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94화 (594/1,277)

##  594화

예카테리나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의 전부가 아닌 한 프레이즈만을 연주했다. 부분 연습과 같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지금 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건 연습이 아닌 완성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심각하게 문제 삼지 않을 한 부분에 그녀가 지금 가능한 최고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멋진 마무리였어요. 예카테리나.”

이미 무대는 끝났고 방금 연주된 부분은 피날레도 아니었지만, 난 그렇게 이야기했다. 예카테리나가 이 곡과 함께한 기나긴 여정은 지금 완성되었다. 물론 이 완성은 머지않아 또 갱신되어 새로운 완성으로 이어져 나가겠지.

나 또한 그녀와 같은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이미 무대 위에 올라가 평가가 끝난 음악을 다시 손보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의 평가 같은 건 둘째다. 스스로만 아는 완성도의 결여를 채워 넣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인 것이다.

예카테리나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곳이 정말 보고 싶어졌다.

“이 연주를 에르네스트도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는 예카테리나의 음악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지금 이 완성도를 본다면 또 다른 말을 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예카테리나에게도 그리고 에르네스트에게도 좋은 일이 되어 줄 텐데.

한 곡의 음악으로 여러 힘을 이끌어 낼 음악가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카테리나가 팔을 슥 내리며 물었다.

“연주가 끝난 뒤에 바로 그 애와 이야기를 했었어?”

“예…… 그렇죠?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요.”

“그랬었지?”

“예카테리나에게 좋은 무대였다고 말했었던 건 빈말이 아니었어요. 저와 둘이 이야기할 때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거든요.”

둠카가 끝난 뒤 에르네스트는 진심으로 예카테리나의 실력 상승에 감탄하고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내게 좋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말도 하긴 했지만…… 지금 여기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예카테리나는 내 말을 듣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눈치다. 설마 뒤로는 혹평을 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 같진 않고, 그냥 다른 의문이 있는 것 같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리자, 이윽고 예상 못한 이야기가 툭 튀어나왔다.

“그건 고마운 일이네. 난 에르네스트가 나보단 다른 연주자들에게 관심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

“그 애는 아는 사람 많았을걸?”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예카테리나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반박을 해 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실제로 콩쿠르 참가자들을 보며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서 친밀하게 인사를 하거나 응원하는 일도 없었고, 직접 1차 무대를 보겠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그에게 있어선 예카테리나라고 해서 특별히 무대를 봐야 할 이유도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의 친분이라 한다면 저번 송년 연주회 때의 만남 정도인데, 그때도 친구로서 친해졌다기보단 연주자로서 교류한 정도였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매몰차기도 한 그런 에르네스트의 기준을 예카테리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내 연주만 본 건 아마 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맞는 말이었다. 내가 같이 가서 보자고 했다. 에르네스트는 별말 없이 따라 주었고.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난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난 친구와 함께 콩쿠르를 관람하고 싶었던 건데, 뭔가 변호를 해야 할 것 같고…… 심지어 그 변호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단 기분이 자꾸 들었다. 무슨 말을 떠올려 봐도 이래선 변호가 아니라 변명에 가깝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순 없어서 일단 나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무대만 챙겼다는 이야기만 빠르게 풀어놓기로 했다.

“제가 제안을 드리긴 했지만 어떠한 강요를 하거나 한 적은…….”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닌데. 참.”

“……?”

“어쨌든, 에르네스트도 이렇게 마무리된 연주를 듣고 싶어 할 거라고 했지? 나중에 걔 앞에서도 한 번 쳐 보고 의견을 들어 볼게. 어때?”

“기뻐할 거라 생각해요.”

“기뻐한다고…….”

지금은 에르네스트를 변호해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라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나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갑자기 하기 싫어지네.”

“예? 방금 전만 해도…….”

“그냥 안 할래.”

“…….”

난 조금 당혹스러웠다. 예카테리나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 말을 텅 빈 입발림이라 느낀 것이라면, 혹은 에르네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예카테리나의 손바닥 뒤집기는 비꼼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그보다 훨씬 깊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었다.

“…….”

아무 생각 않고 그냥 이 흐름에 따르기만 해도 된다. 그 정도는 알겠다. 예카테리나에게도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콩쿠르 참가자라는 입장일 테니까, 괜한 다른 이야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냥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해 주시겠어요?”

“하다니?”

“방금 스스로 완성하신 음악 말이에요.”

약간의 이기심을 느끼면서도 예카테리나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눈을 하더니, 곧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너 가끔 꽂히면 그만두는 일이 없구나? 저번에도 그렇고.”

“예. 저 원래 이래요.”

반년 전에도 도발에 곧이곧대로 넘어가 주었던 일로 그녀는 내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애가 왜 이럴까…….”

그런데 약간 답답해하는, 못마땅하다는 눈빛이 내 쪽으로 향한다. 질세라 마주 보았더니 그녀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든 예카테리나의 얼굴은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럼 너도 한 곡 연주해 줄래? 듣고 싶어졌어.”

“그런가요? 어떤 곡으로…….”

“에르네스트가 작곡했었다는 그 곡으로.”

내가 연주하는 둠카나 아니라면 오늘 무대에 올렸던 다른 곡들을 듣고 싶다고 말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예상 못한 리퀘스트였다.

지금 여기서? 해도 되나?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는 사이 예카테리나가 이어 말했다.

“저번 네 리사이틀엔 못 갔었지만 그때 연주했었단 곡에 대해선 알고 있거든.”

“아…….”

“사실 에르네스트가 네게 곡을 헌정하고 네가 연주했다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서 듣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듣고 싶어졌어.”

아까부터 자꾸 그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나라면 아는 작곡가가 다른 연주자에게 헌정한 곡이라면 꼭 듣고 싶어질 텐데.

작곡가들이 자신의 중요한 곡들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에게 헌정하고, 그 초연을 헌정인에게 부탁하는 건 굉장히 평범한 일이었다.

곡을 헌정받지 못한 주변의 다른 연주자들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곡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듣고 싶지 않아 한다거나, 그런 일은 보통 없었다.

예카테리나 역시 기본적인 상식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듣고 싶단 생각이 없었다가 갑자기 듣고 싶어졌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일방적인 변덕처럼 느껴지진 않아서 약간 묘한 기분이었다.

“자, 어서.”

예카테리나는 내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난 무언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이끌리듯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바로 시작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자 예카테리나가 물었다.

“악보도 있어? 보면서 듣게.”

“옆에 있어요.”

“……옆에 두고 계속 연주해?”

겨울의 표리. 그 악보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꽤 공들여 연구하고 직접 제목까지 붙이며 만족할 만한 완성도까지 끌어올렸다곤 하지만, 아직도 종종 잠들고 나면 보다 나은 연주가 아른거리곤 한다. 그래서 가끔 생각이 나면 다시 확인하곤 한다.

예카테리나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라면 완성의 이후를 추구하는 걸 이해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예카테리나는 그냥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관계. 그녀가 봐 왔던 것들.

두 사람과 피아노 앞이 아닌 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기 때문에 뭔가 알은척하면서 파고들기엔 부담스럽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겠거니 하고 모른 척하고 지나치기엔 신경이 쓰였다.

반년 전에 직접적으로 물어봤을 땐 에르네스트가 일단 부인하고 나섰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에게 마음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타티아나가 일단 듀엣 대결을 하자고 했을 때의 얼굴.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꽃의 왈츠를 연주했을 때 타티아나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타티아나가 연주하고 있는 이 곡.

분명 이 곡은 타티아나를 위한 곡이었다.

“…….”

곡의 헌정에 대한 조건 같은 건 없다. 연주자에게 맡기는 신뢰, 혹은 친구에게 보내는 친애, 연인에게 향하는 애정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리고 그 전부가 합쳐져 있는 경우도 많다.

하물며 처음 작곡한 곡이라면 더더욱 의미가 깊을 것이라 예카테리나는 생각했다. 단순할지 모르겠지만 세상 일 대부분 단순한 게 진리인 것 역시 사실이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한 번 악보를 보았다.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선율을 따라서 읽다가, 제목을 떠올린다.

겨울의 표리라는 제목은 조금 모호한 감이 있었지만 문자로 된 의미보다는 그 이면의 색깔이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색 위로 1악장이 드러난다.

부제는 칼리오페와 새.

현란한 아르페지오와 화성이 이루는 파노라마는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가져다주는 음악의 여신과 그 전령인 새를 떠올리게 한다.

예카테리나는 이 곡의 주제와 이미지를 먼저 그려 내어 작곡을 끝낸 후에 제목을 붙였으리라 확신했다.

제목 이전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타티아나가 가장 뚜렷한 모티프였을 테니까.

‘너희는…….’

이전 같았으면 부럽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타티아나가 공정한 대결을 위해 파트너인 에르네스트를 잠시 빌려주겠다고 했을 때, 그 말에서 묻어나는 자신감과 신뢰가 부럽다고 느낀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연주자로서의 신뢰였다.

타티아나는 대결에서 패배했을 경우 약속했던 그대로 에르네스트와 예카테리나의 듀엣으로 진행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건 연주자로선 올바른 마음가짐일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를 인간적인 파트너로 본다면 너무한 처사였다. 결국 너무 괴롭히진 말라고 한마디 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그 관계는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았다.

“…….”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에르네스트도 불만이 있는 것 같진 않고, 이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정말 강렬했지만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에게 엉뚱한 연민 등을 느끼는 건 정말 실례되는 일이었다.

두 사람 다 평범하지 않은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이니 평범한 잣대를 대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예술가적 기질로 무언가를 초월한 사람들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분명 어딘가 어긋난 간극이 있다. 아마도 누군가 짚어 주지 않으면 계속될 간극이.

“어떠셨나요?”

1악장을 마친 타티아나가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전부 연주할 때까지 집중했을 텐데, 지금 아무래도 예카테리나가 연주에 잘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낌새를 느낀 듯하다.

예카테리나는 미안함을 느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건 결국 흥미 본위의 궁금증일 뿐이었다. 타티아나가 자신의 요청을 들어 연주를 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어차피 중요한 콩쿠르를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의 사적인 관계에 신경 팔 겨를이 있나? 세미파이널에 올릴 곡을 연습하고 혹시 가능하다면 타티아나의 의견도 살짝 들어 보는 게 훨씬 더 건설적인 일이었다.

“타티아나, 우리 차 한잔 마실래?”

“?”

그래도 잡담 20분 정도는 괜찮겠지?

타티아나는 언제나 경건한 연주자의 태도로 생활하는 아이였다. 그 분위기에 젖어들기라도 하듯 누구나 이 애 앞에선 착실한 연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음악 이야기 좀 안 한다고 해서 큰일 나지 않는다.

창밖을 보니 어둑한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 애와 조금 더 친해지기 위한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괜찮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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