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89화 (589/1,277)

##  589화

첫 라운드는 40분에서 50분가량의 솔로 프로그램으로 구성하게 되어 있었고, 정해진 레퍼토리는 이러했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서 1곡.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클레멘티의 고전 소나타 중 1곡.

쇼팽, 리스트, 라흐마니노프의 고난도 연습곡 중 3곡.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1곡 이상 원하는 대로.

이렇게 최소 6곡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레퍼토리였다.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이 다양한 곡들을 연주자는 완벽하게 암보해서 틀리는 일 없이 연주해야 했다.

첫 라운드부터 쉽지 않았고, 때문에 그 엄청난 예선 경쟁을 뚫고 올라와서도 여기에서 연주를 망치는 연주자들도 정말 많았다.

“다행이에요 정말.”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콩쿠르 첫 무대는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1700명의 열렬한 성원 속에서 예카테리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울려 퍼지는 박수 속에 내 박수도 함께 합치면서, 난 그녀가 펼쳤던 음악들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

예카테리나가 첫 음악으로 택한 곡은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 프렐류드와 푸가 20번 BWV 865.

가단조의 장엄한 음색이 특징적인 곡이었다.

빠른 프렐류드와 대위법으로 이루어진 푸가의 난이도 자체는 숙련된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그렇게 난해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제대로 긴장을 풀지 않고 첫 무대에서 꺼내들었다간 리듬을 잃고 푸가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잠겨 버리기 쉬웠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한 번도 흐름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잡고 음악을 이루었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바흐를 해석하고 드러내는 표현력 또한 흠잡을 곳 없었다.

페달을 아끼고 건반을 끊어 내듯 친다. 바흐의 건반음악들은 하프시코드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주법이었다. 나 역시 그러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음색을 연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깔끔한 바흐 연주였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0번. K330.

‘모차르트는 조금 의외였지만…….’

주어진 소나타 주제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클레멘티. 그중에서 보통 한 작곡가를 꼽자면 베토벤을 많이 꼽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세 명은 바흐에 이어 고전 쪽에 더 가까웠고 베토벤은 낭만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콩쿠르 참가자로서 기교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그 표현력 역시 과시하기 위해선 베토벤이 유리했다. 선곡 또한 실력임을 부정할 수 없는 연주자들에게 이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모차르트를 택했고 단정하고 똑 부러지는 음색으로 자신의 해석을 뽐냈다.

어린 학생들도 자주 연주하는 명랑한 소나타. 하지만 모스크바 음악원 영재 클래스의 예카테리나의 손에 들어간 모차르트는 굉장히 깊이 있고 아카데믹한 연주로 탈바꿈해 있었다.

예카테리나라는 피아노 연주자가 지금까지 모차르트를 어떻게 배우고 연구했는지 그 모든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거기에 대해서 그녀는 조금도 과장하거나 잘난 척을 하지 않았다. 온전히 모차르트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이 거기에 있었다. 인상적이고도 사랑스러운 음악이었다.

당연히 문제되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반드시 무조건 모든 항목에 만점을 주었을 것 같은 훌륭한 연주. 모차르트 소나타가 끝나고 박수를 얼마나 쳤는지 손바닥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바흐와 모차르트로 고전에 능숙함을 보인 예카테리나의 레퍼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세 개의 고난도 연습곡에서 예카테리나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모든 실력을 내보였다.

첫 번째 연습곡은 쇼팽의 연습곡 op.10의 4번.

콩쿠르는 물론 입시 등에서도 정말 많은 곳에서 연주되는 곡이다.

거의 세상 모든 피아노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이 곡의 평균 연주 시간은 2분 정도. 최근엔 조금 빠르게 연주하는 것이 트렌드라면 트렌드라 할 수 있어서 점점 빨라지는 추세라 1분 55초대의 연주도 많지만, 그래도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음악이 뭉개지지 않게 정확하게 연주하기 위한 지점이 그 정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카테리나는 그보다 훨씬 빠르게 연주해 냈다. 1분 45초 정도. 아마 거의 정확할 것이다. 나도 속주엔 자신이 있는 편이라 1분 50초대로 주로 연주하기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속도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속주에만 집중한다면 40초대로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분명히 뭉개지면서 음악성에 문제가 생긴다.

직접 해 본 사람들은 이 연습곡을 들으면서 분명히 알 수밖에 없었다. 예카테리나가 기교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연주자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그 놀라움은 바로 이어진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 op.39의 5번에서 더더욱 증폭되었다.

큰 옥타브로 연타하는 다성화음과, 그 위로 흘러가는 서정적인 선율.

뭇 연주자들을 좌절에 빠뜨렸던 라흐마니노프 고유의 화법은 정말로 연습곡의 궤를 한참이나 지나치고 있는 음악처럼 들린다.

예카테리나는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음을 짚어 나간다. 확고한 자신감으로 왼손을 내리찍고, 온몸으로 오른손을 쌓아 나갔다.

바흐와 모차르트. 그리고 쇼팽까지. 꽤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레퍼토리로 무장했던 예카테리나는 고전적 완성도와 투명한 음악성 그리고 단단한 기교를 모두 섞어 라흐마니노프에 완벽하게 녹여 냈다.

저음을 전부 사용할 것처럼 모든 음을 두들기고, 3도 트릴을 흔들다가 곧 서서히 흘러내린다.

굉장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와 불안감. 희뿌옇게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언덕과 연기. 말의 투레질. 작은 한숨.

예카테리나가 그리는 풍경은 너무나 선명해서, 숨을 크게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난 이 곡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예카테리나의 해석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잿빛 색채로 우울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주 정열적으로 파고들던 음악은 곧 사랑스럽게 잦아들면서 스르륵 녹아들었다.

‘…….’

세 번째 고난도 연습곡은 프란츠 리스트의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 S140. 3번. 라 캄파넬라였다.

이 자리에 올라오기 위해선 난곡으로 유명한 라 캄파넬라도 문제없이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수준을 본다면 그건 거의 당연한 조건이다시피 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의 수준은 그것을 한 계단 더 넘어선 것 같았다.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는 원곡에서 이미 한 번 편곡을 거친 표제음악인데다가 그 난이도가 연주자에게 자유도를 그리 많이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이 크게 갈리지 않는 편이다. 경쾌하게 연주하거나 가끔은 춤곡처럼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의 해석은 독특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조용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이전의 강렬한 마차 소리와 대비되어 희미하게 느껴질 만도 한데, 전혀 묻히지 않고 마치 눈송이처럼 하늘하늘 내리며 홀 전체를 수놓았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덧칠해 버리는 음악이었다.

아름다운 종소리는 몇 번이고 울리고 또 울리다가 화려한 피날레 뒤에서 서서히 멈추었다.

‘좋은 프로그램이었어.’

푸가에서 연습곡까지 쭉 이어진 프로그램은 다른 모든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주제였지만, 예카테리나가 찾아낸 길은 굉장히 훌륭했다. 여러 시대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라는 피아노 연주자를 소개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좋았다.

청중들은 물론이고 심사위원들도 이 강렬한 연주자를 기억에서 쉽게 지우기 어려우리라.

한 곡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예카테리나가 고른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op.59 둠카dumka였다.

둠카는 슬라브어권에서 쓰는 언어로 애가, 즉 엘레지elegie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다른 엘레지들을 본다면 애상하고 사색하는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지만, 둠카는 거기에 갑자기 불꽃처럼 일어나는 열정 또한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런 표현은 잘못하면 이중인격을 지닌 이상한 사람의 노래처럼 들리고 만다.

사색과 춤. 그 사이의 차이를 또렷하게 그리면서도 전체를 하나로 이어붙일 수 있는 주제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음악으로 엮을 수 있어야 한다. 까다롭고 수준 높은 음악성을 필요로 하는 곡이었다.

물론 예카테리나는 마지막 이 곡 역시 훌륭하게 연주해냈다.

악장지시는 안단티노 칸타빌레andantino cantabile.

조금 느린 템포로 노래하듯이 현이 떨린다. 음악이 진행되면서 오른손이 흘러가 버린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회상하듯 반주하고, 왼손이 노래하는 선율을 그린다. 예카테리나가 연주하는 다단조는 마치 사람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단조의 음악처럼 굉장히 묘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애수 짙은 노래가 그렇게 막을 열고, 마치 오페라처럼 장면이 전환한다.

주어진 주제에 대한 차이코프스키의 지시는 콘 아니마con anima.

활발하게 바뀐 리듬은 마치 춤곡과 같다. 꾸밈음은 스텝을 밟을 위치를 정해 주고 긴 레가토는 팔을 휘두르는 궤적을 그리는 것 같다.

흥겨운 춤은 더 빨라지고 경쾌해지면서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귀로 간신히 파악할 수 있는 지점에서, 또다시 다음 주제가 느릿하게 시작된다.

정말 한 편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같이 천변만화하는 음악이었다. 이런 음악을 연주하면서도 혼란스럽지 않고 명쾌하게 앞장서 나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예카테리나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해석과 나란히 흐르기 시작했다. 난 비슷한 부분과 다른 부분들을 찾으면서, 내 해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방법을 시시각각 찾아냈다. 그건 그 무엇과도 다른 색다른 길이기도 했다.

‘…….’

건반을 연주하고 싶다.

좋은 음악을 듣고 나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음악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것이다. 당장 몇 걸음만 걸어 나가면 연습실이 수십 개나 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피아노 앞에 앉고 싶었다.

그래도 참아야만 했다. 어디까지나 청중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생각하면서 난 예카테리나의 음악을 차분히 감상했다.

“예카테리나…… 저번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첫 라운드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고, 굉장한 박수 속에서 예카테리나가 연주자 대기실로 나가자 에르네스트가 한 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나 싶다.

“반년이나 흘렀으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리고 저 둠카는…… 타티아나, 혹시 예카테리나랑 연습한 적 있어?”

“……없는걸요.”

송년 연주회 때 같이 리허설을 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경험은 몇 번 있지만 그녀와 직접적으로 의견을 교류하면서 같이 연습한 적은 없었다. 내가 거의 에르네스트와 붙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때 내 옆에 있어서 잘 알 텐데도 묘한 말을 했다.

“뭐든 간에 네 영향이 느껴져. 뭐, 그럴 만도 한가.”

“제 영향이요?”

“좋은 영향일 거야.”

“…….”

내가 듣기엔 잘 모르겠다. 물론 그녀의 둠카가 굉장히 친숙하면서도 내게 발전이 될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쩌면 에르네스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무 근거도 없이 아무 감상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요……?”

그저 좋은 음악을 들었다고 생각해서 들떠 있던 기분에 조금 더 행복이란 감정이 맺혔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서로 배울 수 있다는 건 친한 친구를 얻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 가장 가까운 친구라 할 수 있는 아나스타샤와 음악을 교류하면서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많았는데, 예카테리나와도 더 많은 음악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곧 저녁 식사를 위한 휴식시간이 주어진다는 안내가 있었고,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갈까.”

“예. 그래요.”

이렇게 훌륭한 무대에 이견이 있을 리 없다. 예카테리나에게 가서 첫 라운드는 분명히 통과할 수 있을 거라 빨리 말해 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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