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5화
나제즈다라는 이름의 사용인이 티 세트를 내왔다. 타티아나가 부탁한지 채 몇 분도 안 되어서였다. 저녁에도 이 빠른 일처리에 예카테리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커피와 홍차 등 여러 종류의 차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온종일 콩쿠르 때문에 지쳐 있는 몸에 카페인을 더 부어 넣고 싶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그녀에게 정신적 신체적 피로를 풀어 주고 푹 잘 수 있게 해 준다는 허브티를 타 주었다.
진짜 효능이 있는 건지, 아니면 플라시보 효과인진 모르겠지만 한 모금 마시자마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수면 유도제라도 탄 건가?
머리와 팔에 응축되어 있던 피로가 스르륵 전신으로 퍼지는 기분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졸려. 그냥 잠들어 버릴 것 같아.”
“음…… 짐이 언제쯤 도착할지 다시 한 번 물어볼까요?”
“아니야, 괜찮아.”
당장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라 빨리 짐이 도착해야 샤워를 하고 잘 수 있을 테지만, 예카테리나는 일단 티타임을 하자고 한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야기나 잔뜩 하고 싶은데? 나는.”
“저도 예카테리나와 하는 이야기라면 환영이에요.”
“그래? 그중에서도 어떤 거?”
“음…… 세미파이널에서 연주하실 곡이라든가…….”
아니나 다를까. 타티아나는 음악 이야기부터 꺼냈다. 진짜 나랑 할 이야기라면 그런 것밖에 없는 거야?
예카테리나는 일부러 샐쭉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건 어때.”
“다른 이야기요?”
“중앙음악학교엔 8학년 편입했다고 했었지? 그 전엔 어디에 다녔었어?”
만난 지 반년이나 되어서 묻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초대받기도 했고, 이제 서로 친구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예카테리나는 솔직히 타티아나라는 아이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었다.
베르체노프라는 대재벌의 딸인데도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고, 연주자로서의 이력 역시 무척 희박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것부터 던져 보았다.
타티아나는 기억을 되짚어 보는지 뺨을 만지작거리더니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일반 쉬꼴라에 다녔어요. 공부는 그럭저럭?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생각해요.”
“평범했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정말 평범했어요. 학교에 다닐 땐.”
“그래? 그럼 어쩌다가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거야?”
“글쎄요……. 무언가에 씌었다고 해야 하나요…… 아하하.”
뭐든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것만 같던 타티아나는 돌연 그렇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큰 상관은 없었다. 예카테리나도 지금은 피아노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있지만 막상 시작한 계기 같은 건 사실 잘 기억나지도 않으니까. 그냥 어릴 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배워 보니 잘 되기도 했고 콩쿠르에 나가서 상 몇 번 타 보니까 기분이 좋아서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멀리 보내 놓고, 예카테리나는 학교라는 주제로 방향을 틀었다.
“그럼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같은 애들은 편입 후에 사귄 애들이겠네?”
“예. 맞아요. 에르네스트나 리처드, 한승우도…….”
“리처드는 또 누구야?”
“유학생들이에요.”
“그럼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는 에르네스트?”
“다른 분들과도 친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말문이 턱 막힌다.
편입생의 학교생활이 듣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사실 정확하게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쪽이 컸는데 타티아나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관심 없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예카테리나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타티아나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귀찮다고 생각될지라도 지금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그 다른 애들 중에서 조금 더 마음에 든다거나, 그런 애 있어?”
“예?”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진짜로.”
“와.”
“아니면 공평하게 내가 먼저 할까?”
혹시나 타티아나가 차갑게 반응할까 싶어 예카테리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정말 예상외였다.
“와…… 평범한 이야기네요?”
“?”
조금 당혹스러웠다.
타티아나는 작게 탄성마저 내며 지금 흐르는 이 이야기 자체를 흥미롭게 여기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정확하게 알고, 순진하게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며 대하는 느낌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가 옆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평소엔 무슨 이야기들을 하냐고.
“평범한 이야기는 안 돼?”
“예? 아뇨, 아뇨…… 연애 이야기 하자는 것이잖아요?”
“혹시 집에서 금지라던가? 아까 너희 아버지…… 이런 말 미안하지만 엄해 보이시던데.”
“아하하, 글쎄요? 그런 금지에 대해 말씀하신 적은 없어요.”
예카테리나의 상상 밖에 있는 세계에 사는 아이니까 뭔가 무거운 규칙이라고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거는 것만으로도 혼이 날지도 모르고.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연애 금지 같은 건 영화 같은 데서나 나오는 재벌들의 이야기인가 보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밝은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희미해진 미소로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여쭐 생각도 들지 않았네요.”
“……정말 피아노밖에 모르고 살았어?”
“그것도 그렇지만요.”
계속 피아노만 치느라 연애 같은 건 잘 모르겠다.
딱히 납득이 안 가는 설명은 아니었다. 예카테리나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굉장히 많았으니까.
하지만 타티아나의 고민은 그냥 그렇게 피아노에 모든 걸 대충 맡겨 버리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사람의 고민이 아니었다. 그러면 모든 게 편해지겠지만, 타티아나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피아노를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곧 쓰게 웃었다.
“어쩌죠. 미안해요. 아마 예카테리나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정말? 난 네가 부러웠었는데.”
“부럽다니요?”
에르네스트와의 관계가 잠깐 노는 사이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또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며 쌓아 나가는 것 같아서. 그런 게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그렇게 말하는 대신, 예카테리나는 질문의 화살을 휙 돌려 타티아나에게 날렸다.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생각해?”
“……좋아해요.”
타티아나는 바로 대답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에 조금 어색해하고 있긴 하지만 평범한 이야기를 하자고 한 예카테리나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있는 그대로였다. 예카테리나는 이게 끝이 아니라 직감하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 다른 애들도 다 좋아한다고 할 거지?”
“그게 제 진심이니까요.”
예상 그대로였다. 그냥 모두가 다 좋다.
에르네스트의 태도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예카테리나는 그냥 이쯤에서 그만하려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곤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충 이 상황을 넘기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다. 기묘한 열기가 타티아나의 목 근처를 어른거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예카테리나가 물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애들 전부랑 사귀거나…… 그럴 순 없잖아?”
어린애나 할 법한 바보 같은 소리였지만, 타티아나는 이 또한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원하는 답을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좋아한다고 했잖아? 사귀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까진 안 드는 거야?”
“다른 마음이 들긴 해요. 어떠한 희망이겠죠.”
“뭔데?”
“대신 죽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어?”
예카테리나는 막 찻잔으로 뻗던 손을 우뚝 하고 멈췄다.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약간의 답답함과 거리감 등을 느끼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머릿속이 엉망으로 꼬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간신히 타티아나 쪽을 돌아보았다.
타티아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취소하진 않았다. 살짝 수습하려는지 덧붙일 뿐이다.
“아, 연주자로서 말하는 거예요.”
“그게 더 이해가 안 가는데?? 무슨 말이야?”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줄은 몰라서. 저도 모르게.”
당연히 이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특히 친구에겐 절대로 못 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대신 죽고 싶다는 이야기 같은 걸 들었다간 부담감에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예카테리나 역시 부담감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레 회피하는 쪽으로 생각이 미친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본 예카테리나는 지금 그랬다간 영원히 타티아나와 진지한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피어나는 당혹감을 최대한 추스르며 말했다.
“나라도 괜찮다면 들어 줄게.”
어두운 이야기에 예카테리나를 끌고 들어가도 되는지 고민하는 눈빛이 스쳐 지나간다. 타티아나는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게 그 자체로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한 번 괜찮다는 표시로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였고, 타티아나는 머뭇거리며 이야기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전 피아노 연주자로서 잘 해 나가고 있는 제 친구들이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고 있어요.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도 해요.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 등에 휘말릴지도 모른다고요. 그런 경우…… 많잖아요?”
그게 뭐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예카테리나는 학교에서 어느 날 돌연 사라져 버린 선배들을 몇 알고 있었다.
불행한 사고로 은퇴한 연주자들은 정말 많다. 그게 자기나 주변 사람이 아닐 거란 보장은 없었다.
타티아나는 그 불행이 주변에 닥칠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럴 때 제가 옆에 있어서 막아 주거나 대신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어요.”
“…….”
대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토록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귀거나 할 생각은 없는데, 만약 사고라도 마주한다면 대신 다치고 싶다고? 아니, 연주자로서 대신 죽고 싶다는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역으로 평범한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건가?
굉장히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체 친구들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고 묻기도 어려웠다.
타티아나는 대신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일종의 은유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연주자를 그만두고 싶어 하거나 죽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어느 순간 닥쳐올지도 모를 불행을 담담하게 마주하려는 사람의 태도였다.
예카테리나는 살면서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단어와 문장을 쥐어짜서 입을 열었다.
“어떤 걱정인지 나 조금은 알겠어……. 그건 연주자라면 누구나 어렴풋이 느끼는 원초적 공포 같은 거니까. 그런데 너처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그…… 혹시 누가 비슷한 일을 겪었어?”
가까운 연주자가 사고를 당했는데 그걸 막지 못해서 트라우마로 남았나? 그래서 후회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생각이었지만 달리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비슷해요.”
“그래도 뭔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진 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다 해서 막상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어떤 사고를 눈앞에 마주한다고 해서 항상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다. 사고란 늘 순식간에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막을 수 있는 상황이더라도 몸이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 몸을 지키려는 건 연주자를 넘어 인간으로서 당연한 본능이고, 자신에게 닥친 직접적인 불행이 아니라면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말하듯 입을 열었다.
“전 할 수 있어요.”
“타티아나.”
“……기쁠 거예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녀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냥 사춘기라 그런 거라고. 제정신 차리라고 한마디 강하게 쏘아붙이려던 예카테리나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쩜 저렇게 웃을 수 있지?
멍하니 바라보자 타티아나가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닦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평범한 이야기를 하자고 하셨는데…… 죄송해요. 그냥, 그걸 말로 하면…… 그럴 순 없었어요.”
누굴 좋아하느냐 하는 얘기 같은 걸 평범하다고 여기며 생각하고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걸 입 밖으로 내면 결정적일 때 족쇄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카테리나는 갑자기 그녀를 따라 울고 싶어졌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이렇게 큰 저택에 살면서?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면서. 나라면 그런 이상한 고민 안 해. 절대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타티아나가 이 정도로 아끼는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마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이런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걸 아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