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2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음악원으로 돌아온 우리는 근처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막심 선배는 대기실에서 준비를 하고 있어서 만날 수 없었다.
“슬슬 들어갈까?”
“그럴까요.”
예카테리나의 얼굴엔 피로가 맺혀 있었다. 두어 시간 쉬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정신적인 소모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와 함께 막심 선배의 무대를 보겠다며 참가자 특별석을 요청했다.
모스크바 음악원 내부에 있는 두 개의 콘서트홀. 그중 436석의 스몰홀은 지금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홀의 크기도 파이프 오르간도 그레이트홀에 비해선 작고 아담한 사이즈이지만, 그래도 피아노 한 대와 바이올린이 무대에 올라와 연주하기엔 좋은 홀이었다.
“청중 여러분들은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고, 예카테리나는 옆쪽의 참가자들을 위한 좌석으로 향했다.
바이올린의 첫 라운드도 피아노처럼 참가자마다 40분에서 50분 정도로 구성된다.
그런데 그 레퍼토리는 조금 더 엄격하게 짜여 있었다.
처음으로 주어진 주제곡은 역시 바흐다. 참가자들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 BWV1005의 1악장과 2악장만을 연주하거나, 파르티타 2번 BWV1004의 샤콘느를 연주해야 한다.
두 번째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op.1에서 24번을 반드시 포함한 두 곡.
세 번째로 차이코프스키의 왈츠 스케르초valse scherzo. op.34
마지막은 원하는 자유곡이었다.
자유곡은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앞서 연주해야 하는 네 곡은 거의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곡가들을 기준으로 두고 상당히 자율도 높게 열려 있던 피아노와는 조금 다르다.
이렇게 자율도를 조여 놓았다는 것은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에게 원하는 테크닉이나 음악성이 정해져 있다는 말과 같았다. 참가자들은 거의 같은 곡을 가지고 경쟁해야 했고, 그 심사 기준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다.
난 그 기준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잘 모르는 내가 듣더라도, 막심 선배는 그 기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첫 악장 아다지오adagio는 피아노로 연주하면 정말 쉬운 악장이다. 하지만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도 바이올린으로 아르페지오로 두 개에서 네 개까지의 음들을 정확하게 내는 건 기초에 대한 원숙한 기교가 있어야만 했다.
거기에 2악장 푸가로 이어지니 레가토까지 더해졌다. 피아노 없이 연주되는 푸가는 현들을 동시에, 그러면서도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파르티타 2번 샤콘느도 정말 어려운 곡이지만, 이 소나타 3번은 깔끔하게 연주하기에 정말 어려운 곡이었다. 주법에 대해 생각하며 듣는다면 머리가 어질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막심 선배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로 소나타를 연주해 냈다.
다음 이어진 곡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op.1의 21번. 그리고 24번이었다.
바흐에서 보여 준 무시무시하게 단단한 기초는 이 파가니니에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돋보였다.
“…….”
머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눈을 내리 깐 막심 선배가 지판을 짚고 활을 켠다. 한 번 당기는 행위인데 손이 튀어 오르면서 순식간에 몇 개나 되는 스타카토를 완성하고 음악으로 삼는다.
주변 청중들의 분위기는 조용해지다 못해 심장 뛰는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적막해졌다. 한 대의 바이올린 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카프리스 24번에선 그 소리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하나의 테마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열한 개의 베리에이션. 그리고 피날레. 그 모든 것이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쏟아부어졌다.
청중들은 이 화려한 변주를 따라가기에 바쁘다. 난 리스트가 피아노로 편곡한 이 곡을 레퍼토리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금 막심 선배의 연주를 조금 더 넓게 해석하며 들을 수 있었다.
“브라보!”
음악이 끝나자마자 거의 자동적으로 갈채가 터져 나온다.
막심 선배는 별로 힘도 들지 않았는지 평소와 같은 얼굴로 깍듯이 인사하고는 잠시 대기실 쪽으로 향한다. 그러고는 두 명의 사람과 다시 돌아왔다. 피아노 연주자, 그리고 페이지 터너였다.
그간 비어 있던 피아노 앞에 연주자가 앉고 악보 등도 준비를 마쳤다.
막심 선배는 준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가 먼저 차근차근 음악의 틀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기다리던 막심 선배는 정확하게 피아노 소리 사이에 파고들며 활을 당겼다.
차이코프스키의 왈츠 스케르초.
지금까지 연주한 바흐와 파가니니의 음악들이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이 무대에 설 자격을 증명하는 음악이었다면, 지금부턴 마치 리사이틀을 하는 연주자의 음악이었다.
악마적인 기교를 뽐내듯 기교하는 느낌은 없었다. 풍성하고 섬세한 음색이 슥 스쳐 지나간다.
바이올린은 피아노처럼 음율이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는 악기가 아니다. 아주 미세한 테크닉이 정말 큰 음색의 차이를 가져온다. 막심 선배가 이루어내는 변화는 거의 다른 사람의 연주인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런 천변만화하는 연주는 마지막 곡에서도 빛을 발했다.
프란시스 풀랑의 바이올린 소나타 FP.119
드뷔시와 라벨로 이어지는 20세기 인상주의 시대의 프랑스에서 태어난 풀랑은 그 시대를 따르지 않고 신고전주의로 음악적 기틀을 세운 음악가였다.
“…….”
바이올린이 피아노와 엇갈려 내려가며 서로를 옭아매다가 놓아주고, 쫓고 쫓긴다.
수채화를 흩뿌리는 듯한 인상주의적 화려함이 돋보이지만 드뷔시적이지 않다. 화음들을 살짝 비틀며 순간적으로 던지는 현대음악적인 성향이 엿보이지만 쇼스타코비치적이지 않다. 그보다 훨씬 더 고전적이고 베토벤적이었다. 하지만 장엄함을 덜어내어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확실한 음악을 이룬다.
풀랑의 신고전주의 음악은 기법과 화음, 음악적 기초를 뒤틀어 색다른 것을 추구하던 현대음악과 다른 방법으로 가치를 추구했다. 이 월등한 재해석은 다시 한 번 막심 선배의 해석을 거쳐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굉장히 세련된 음악으로 들리게 했다.
“브라보!”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50분을 꽉 채운 연주로 막심 선배는 그것을 완벽하게 증명해냈다.
엄청난 박수 소리에 파묻히다시피 하며 선배가 대기실로 나가고, 우리 역시 홀을 빠져나왔다. 다음 연주자의 연주도 궁금하긴 하지만 무작정 앉아서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계속 듣고 있을 순 없었다.
복도로 나와서 잠시 기다리자 막심 선배의 어머니도 우리를 발견하시고는 이쪽으로 다가오셨다.
“어머나…… 타티아나. 얘들아. 방금 홀 안에 있었니?”
“예. 연주를 듣고 나온 참이에요.”
“너희들은 피아노 연주자일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선배의 어머니는 우리가 진짜 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누구라도 충분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연주였어요. 듣길 정말 잘했어요.”
난 피아노 연주자이지만, 같은 음악가로서 방금 있었던 연주에 대해 짧은 평을 건넸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도 한마디씩 얹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곧 히죽거리며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막심 선배였다.
“너희 어디 앉아 있었는지 다 보고 있었지.”
옆으로 앉게 되는 피아노 연주자와 달리 바이올린 연주자는 정면을 보고 선다. 물론 청중들 쪽을 늘 보고 있진 않고 바이올린에 모든 시간을 집중하긴 하지만, 그래도 청중석을 살피고 우릴 본 모양이다.
난 웃으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그럼 제가 감격해하고 있었던 것도 보셨겠네요?”
“오…… 그랬어?”
“아뇨, 거짓말.”
“……어이없네?”
“거짓말이라는 건 거짓말이에요.”
“뭐라는 거야?”
막심 선배는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배는 대놓고 내게 성격 나쁜 피아니스트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 정도 장난은 장난 축에도 못 낀다.
하지만 실없는 농담이 오가는 중에도 막심 선배의 눈에선 무언가 원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난 그걸 계속 피할 생각이 없었다. 짧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너무 좋았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다음 라운드는 가겠네.”
“확신하세요?”
“네 평가는 확신해.”
언제부터 절 그렇게 신뢰하신 거죠?
고개를 갸웃거리니 막심 선배는 크게 웃으며 이젠 걱정도 안 된다며 쿨하게 이야기했다.
아까에 이어 잠시 또 막심 선배의 연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예카테리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로만의 연주가 생각난다며 막심에게 관심을 보였고, 에르네스트는 근래 작곡하면서 바이올린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지 여러 주법이나 수준 높은 발음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선배는 아예 나중에 시간을 제대로 잡고 이야기를 하자며 작곡에 시간을 쏟는 에르네스트를 얼마든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난 서로 다른 악기를 다룸에도 같은 음악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돕고 약속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약간 목 근처가 먹먹해지는 기분마저 느꼈다.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언제까지고 복도에 서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순 없었다. 더군다나 막심 선배는 어머니까지 함께하고 있고.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호텔로 가야지.”
난 혹시나 싶어 예카테리나에 이어 막심 선배도 오지 않으시겠냐고 의사를 물었다. 콩쿠르 참가자이니 조용한 공간을 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배는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다고 사양했다. 사양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무대 봐 줘서 정말 고맙고…… 다음에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깔끔하게 인사하고, 막심 선배는 어머니와 함께 떠나갔다. 며칠 후엔 세미파이널 무대에서 또 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 이제 한 명, 세미파이널 무대에 서게 되리라 생각하는 피아노 연주자가 남아 있었다.
“저희도 갈까요.”
“응. 그래.”
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예카테리나를 초대하겠다고 예고르에게 전화를 하고, 대기하고 있을 레오니드에게 연락했다. 음악원 앞으로 나가니 마치 계속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검은 벤츠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쉽지만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는 택시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 타티아나, 예카테리나도. 콩쿠르 준비 잘 하고. 타티아나가 잘 도와주기도 하겠지만.”
“모두들 고마웠어.”
“며칠 후에 뵈어요. 전화할게요.”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창문을 올렸다. 차가 출발하고도 친구들은 잠시 서 있었다.
차 안엔 레오니드와 야콥. 그리고 나와 예카테리나만 있었다. 레오니드가 룸미러로 우리 쪽을 힐끔 보더니 물었다.
“호텔에 있는 짐들은 어떻게 할까요. 직원들이 가져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 지금 바로요?”
“저희가 방에 들어가는 게 싫으시다면 직접 가셔도 괜찮습니다.”
“괘, 괜찮아요! 부탁드릴게요!”
내가 초대했을 때만 해도 상당히 기뻐하던 예카테리나는 어쩐지 약간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레오니드와 야콥의 인상이 사나워 보여서 그런가……? 대화를 해 보면 정말 좋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예카테리나가 먼저 날 불렀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갑자기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건 아는데…… 지금 바로 베르체노프가로 가는 거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구나…….”
그녀는 그냥 그렇게 중얼거렸다.
난 조금 곤란함을 느꼈다. 예카테리나가 호텔에서 불안해할까 싶어 집으로 초대한 건데 긴장해 있으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냥 평범한 집이에요. 아버지와 오빠가 계시겠지만, 분명 반겨 주실 거예요.”
혹시나 싶어 그렇게 말했더니 예카테리나는 그제야 조금 나아졌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여유를 되찾곤 평소에도 이렇게 통학을 하냐면서 이러저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분위기는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깨졌다.
“평범한 집이라며?”
“조금 크긴 해요.”
“이게 조금이니??”
예카테리나는 거의 속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차가 저택 부지를 가로지르고, 저택 본관이 서서히 다가오자 빠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잠깐만…… 선물이라도 사갖고 왔어야…… 아니…….”
“제가 식사 자리에서 바로 초대했으니 괜찮아요. 시간이 없었잖아요? 예카테리나.”
친구이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참가자인데 호텔이 불안해서 초대했다고 하면 누구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는 곧 멈춰 섰다. 난 먼저 내렸고, 곧 이어 예카테리나가 조심스레 내렸다. 그녀의 얼굴엔 괜히 초대를 받아들인 것 같다는 후회가 쓰여 있었다. 저 후회를 어떻게 풀어 주면 좋지?
“어? 벨카.”
나는 나대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커다란 털뭉치가 달려들었다. 난 웃으며 벨카를 받아주었다.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벨카를 보고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난 벨카의 옆에 앉아선 예카테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인사하세요. 벨카. 예카테리나라 해요.”
“왕.”
“…….”
예카테리나는 언젠가 아나스타샤가 보였던 것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날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