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1화
우리들이 메뉴를 고르자 아르카디 교수님은 진짜로 계산만 해 주고 가셨다.
아무리 그래도 잠깐 계시다가 가실 줄 알았는데, 우리들끼리 편하게 이야기하길 바라신다며 잠깐 인사만 하시곤 그대로 사라지셨다.
예카테리나는 아르카디 교수님이 가자마자 바로 내게 물었다.
“우리 교수님 멋지지 않니? 센스 있고.”
“아하하…….”
자리를 피해 주신 게 배려인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처럼 멋지다고 하자니 그렇게 여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한 생각으로는 너무 쿨하셔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내 기억으로는 원래 저런 분이 아니셨던 것 같은데……?
약간의 혼란이 와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작게 속삭였다.
“사실은 너와 내가 불편할까 봐 그러신 게 아닐까 싶기도 해.”
“……저희요?”
“저번에 지켜보겠다고만 하셨잖아.”
그 말을 듣고서야 기억의 괴리가 어디서부터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아르카디 교수님은 에르네스트를 몇 년이나 레슨하면서 자신의 제자로 데려오려 하셨고, 나에게도 몇 번이나 제안해 오셨다. 한 번 마음에 든 사람을 쉽게 포기하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저번 송년 연주회 때, 에르네스트가 작곡도 배우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본 교수님은 그 이상 무언가 제안하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에르네스트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생각해 보니 그 이후로는 연락 등이 온 적도 없었다. 우리에게 실망해서가 아니라 하신 약속을 지키고 부담이 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번에도 설마 그것 때문에 빨리 자리를 피해 주신 걸까.
“그런 이유라면 죄송한걸요…….”
“뭐……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을걸. 예카테리나에게 상을 주고 싶으셨던 게 가장 컸을 테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카테리나를 보며 자랑스러워하시던 그 눈빛은 결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아르카디 교수님 역시 오늘의 무대에 굉장히 만족하셨음이 틀림없었다. 이 자리는 거기에 대한 포상일 테고.
“무슨 이야기들 하니?”
우리끼리 속닥이고 있자 발렌티나가 물어온다. 난 길게 설명할 것 없이 간단히 말했다.
“아르카디 교수님에게 감사인사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래? 그냥 잘 아는 애들이니까 사 주시는 거 아닌가.”
“잘 아는?”
“예전에 타티아나 널 스카우트하려 했었다고 들었는데?”
발렌티나는 소문 정도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게 전부이기도 하고.
그런데 스쳐 지나가는 그 이야기에 예카테리나는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스카우트? 정말?”
“아…… 예.”
“그럼 나랑 같이 학교 다닐 수도 있었겠네? 언제?”
잔뜩 흥분한 어투로 예카테리나가 고개를 디민다. 그녀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난 잠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했었던 이야기부터 짧게 이야기했다. 심사위원이던 아르카디 교수님은 날 굉장히 좋게 봐 주셨고, 그 후로도 몇 번 제의를 해 오셨다.
그런데 난 아직 중앙음악학교에 있다. 예카테리나는 갑자기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물었다.
“근데 왜 안 받았어?”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에 굉장히 복잡한 이유들이 얽혀 있었다.
내가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부터, 날 중앙음악학교로 인도한 미하일 선생님. 그리고 혼자 아무것도 못하던 날 지탱해 주었던 친구들.
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메뉴판을 보고 있지만 듣는 귀만은 이쪽을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지금도 내가 혹시나 상황을 어려워하면 곧바로 도와주겠지. 발렌티나와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애들을 일찍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언제 또 잃을지 모르는 피아노만 믿고 아무 보증도 없이 나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 때문에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내 존재가 눈에 들어오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타티아나라는 사람이 중앙음악학교에 없는 세계에서 이 애들이 어떻게 되는지 들었다. 물론 일방적인 이야기였기에 지금 결부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사실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굉장한 안도를 느꼈다.
독선적이고 미련할지라도 내가 여기에 존재하길 허락받은 이유를 찾아낸 것 같아서.
“…….”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에게 해서도 안 되고, 하더라도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가지 않은 이유로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일방적이고 창피한 이야기는 혼자만 알고 있도록 하자. 난 옅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제가 많이 모자라서요.”
“모자라다니?? 어디가? 그리고 아르카디 교수님이 얼마나 까다…… 기준이 높으신 분인데. 네가 스카우트받은 시점엔 이미 그 기준을 충족한 거야.”
예카테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 역시 아르카디 교수님의 눈에 들었던 것일까? 그 기준에 대해 상당한 신뢰가 있는 듯했다.
난 그 신뢰를 의심할 뜻은 없었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준비가 안 된 건 어쩔 수 없었어요.”
“그건 좀 아쉽네……. 네가 왔으면 어쩌면…… 아니, 중앙음악학교가 어쨌단 게 아니라! 내가 무슨 말 하는진 알지?”
“아하하, 알아요. 예카테리나.”
그녀가 여기 있는 네 명을 낮춰 볼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한 건 아니었다. 보다 고등 교육기관으로 갈 기회를 몇 번이나 거절한 것에 대한 순수한 의문일 뿐이다.
예카테리나는 내게 재차 묻는 대신 혼자 무언가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에르네스트도 몇 년이나 그랬다고 들었고…… 음.”
이미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아르카디 교수님에게 들은 모양이다. 반년 전에 그녀가 에르네스트와 듀엣 파트너로 정해졌다고 했을 때, 이미 충분히 교수님으로부터 알아보지 않았을까 싶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카테리나를 두고 아나스타샤는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말했다.
“파스타 말고 다른 거 시킬 걸 그랬나.”
“이제 와서 변덕을 부리려 해도 늦었어, 아나스타샤.”
“나도 알거든?”
“그럼 하나 더 시키든가.”
“하나 더 시키면 내가 그걸 어떻게 다 먹니?”
발렌티나는 또다시 아나스타샤를 놀려먹으려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몇 번 이야기를 받아 주더니 포크를 이리저리 바꿔 잡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장난이 심하다. 발렌티나가 도와 달라는 듯 내 소매를 당겼다.
난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눈초리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위협에서 벗어난 발렌티나가 다시 이야기하려던 순간, 웨이터가 각각의 음식들을 서빙해 왔다.
식전 기도나 건배 같은 걸 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예카테리나의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니 축하를 하는 것도 어색했고.
대신 예카테리나가 짧게 감사를 전해 왔다.
“저녁을 이렇게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우리 부모님들은 멀리 사시기 때문에 오늘 못 오셨거든.”
예카테리나는 고향도 멀고, 음악원 영재 클래스의 친구들 역시 세계 각지에서 온지라 방학엔 보통 모스크바에 없다. 원래는 오늘 혼자여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테이블 위를 훑으며 말했다.
“오늘 고마워. 내가 통과한다면 다 너희들 덕분일 거야.”
우리가 없었어도 물론 잘했겠지. 예카테리나는 먼 독일 에틀링겐에서도 우승한 실력자이니까.
하지만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난 미래의 이야기를 했다.
“다음도, 다다음도 좋은 무대 보여 주세요. 예카테리나.”
“……!”
예카테리나가 날 본다. 그녀는 무어라 더듬거리다가 다시 입을 다물길 반복했다. 난 괜히 그녀를 복잡하게 만들었나 싶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식사 하도록 하죠. 맛있게 드세요.”
“으, 응. 너도. 타티아나.”
그녀는 얼른 포크를 들고는 자신의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 내 몫의 브루스케타를 한 입 넣었다. 바삭함과 자두의 향긋함이 섞여 터져 나온다. 나쁘지 않았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샐러드와 훈제 오리고기, 아나스타샤는 트러플 소스로 추정되는 소스가 끼얹어진 파스타. 그리고 발렌티나는 조각 피자를 더 조각내고 있었다.
7시까진 2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눠가며 식사를 했다. 이 시간이 우리를 조금 더 가깝게 묶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모두 접시를 비웠다. 아나스타샤가 짧게 평했다.
“이 근처는 다 돌아다녀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괜찮은데?”
“그러게. 담백해서 좋아.”
발렌티나도 동의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가끔 와 볼 만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의 평을 듣고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난 예전에 교수님이랑 몇 번 온 적 있어서.”
“그러니?”
“응.”
태연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난 새삼 감탄했다.
아르카디 교수님에게 한참이나 레슨을 받았으니 함께 식사를 한 것도 이상하진 않지만, 정말 어지간하면 넘어갔을 것 같은데…… 대단하네요 에르네스트…….
커피를 홀짝이던 예카테리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아무튼…… 조금 있다가 7시엔 스몰홀에서 바이올린 콩쿠르 관람하고…… 그리고 내 방 가서 쉬어야…….”
세미파이널까진 며칠간 시간이 있으니 일단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예카테리나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인상을 썼다.
“오늘은 이상한 사람 없었으면 좋겠네. 정말로.”
아, 이상한 사람이 새벽에 소란을 피웠다고 했었지.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짜증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냥 뭔가 방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만하다. 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종종 있었으니까.
참가자들이 안심하고 콩쿠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한데…… 그것 말고도 떠오르는 생각은 몇 가지 있긴 했다. 난 이 생각들을 제안해도 되는지 몇 번 되짚어 본 뒤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예카테리나. 혹시 반드시 그 호텔에 머물러야 한다는 콩쿠르 규정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없어. 원래 모스크바에 살던 애들은 보니까 그냥 집에서 왔다 갔다 하던데. 나도 기숙사 열려 있으면 그냥 기숙사 가도 될 텐데.”
역시 호텔을 빌려주는 건 단순히 전 세계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예카테리나는 방학엔 왜 기숙사를 안 여는지 모르겠다며 당연히 안 되는 것에 대해 불평을 했다. 난 그녀를 달래듯 살짝 제안했다.
“저기, 그러면 저희 집에 오시겠어요? 방을 빌려 드릴게요. 편히 쉬실 수 있게.”
“……응?”
갑자기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예카테리나가 날 돌아본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순간적으로 혹하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아니지, 그건 너무 실례잖아.”
“괜찮아요. 빈방은 많고…… 또 피아노도 있으니 원하신다면 연습을 하실 수도 있어요.”
“…….”
피아노도 있다는 말엔 정말 관심이 가는 듯하다.
근래 들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적이 별로 없었다. 세연이 이곳에 왔을 때 초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녀와 너무 친해지는 건 모두에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별로 걱정할 게 없다. 콩쿠르에 집중하고 싶어 할 뿐이고, 그렇다면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 정도는 쉽다. 난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제안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제안을 들은 다른 친구들 역시 반응을 보였다. 발렌티나가 먼저 말했다.
“우리도 타티아나네 놀러 갈까? 아나스타샤.”
“……우리가 가도 되겠어?”
난 발렌티나도 아나스타샤도 에르네스트도 모두 환영이었다.
“예. 당연하죠.”
하지만 내 대답을 들은 아나스타샤는 잠깐 나와 예카테리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지금 놀자고 예카테리나를 초대한 게 아니잖아. 타티아나. 여러 사람 있으면 방해만 돼.”
“난 방해 안 할 건데?”
“그냥 우리가 신경 쓰이게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치만…….”
“교수님도 방해가 될까 조심스러워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그러면 안 되잖니.”
평소 발렌티나에게 하는 투가 아닌 차분한 어투였다. 발렌티나도 몇 번 반박했지만 논리적인 말엔 뭐라 할 말이 없는지 수긍했다. 에르네스트도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모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반성했다. 예카테리나에게 휴식하고 집중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왜 다른 친구들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가도 돼?”
“그럼요. 예카테리나.”
다시 한 번 확인한 예카테리나는 잔뜩 기대를 담은 눈을 빛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