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90화 (590/1,277)

##  590화

에어컨이 없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홀에서 격렬하게 연주를 하다 보니 온몸이 땀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열기마저도 모조리 예카테리나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에너지로 쓰이고 있었다.

‘다 왔어.’

빠른 곡조는 옥타브 연타로 쌓아올리는 모데라토에서 안단테, 그리고 메노모소로 접어들다가 아다지오 순서로 천천히 템포를 늦춘다.

한 번으로 마무리되는 둠카의 피날레는 굉장히 화려하고도 복잡했다. 예카테리나는 머릿속 남아 있는 음표들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쏟아내는 것처럼 연주했다.

그렇게 45분간 족히 수만 개는 될 음표들을 풀어놓은 예카테리나는 마침내 기억의 끝에 다다랐다.

마지막 남은 칸타빌레cantabile.

이 주제를 이루는 음표들의 수는 매우 적었다. 몇 개 남지 않았다. 예카테리나는 그 음표들의 계이름을 하나하나 다 부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노래하는 기분으로 남은 음들을 하나하나씩 내려놓는다.

처음 바흐를 연주할 때만 하더라도 몇 곡이나 되는 곡들의 음표와 선율들이 엉켜서 빨리 다 해치우고 내려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끝날 때가 되니 아쉽기까지 하다.

“…….”

그런데 끝에 도달했단 생각이 들자 몸이 슬슬 요령을 부리기 시작한다.

격렬한 연주로 인한 피로, 그리고 더위에 의한 탈진이 서서히 찾아오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어쩔 도리도 없이 눈앞이 핑 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이 순간에 찾아온 피로조차도 감사히 여겼다. 어차피 느릿한 허망의 주제를 노래하는 중이니 좋은 기회였다. 순간적으로 찾아드는 허탈의 체험을 음색에 싣는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는 관련 없는 현실의 힘듦이었지만 그 두 개를 얽어내는 것 또한 연주자의 기술이었다.

프로 연주자는 존재하지 않는 감정을 창조하여 음악이라는 언어로 다듬어 드러내는 것을 늘 훈련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레퍼런스가 있다면 그것을 닮게 표현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스스로를 프로 연주자라 생각했고, 때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몸을 최소한으로 가누면서 모든 집중력을 손끝에 집중했다.

그 결과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돌아왔다.

“브라바!”

“예카테리나!”

포르티시모로 끝나는 음을 마무리 짓자마자 그보다 훨씬 큰 환성이 예카테리나의 몸을 덮쳐왔다.

그 환성은 어떠한 거대한 에너지처럼 힘이 빠지려던 예카테리나를 일으켜 세웠다.

“…….”

일단 첫 무대는 끝났구나.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대에 오른 경험이 있지만 연주를 마치고 박수를 받을 때면 늘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오른다. 예카테리나는 그 기분을 만끽하며 청중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 만족감 뒤에선 거대한 폭풍이 다가온다.

환호를 등 뒤로 하고 대기실로 돌아온 예카테리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이코프스키가 아쉬워. 아, 진짜로. 왜 그걸 그렇게 쳐 가지고. 조금만 더 집중할걸.’

항상 그랬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연주했어도 늘 후회는 남기 마련이었다. 연주하는 순간에 스쳐 지나갔지만, 계속되는 연주를 하기 위해 잠시 미뤄 두었던 후회들이 뒤늦게 밀려온다.

어차피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다시 연주한다고 해서 아까 했던 것보다 잘하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머리에 짓쳐드는 생각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숙련된 연주자 예카테리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안다.

“더워, 목말라, 배고파, 힘들어.”

현실의 문제로 신경을 돌려 버린 그녀는 일단 에어컨 바로 앞으로 향했다.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다음은 물이었다. 대기실엔 연주자들을 위한 물병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를 잡은 그녀는 단숨에 몇 모금이나 들이켰다.

“드시겠어요?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대기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다가와 쿠키를 건넸다.

예카테리나는 방긋 웃으며 그 쿠키를 받았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방금 연주 정말 좋았어요.”

“정말요?”

“예. 제가 원래 참가자들에게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첫 라운드는 문제없이 통과하시지 않을까요?”

참가자들에게 으레 하는 멘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듣기 좋은 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좋게 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건넨 뒤에, 이젠 지친 몸을 편히 의자 위로 늘어뜨렸다.

“…….”

몸이 해 달라는 것들을 다 해 주고 나니 바짝 곤두서 있던 연주자로서의 정신이 조금 느슨해진다.

뭐…… 직원분도 잘했다고 해 주셨고. 다시 돌이켜 봐도 열댓 명 안엔 들 수 있을 것 같고. 한 고비는 넘긴 건가? 세미파이널은 사흘 뒤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멍하니 앉아 있던 예카테리나는 밖에서 들리는 안내 방송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시간은 4시 30분. 예카테리나는 콩쿠르 오후 스케줄의 마지막 순번이었다. 사회자는 오후 무대를 관람한 청중들에게 감사 인사와 7시까지의 저녁식사 시간 겸 인터미션 등을 안내하고 있었다.

원래 예카테리나는 이 안내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방학이라 같은 영재반 친구들은 고향이나 고국으로 돌아갔고, 부모님도 이번에 오지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혼자 하는 콩쿠르이니 그냥 호텔로 돌아가서 일단 한 두어 시간 자고난 뒤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밖엔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가도 되죠?”

“예? 예. 그러십시오.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다음에 뵈어요.”

직원에게 인사를 건넨 예카테리나는 빠르게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느슨하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다시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오래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막 로비로 나와서 한 번 두리번거렸을 뿐인데, 저편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예카테리나!”

그리고 예카테리나가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 중 가장 작은 한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웅성거리는 인파를 헤쳐 나가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용케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그렇게 예카테리나의 앞에 다다른 소녀는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안았다.

“멋졌어요!”

“잠깐만! 타티아나! 나 땀!”

“모든 레퍼토리가 훌륭했어요. 아까 박수 소리 들으셨죠?”

“이것 좀 놓고 말 하면 안 돼?”

“분명 첫 라운드는 통과하실 거예요. 제가 보장할게요.”

여전히 등허리가 축축한데, 타티아나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잘했다며 예카테리나를 칭찬했다.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결국 예카테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첫 라운드는 통과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는 대기실에서 직원이 했었던 것과 같았지만, 어쩐지 타티아나의 입에서 들으니 몇 배는 더 마음이 놓이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뒤이어 온 에르네스트도 비슷한 축하를 보냈고, 오늘 만나서 친구가 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고마워.”

이 아이들은 미처 생각도 못 했던 인연들이었다.

나이도 학교도 다르니 접점도 별로 없고, 계속 잘 모르고 지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예카테리나는 반년 전만 하더라도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은 곧 자신의 후배로 들어와야 하는 입장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음악원 영재 클래스에서도 꽤 두각을 보이고 있는 예카테리나로선 당연한 잣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를 만나고, 또 서로의 음악을 확인한 뒤로 예카테리나의 잣대는 완전히 깨어졌다.

실력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음악적 신념이나 가치를 이유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연주자들이 있다. 학교는 그저 그 시간에 머무는 위치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게 된 예카테리나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과 친구가 되었고, 이어서 소개받게 된 아이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를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끝났네.”

5명이 된 한 무리의 음악가들은 음악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기보단 일단은 긴장을 풀고 여유를 즐기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실없는 이야기들이 오가던 와중, 타티아나가 넌지시 제안했다.

“저희…… 음, 다 함께 식사를 하러 갔으면 좋겠는데. 어떠신가요? 예카테리나.”

“응? 저녁?”

“예.”

타티아나는 제법 강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카테리나의 첫 무대는 끝났지만 잠시 뒤 7시에 막심 선배의 무대가 남아 있어서…… 저희는 조금 더 있을 생각이거든요.”

그 사람도 오늘이랬지. 이 애들은 나만 보러 온 게 아니구나.

그래도 딱히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막심은 바이올리니스트이긴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이 애들이 당연히 그의 무대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타티아나는 혹시나 싶었는지 덧붙였다.

“아, 빨리 돌아가시고 싶다면 어쩔 수 없…….”

“아냐, 아냐. 나도 너희랑 있을래. 막심이라면 아까 인사도 했고. 내 차례 끝났다고 나 몰라라 호텔에 가 버리는 건 좀 아니지. 안 그래?”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마음 편히 바이올린 연주도 봤으면 좋겠다. 편하게 생각하며 예카테리나가 이야기하자 타티아나도 환하게 웃었다.

저녁 일정이 정해졌으니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마침 배가 고프기도 하고. 예카테리나는 앞장서서 말했다.

“뭐 먹을까? 이번엔 내가 사는…….”

“제가 사죠.”

“?”

그런데 옆으로 누군가가 툭 끼어들었다. 뭐하는 사람인가 싶어 돌아보자, 깜짝 놀랄 사람이 등장했다.

“아르카디 교수님!”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학부의 교수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피메노프가 씩 웃었다.

***

당연히 여기 어딘가 계실 거라 생각을 하긴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랜만이네요. 두 사람.”

아르카디 교수님은 나와 에르네스트를 보며 말했다. 반년 만에 뵙는 것이니 오랜만이긴 했다.

이어서 교수님은 우리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아마 두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인재라면 누구라도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데리고 가길 원하시는 분이시니까.

짧은 눈인사를 보낸 뒤, 아르카디 교수님이 우리에게 말했다.

“저번 연주회에서 예카테리나와 친해졌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군요.”

예카테리나가 우리에 대한 이야기도 했던 걸까?

난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예카테리나는 아직도 당황스러운지 아르카디 교수님의 옆으로 다가서선 빠르게 이야기했다.

“교수님, 오늘 다른 교수님들과 바쁘시다고…….”

“바쁜 일은 다 끝났죠.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콩쿠르 무대를 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아까 메시지만 받아서…….”

“제가 대기실에 가면 무슨 말을 한들 예카테리나가 긴장밖에 더 하겠어요? 하하.”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을 지도해 본 연륜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무언가 항변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분명 그 말대로였을 테니까.

아르카디 교수님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무튼, 제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이 고마운 친구들이 와서인지…… 무대는 매우 좋았습니다. 예카테리나. 딱히 피드백할 것도 없겠던데요?”

“그럴 리가요. 차이코프스키만 해도…….”

예카테리나는 연주 도중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었는지 자기도 모르게 말하려다가 삼켰다.

“뭐 제가 마음이 들어도 예카테리나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있겠으나…….”

그런 연주자의 후회도 이해한다는 듯 말하던 아르카디 교수님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볍게 예카테리나의 어깨를 잡으며 이어 말했다. 흐뭇해하는 눈빛이 그녀에게 향했다.

“오늘은 칭찬만 해 주고 싶네요.”

“그럼 저도 오늘은 칭찬만 받을게요.”

“하하.”

예카테리나도 당황했던 기분이 다 풀렸는지 농담조로 말했다. 시원한 웃음이 오가고, 아르카디 교수님이 제안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식사나 하러 갈까요? 아까 말한 대로 제가 사도록 하죠.”

처음엔 내가 먼저 제안했던 저녁식사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진 기분이 든다. 아르카디 교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교수님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의 변화는 교수님 역시 느낀 것 같았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편하도록 전 계산만 하고 빠져 줄 테니 부담 가질 건 없고요.”

“감사합니다!”

“너무 기뻐하는 거 아닌가요? 예카테리나.”

“아…… 죄송합니다.”

빠르게 사과하는 예카테리나를 보며 우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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