 무대에 세 번 서 보려고. 일단은 그게 목표야.”

콩쿠르의 파이널 라운드에 가는 연주자들은 25명 중 반의반 정도이다. 예카테리나는 그 안에 들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잘하는 사람들이란 예카테리나와 파이널 라운드에서 마주칠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사람들을 뜻했다. 무대에 서기 전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연주자들의 세계이지만, 그래도 그간의 이력으로 등수를 매길 수도 있는 것이다.

조용히 듣던 에르네스트도 생각나는 게 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눈에 띄는 사람들 있어?”

“많잖아? 예브게니나 에밀리아, 필리프 같은 피아니스트들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평을 받기도 하고……. 다른 나라는…… 글쎄?”

외국 참가자들에 대해서도 조금 고민하던 예카테리나는 몇 명의 이름을 꺼냈다.

“기억나는 이름은 첸 유안이나 루카스 정도네. 다른 곳에서도 몇 번 봐서.”

“루카스?”

“응. 미국인인데 상당히 잘하거든. 주 레퍼토리도 러시아 작곡가들인 것 같고.”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가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조금 전 휴게실에서 마주친 잭슨 부부가 말했던 참가자의 이름이 바로 루카스였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에게서 다시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라 조금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녀는 내 표정을 보더니 루카스에 대한 평가를 한층 높였다.

“그 애가 제2의 반 클라이번이 될지도 모르지.”

“…….”

예카테리나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럼 예상 우승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난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음…… 아니, 사실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

“……?”

“그야 반 클라이번은 일찍 은퇴했잖아? 여기서 우승한 바람에.”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 청년은 미국에서 영웅이 되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연주자 생활을 길게 이어나가지 못하고 은퇴했다. 난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 피아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에게 1등을 준 것도 당시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난 거꾸로 생각해 보기도 했어. 그가 왜 이 먼 땅까지 찾아와서 콩쿠르에 참가한 건가. 사실 이해가 안 가는 일이잖아?”

냉전이 지독하던 시기였다. 미국인이 홀로 도전하기엔 너무나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반 클라이번을 영웅이라 생각하는 미국 사람들은 그러겠지. 그가 러시아를 꺾기 위해서 이 콩쿠르에 참가했다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었으니 당연히 반 클라이번을 용감한 영웅으로 내세울 만하다.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말하는 건 결과가 나오기 전의 반 클라이번이란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러시아의 음악을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겨우 그딴 이유를 앞세웠을 리가 없잖아?”

나 역시 반 클라이번의 음악을 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안다.

그는 명료하고 맑은 음색을 주로 사용하는 연주자였다. 190cm가 넘는 장신과 긴 손가락으로 마치 라흐마니노프처럼 어려운 난곡들도 가뿐히 해결해 내는 비르투오조이기도 했고, 러시아 특유의 감정을 잘 담아내는 예민한 음악성을 지닌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단순히 영웅이 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했다는 건 어불성설처럼 들린다.

실제로 많은 인기를 감당하지도 못했고.

“……은퇴한 이유도 지나친 관심 때문에 생긴 무대공포증과 우울증 때문이었죠.”

예카테리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저 음악에 이끌렸을 뿐이라면…… 다른 어떤 이유도 상관없을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녀가 경쟁을 중요시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그녀는 꼭 그런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새삼 다시 보는 눈으로 바라보자, 작게 읊조리던 그녀는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놀란 사람처럼 고개를 들더니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무슨 소리람. 나야말로 다 상관없어. 내가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얼마나 연구해 왔는데.”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모두 이겨 버릴 거라는 것처럼 예카테리나는 씩씩하게 이야기했다. 난 웃으며 그녀가 레퍼토리와 연습량 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잠시. 예카테리나의 순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먼저 시간을 살피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가자. 슬슬 집중해야 할 시간이야.”

어느 정도 예카테리나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면, 이젠 방해하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난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예카테리나. 청중석에서 볼게요.”

“……고마워.”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게 연주를 앞둔 예카테리나를 연습실에 두고, 우리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잠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에 가 있을까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난 오늘의 스케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곧 3시 50분에 예카테리나의 차례가 있고, 저녁식사 후 7시에 루카스의 차례였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어서 가만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루카스를 도와준 일 때문에 그래?”

“예?”

스스로도 잘 모를 기분이 그 한마디에 정립되었다.

물론 루카스를 직접 도와준 건 아니고, 그의 부모님인 잭슨 부부의 오해를 풀어 준 것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게 연주자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나는 잘 안다.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보니 예카테리나의 직접적인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이라서…….”

내가 경쟁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성격이 아님을, 그러면서도 늘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에르네스트는 이제 조금 알아주는 것 같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잘한다면, 그에게 1등상을 주면 되겠지. 결국 누가 음악을 더 잘 다루느냐. 그것뿐이니까.”

누구나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를 정론처럼 한 뒤에 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따 7시에 가서 볼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네요.”

혹시나 관심이 생겼다고 해도 루카스의 무대를 찾아갈 순 없었다. 왜냐하면 같은 시간 스몰 홀에선 바이올린을 든 막심 선배가 무대에 설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과 쏟을 수 있는 관심의 양이 주어졌다는 사실이겠지. 결국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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