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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93화 (593/1,277)

##  593화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와 처음 만났었던 연주회 리허설 자리를 떠올렸다.

그땐 그냥 에르네스트를 좋아해서 따라 나온 애 정도로 생각했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그냥 친분으로 따라올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예카테리나가 모르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예카테리나는 거의 평생을 연주자로 살면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직접 피아노로 겨뤄 보고, 또 연주회에서 보여 준 실력을 확인하면서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라는 연주자를 확실하게 뇌리에 각인시켰다.

그 뒤에 베르체노바라는 성에 대해선 주변 사람들은 수군수군 말이 많았지만, 예카테리나는 사실 거기에 대해 그리 흥미가 있지 않았다. 연주자로서 서로를 안다면 충분했다.

모스크바 음악원만 하더라도 날고 긴다는 집안의 아들딸들이 수두룩했다. 예카테리나는 모스크바가 아닌 먼 중소도시의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랐지만 그런 사람들과도 여러 친분과 음악을 교류했고, 결국 음악원에선 음악으로만 평가된다는 것 역시 몇 번이나 봐왔다.

타티아나 역시 예카테리나에겐 음악으로 서로를 가늠할 수 있는 친구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녀가 집에 초대했을 때도 큰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예상을 뛰어넘어도 몇 계단은 뛰어넘어 있었다.

“여기 혹시 루블레브카rublevka니?”

“그 근처이긴 해요.”

“…….”

좀 산다고 해 봐야 모스크바의 부촌 중 하나인 프리스넨스키 쪽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타티아나가 사는 곳은 러시아의 비버리힐스라고까지 불리는 루블레브카였다.

경호원들과 검은 벤츠까진 그렇다 치고, 모스크바 교외로 나오는 것 같았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베르체노프가 큰 기업이라고 듣긴 했지만 석유나 가스 산업 등엔 관심이 없어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타티아나가 어떤 배경을 지녔든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로 대할 자신은 있었다. 거기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놀러 와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마구 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은 편하게 놀러 온 것도 아니라 순전히 예카테리나의 편의를 위해 준비된 상황이었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같은 타티아나의 다른 친구들도 예카테리나 때문에 오늘 같이 오지 못했단 생각이 들자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어졌다. 시끄러울지언정 그냥 호텔에 있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차는 거대한 정문을 향해 들어서고 있었다.

“…….”

정원이 얼마나 넓은지, 저 멀리 보는 저택은 거의 성에 가까웠다. 예카테리나는 루블레브카 내에서도 이 정도 부지의 저택에서 사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아버지에게도 소개해 준다 했었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우리 아빠는 그냥 회사 다니신다고 하면 되나? 솔직한 대답이니 별문제 없을 것 같긴 한데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가장 먼저 소개해 준 건 그녀의 아버지도 오빠도 아닌 개였다.

“자, 인사하세요. 벨카. 예카테리나라 해요.”

“왕.”

타티아나는 개와 시선을 맞추며 앉더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쓰다듬고는 예카테리나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지금까지 혼자 생각했던 것들이 다 바보처럼 느껴졌다. 목 부근 어딘가에서 힘이 풀려 나간다. 예카테리나는 멍하니 타티아나와 벨카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방금 인사한 거야?”

“예. 들으셨나요?”

“듣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인 것 같아서.”

“정확히 들으셨어요.”

타티아나는 자신의 개가 말을 할 줄 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경어를 쓰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냥 예카테리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얌전히 있는 벨카를 몇 번 쓰다듬고, 타티아나를 따라 저택 입구로 들어섰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커다란 응접실엔 몇 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늦으셨네요? 아가씨.”

“예. 콩쿠르를 관람하고 오느라.”

“친구분이신가요?”

“예카테리나라고 해요.”

편안한 인사가 오간다. 이것만으로도 예카테리나는 이 저택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긴장이 풀렸다.

원래 타티아나가 온화한 사람이니 그녀의 집 역시 비슷하리라 예상하는 건 쉬운 일이었을 텐데, 왜 겁부터 먹었는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몇 명의 사람들과 인사하더니 주변을 휙 둘러보곤 물었다.

“아버지는요?”

“유리 님은 식사 후에 서재에 계십니다. 조금 전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타티아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했고 사람들 역시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의 뒤를 따라 주방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드미트리라는 이름의 셰프와 인사를 하고, 타티아나는 차와 다과를 조금 받아선 계단을 올랐다.

“아버지.”

“들어오너라.”

중후한 목소리는 문 너머로도 무겁게 느껴진다. 예카테리나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으며 타티아나를 따라 들어갔다.

서재 안엔 마치 거대한 빙하를 닮은 중년의 남자가 책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얼어버릴 것 같았는데, 타티아나는 막 들어선 걸음걸이 그대로 다가가선 책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를 받아왔어요.”

“내가 기다리던 게 두 가지나 함께 왔군.”

유리는 찻잔과 타티아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더니, 책을 책장에 꽂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르구나. 자정까진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다른 분들의 연주는 녹화로 볼 생각이에요.”

“흠…….”

콩쿠르 관람에 대해선 이미 아는지 유리는 그 이상 묻지 않고 이어서 시선을 다시 예카테리나 쪽으로 돌렸다. 예카테리나는 바짝 긴장했다.

“아, 소개드릴게요. 제 친구 예카테리나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입니다…….”

이름 말고도 음악원에 다닌다는 것과 피아노를 친다는 것 등 이러저런 소개를 해야 한단 생각은 있었는데, 그냥 그 이상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리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타티아나와는 송년 연주회에서 만나 친해졌나?”

“……!”

그때 보신 걸로 기억하시는 건가? 예카테리나는 깜짝 놀라선 대답하지 못할 뻔했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그 정도면 충분한지 더 깊게 묻지 않고 짧게 말했다.

“환영하마. 예카테리나.”

너그러운 미소가 입가에 맺힌다. 지금 유리가 예카테리나를 타티아나의 친구로 받아들였음을, 그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부디 편하게 있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그…….”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거라.”

“아, 아, 아저씨.”

아무리 생각해도 회장님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아저씨라고 하려니 어색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기분 좋게 웃는 걸 보니 이게 이 집에선 보통인 것 같았다.

유리 역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가서 쉬거라.”

“좋은 밤 되세요.”

타티아나가 인사를 하고, 다시 두 사람은 조용한 복도로 나올 수 있었다.

뭔가 정신없이 타티아나를 따라 다닌 것 같은데 어찌어찌 잘 하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복도 끝 쪽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예카테리나와 눈을 마주했다.

“우선…… 제 방에 가시겠어요? 예고르에게 이것저것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 계실 이유는 없으니.”

“네 방? 그러자.”

방을 빌려준다고 듣긴 했지만 지금 바로 혼자 남겨진다면 정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타티아나를 따라갔다.

타티아나의 방은 1층 끝에 위치해 있었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정말 의외였다.

그리고 그 안의 풍경은 더더욱 예상 밖이었다.

예쁘다고 잔뜩 칭찬할 생각을 하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황량하다고 해도 좋은 방 분위기에 무어라 해야 할지 말을 잊었다. 타티아나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재미없죠? 죄송해요. 제가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무언가 꾸미는 데엔 재능이나 취향이 없는 사람이어서.”

인상주의 음악은 그렇게 잘 연주하면서 왜 방은 못 꾸미는 건지 모르겠지만, 예카테리나는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미니멀리즘도 취향이라면 취향이라 할 수 있잖아?”

“미니멀리즘……이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단순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뜻을 몰라서 되묻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타티아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어 말했다.

“아하하, 전 원래 미니멀리즘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원래?”

“후후, 쉬고 계세요. 잠깐 갔다 올게요.”

뭔가 이상한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타티아나는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정말 간소한 방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액자만이 유일한 인테리어처럼 보인다.

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액자 안에 있는 검은 새의 그림을 보았다. 특별한 예술품처럼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될 부분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그림이었다. 다만 타티아나가 이 그림을 굉장히 아낀다는 게 느껴졌다. 어릴 때 그린 걸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자니 곧 타티아나가 돌아왔다.

“정말 죄송해요. 방은 준비되었는데, 호텔에 있는 예카테리나의 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 괜찮은데.”

“혹시 씻고 싶으시다면 일단 제 옷을…….”

“이따가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 계속 이 상태였는걸.”

드레스를 입고 온종일 피아노에 달라붙어 있었더니 이젠 그냥 한 몸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땀을 흘리긴 했지만 불편하거나 벗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보단, 피아노 생각을 했더니 아까 타티아나에게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평소엔 아까 응접실에 있던 그 피아노로 연습해?”

타티아나는 원한다면 연습도 시켜 줄 수 있다고 했다. 응접실에 피아노가 있긴 했지만 그 피아노로 연습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만저만 민폐가 아니다.

아마 다른 곳에 방음실과 피아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본 건데, 아니나 다를까. 타티아나는 개인 연습실을 가지고 있었다.

“제 연습실은 별관에 있어요. 이쪽에서 보시면 보여요.”

“어디?”

그녀가 창 쪽으로 손짓했다. 가서 보니 정말 창밖으로 건물이 보였다.

예카테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시간은 이미 9시에 가깝다. 잠시 후 옷이 온다고 하니 일단 씻고 쉬어야 할 참이다. 오늘은 힘들었으니까 그냥 타티아나와 가볍게 잡담이나 하며 놀다가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

하지만 콩쿠르 무대에서 연주했던 곡들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고, 타티아나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카테리나가 정말 높게 평가하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지금 가 봐도 될까?”

남의 집에 와서 밤 9시에 피아노를 만진다는 건 예의에 벗어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때문에 타티아나가 난색을 표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면서도 딱 한 번만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물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바로 승낙했다. 조금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가 지금 자신과 비슷한 기분일 거란 생각을 했다.

드레스차림 그대로 두 사람은 별관으로 향했다.

심플했던 타티아나의 방과 달리 별관의 연습실은 음악가를 위해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대량의 음반과 악보는 눈이 빙빙 돌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피아노였다.

예카테리나는 무언가 묻지도 않았다. 침묵 속에서 타티아나는 모든 것을 허락했다. 때문에 그녀는 그대로 이끌리듯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연주해야 하는 곡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 선율 중 차이코프스키의 둠카를 붙잡아 내렸다.

“…….”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할 필요는 없었다.

콩쿠르 무대에서 느꼈던 아쉬운 부분. 딱 그 프레이징의 첫 호흡부터 시작한다.

아쉬웠던 만큼만 덜어 내고, 또 아쉬웠던 만큼만 불어넣는다. 몇 번이나 쳐 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무대에서 보인 연주를 반복해 돌이켜보면서 예카테리나의 머릿속엔 보다 완성된 음악이 존재했다. 그것을 세심하게 피아노에 담아낼 뿐이다.

타티아나의 피아노는 얼마나 잘 관리되어 있는지, 처음 만져 보는 것인데도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너무나 편하게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후회를 씻어 낼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무대에 이미 선보인 음악을 어떻게 할 순 없다. 하지만 앞으로 예카테리나에게 내재될 차이코프스키의 둠카는 훨씬 더 훌륭해질 것이다.

“좋았어요.”

짧은 프레이징을 연주하고 손을 내려놓자 타티아나가 말했다. 예카테리나는 지금 이 음악의 심사위원은 단 한 명이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에르네스트는 예카테리나의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었죠. 그 말대로네요.”

타티아나는 자연스럽게 에르네스트의 평도 올렸다. 예카테리나는 그 말에서 짙은 유대와 존경 등을 느꼈다. 그런데 그건 에르네스트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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