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6화
언젠가 리처드가 해 주었던 이야기. 그리고 줄곧 고민해왔던 근본적인 질문. 난 왜 여기에 있는가.
그 모든 것에 대한 결론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연주자를 구하고 다시 기회를 얻은 내게 어떠한 사명이 있다면, 그건 내 음악을 완성하는 것보단 다른 연주자들을 위하는 일이리라.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도움을 주고, 구할 수 있는 불행이라면 구해 내고.
만약 내가 대신해야 하는…… 이제 빌렸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온다면 거기에 순응할 생각일 뿐이다.
“……이야기가 길었죠.”
물론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고, 두리번거리며 끝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런 암울한 생각으로 살아가면 검은 새가 된 그녀를 볼 면목이 없다.
부정적인 공포에서 비롯된 자포자기 따위가 아니다. 난 어느 때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차다. 내 결론은 부정에서 시작했을진 몰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리된다.
날 이곳에 보낸 누군가가 내게 기한을 정해 놓았다면 그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할 뿐이다. 친구들이 연주자로서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그렇게 도울 능력이 되려면 나 역시 높이를 경신해 나가야겠지.
만약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도록 이미 허락된 운명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늘 최선을 추구한 미래의 내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그건 현재의 최선에 닿아 있는 내가 알 수 없는 곳일 테니까.
때문에 난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내 개인적 욕망에 더 충실했고 억눌린 불안과 원망에 발목을 적시고 있었지만, 이젠 괜찮았다.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검은 새가 내게 맡긴 건 무겁기만 한 책임감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숭고함이었다.
거기에 뜻을 함께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다시 예고르에게 물어볼게요.”
“…….”
예카테리나는 말없이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겐 미안했다.
스스로 수없이 고민한 끝에 최대한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말로 꺼내거나 하지 않아서 머릿속에만 있었던 생각이기도 하고……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예카테리나가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상상도 안 간다. 지금 꺼내기엔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말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 버린 게 문제였다.
왜 눈물이 나왔는진 잘 모르겠다.
“타티아나.”
잠자코 있던 예카테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고 보다 고등 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입장에서 한마디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엿보였다. 그런 감정에 약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르카디 교수님이 가끔 네 이야길 하시곤 하거든? 뭐라고 하시는지 혹시 알아?”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예카테리나는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말을 내게 해 주었다.
“네가 음악원에 가게 될 때, 우리 피아노과로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이직을 해서라도 널 가르쳐 보고 싶다고 하셨어.”
“…….”
“그리고 넌 음악의 완성 다음엔 또 다른 완성이 있다는 걸 믿잖아? 그렇지?”
왔다 갔다 하는 목소리. 내가 한 이야기를 그녀가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예카테리나는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양되었는지 톡 쏘듯 말했다.
“그러니까 자꾸 무서운 생각 하지 말고, 피아노만 봐. 아니, 피아노만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가? 어떻게 할래?”
“아하하하.”
무서운 생각, 무서운 이야기는 안 하는 게 가장 좋죠.
나도 평소엔 어떻게 하면 피아노를 더 잘 연주할 수 있을지, 친구들과 만나 무엇을 하고 놀지, 내년엔 어떤 콩쿠르에 참가하고 또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면 어느 음악원으로 갈지. 그런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는 편이다.
단지 어떠한 결론이 내 마음 속에 정리가 되어 있을 뿐이다.
“괜찮을 거야. 타티아나. 다 괜찮더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예카테리나의 말이 파고들었다.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따뜻한 온기가 내 손 위를 덮었다. 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역시 연주자이니만큼 피아노를 내려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그게 얼마나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일인지도.
그 흔한 무거움을 예카테리나는 가뿐히 무시했다.
그건 잘 몰라서, 혹은 무뎌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잘 알고 용감하기에 할 수 있는 무시였다.
“…….”
난 예카테리나만큼 용감하진 못한 것 같다. 겪은 일과 놓인 상황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녀 역시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아봐 주고 있었다. 우린 손을 겹친 채 한참 동안 그렇게 있었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있어?”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있었다. 루슬란 오빠의 목소리였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역시 있구나.”
오빠는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예고르가 네게 짐 이야기를 하면 알 거라길래 전해 주러…….”
용건을 말하면서 내 쪽을 보던 루슬란 오빠는 곧 의아함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도 있지만, 당연히 아나스타샤일 거라 생각했던 친구가 다른 사람인 까닭이 제일 큰 것 같았다.
살짝 어색해지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예카테리나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라 해요. 실례하고 있어요.”
“아, 반갑습니다. 타티아나의 오빠인 루슬란입니다.”
송년 연주회 때 봤을 텐데 그것까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루슬란 오빠는 그냥 처음 보는 사람으로 예카테리나를 대했다.
예카테리나는 오빠가 문을 노크하며 불렀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나스타샤인 줄 알았나요?”
“타티아나의 친구로 가끔 이 집에 머무는 친구라면 그 애 정도여서.”
“그래요?”
“아나스타샤와도 아시는 사이입니까?”
“어떻게 말씀드릴까? 음, 오늘 만난 친구이긴 하죠.”
어떤 경유로 아나스타샤와 친해졌는지, 그리고 난 어떻게 알게 되었고 또 오늘은 어떻게 초대받았는지에 대해 예카테리나가 짧게 설명했다. 루슬란 오빠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물었다.
“아…… 콩쿠르 주최 측에서 제공한 호텔이 그 정도였습니까?”
“사실 다 똑같은 조건에서 지내는 거니까 불평하면 안 되는 거죠. 그래도 타티아나가 호의를 베푼 것이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감사라니요, 괜찮아요.”
그저 난 그녀가 콩쿠르에 집중하여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루슬란 오빠는 우리 둘을 바라보더니 곧 정중하게 말했다.
“저 역시 괜찮습니다. 예카테리나. 타티아나의 친구라면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베르체노프의 이름으로 친구를 환영하죠.”
“정말 고마워요.”
이미 예카테리나는 아버지에게 환영받기도 했지만, 루슬란 오빠와 인사를 주고받는 걸 조금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볼 땐 편히 말 걸어 주세요?”
“예카테리나도 부디.”
루슬란 오빠도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고, 곧 우릴 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반걸음 물러섰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루슬란도 좋은 밤 되세요.”
“타티아나도 잘 자렴.”
“예.”
고개를 끄덕이자 오빠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나갔다.
발소리가 채 멀어지기도 전에 예카테리나가 내 팔을 휙 낚아챘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녀가 빠르게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상에, 와. 나 살면서 저렇게 젠틀한 사람 처음 봤어! 타티아나! 저런 오빠랑 살면 어떤 기분이야?”
“…….”
루슬란 오빠는 평소에도 점잖은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은 좀 더 무게감 있었다. 예카테리나에겐 그런 모습이 굉장히 좋게 비친 모양이다.
방금은 다 내숭이었다고 할 수도 없고…… 난 그냥 평소에도 잘 해 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드레스를 입은 채 연습실에서 루슬란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기억 속에 있는 추억 등을 좋은 것만 꺼내어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안 좋았던 이야기는 나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까, 이 정도로 괜찮으리라.
***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기지개를 켜면서 앞으로 쭉 스트레칭을 하니 남아 있던 잠기운이 빠져나간다.
“…….”
난 간밤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예카테리나와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다가 씻으러 갔었지. 그녀는 욕조의 크기를 보고도 놀라워했고 마음껏 목욕을 할 수 있음엔 행복해했다. 호텔에서처럼 샤워만 할 수 있길 바랐던 것 같은데, 그보단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연주가 끝난 뒤에 목욕을 할 수 있는 건 피로 회복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목욕을 하고 나온 그녀와 따뜻한 코코아를 함께 마시곤, 따로 준비한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나스타샤가 종종 놀러오면 그러는 것처럼 같이 자도 되겠지만, 예카테리나가 콩쿠르 준비를 조금이라도 편한 환경에서 하기 위해선 개인실을 내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예카테리나도 그걸 좋아하는 것 같았고.
“……우음.”
예카테리나는 일어나 있으려나?
오늘 일정에 대해 정해진 건 없지만, 별일 없다면 아마 예카테리나와 계속 있지 않을까 싶다. 연습을 도와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도와주고, 컨디션 조절도 잘 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그녀의 단기 매니저가 된 느낌이었다. 즐거운 기분이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아침식사였다. 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곧장 식당 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계속 함께 있을 거라면 아침 정도는 내가 한 번 만들어 주고 싶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드미트리.”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드미트리는 이미 재료들을 다듬고 있었다.
요 근래 잠이 부쩍 늘어서 요리 실습은 저녁에 가끔 함께하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아침에 이렇게 재료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내가 부엌에 기웃거리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드미트리가 웃으며 물었다.
“친구분에게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으신 것 같군요?”
“이야기 들으셨나요?”
“물론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이미 이야기는 들은 모양이다. 초대된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것 또한 셰프의 일이니 미리 누군지 알아두는 게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드미트리와 나 사이엔 이미 어느 정도 약속된 프로세스가 있었다. 난 자연스럽게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예, 그렇다면…… 크림 스프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이젠 딱 이름만 들어도 어떤 레시피를 써야 하는지 알겠다.
난 드미트리에게 배웠던 그대로 재료들을 꺼내 왔다. 버터와 밀가루를 볶아 루를 만들고 거기에 우유와 다른 재료들을 넣어 만들면 된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요리를 하면서도 틈틈이 내 쪽을 보면서 무언가 조언해 줄 것이 없나 살피는 것 같았지만, 스프가 완성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완성이 되고, 맛을 본 다음에야 그는 짧게 칭찬해 주었다. 난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식당에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나왔고, 곧이어 예카테리나도 쭈뼛거리며 모습을 보였다.
자고 일어나니까 뭔가 굉장히 어색해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을 발견한 루슬란 오빠가 먼저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이리 와서 앉아. 예카테리나.”
“……!”
어제 말했던 것처럼 편하게 부르는 말에 예카테리나도 화색을 띠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유리 아저씨, 루슬란.”
“지난밤은 편안했고?”
“예, 덕분에요.”
화기애애한 대화가 들려온다. 그런데 곧 의아해하는 목소리도 섞였다.
“타티아나는요……? 제가 데리러 갈까요?”
조심스러운 어투였다. 아마 내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웃음을 참으며 준비된 트레이를 끌고 나갔다.
“타티아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카테리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난 테이블 위로 접시들을 올리며 말했다.
“저 요리를 종종 하기도 해요. 오늘은 예카테리나에게 해 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예카테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고, 나도 앞치마를 풀고는 예카테리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의 식전기도가 짧게 울려 퍼지고, 모두가 식기를 들었다.
샐러드를 한 입 문 예카테리나가 미처 다 씹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했다니까 그런지 맛있는 것 같아. 타티아나.”
“…….”
내가 한 건 수프뿐이었지만 오해를 살 법하게 말한 탓이었다. 난 일단 식사가 끝날 때까진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