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7화
아침에 눈을 뜬 예카테리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목욕탕도 침실도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인지, 몸의 피로는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분명 이 폭신한 이불 덕분이야. 예카테리나는 한동안 더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느슨하게 풀어지는 느낌을 만끽하다가, 스프링처럼 일어났다.
“…….”
원래 배정받은 호텔방이었다면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늘어지게 자다가 누가 보든 말든 대충 씻고 연습실로 갔을 테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주위를 보니 1박에 천 유로 가까이 하는 고급 호텔들보다도 훨씬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지금 베르체노프가의 저택에 손님으로 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고, 늘어져 있던 마음에 살짝 긴장감을 집어넣었다.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녀는 단정하게 스스로를 정돈했다. 화장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엉망인 모습은 안 된다.
그렇게 방과 욕실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복도에서 그 모습을 본 사용인 한 명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냈다.
“일어나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예카테리나 아가씨.”
“아…… 예. 좋은 아침이에요.”
가볍게 인사를 받자 그녀가 이어 물었다.
“아침 식사 의향을 여쭙겠습니다. 어떠신지요?”
자고 있었다면 또 모를까, 일어났는데 식사를 거를 생각은 없었다. 배고프기도 하고.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기 전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다.
“식사는 어디서 하나요?”
“별일이 없는 한 손님으로서 식당에서 타티아나 아가씨와 함께 하셨으면 합니다. 유리 님도 함께 하시고요.”
역시나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니 큰 동요는 일지 않았다.
예카테리나는 베르체노프가의 식사에 참가하겠다고 답한 뒤, 시간을 듣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나, 이상해 보이진 않겠지?
아침 식사로 올라올지 모르는 미지의 요리들을 생각하며 예카테리나는 식사 예법 등을 돌이켜보았다.
지나친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예카테리나는 아무 기대도 대비도 안하고 있다가 우왕좌왕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준비는 늘 모자란 것보단 넘치는 게 낫다.
기왕에 초대받았으니 우아하게 태연한 척도 잘 해야지 좋게 보이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안다면 타티아나는 황당해하면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리겠지만, 이미 베르체노프가의 아침 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예카테리나에게 있어서 면접 심사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큰 저택의 셰프가 어떤 요리를 할지 기대되기도 하고.
그렇게 기대 반 긴장 반으로 식당으로 향한 예카테리나는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한 타티아나를 보곤 기절할 듯 놀랐다.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예카테리나를 위해 요리를 해 왔다는 타티아나는 곧 앞치마를 풀곤 그녀의 옆에 앉아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수프를 맛본 루슬란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구나?”
“예. 조금 크리미하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말씀하셨죠. 그래서 이번엔 그렇게 해 봤어요.”
“제대로 된 것 같아. 정말 좋네.”
보아하니 이미 몇 번이나 타티아나가 요리를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루슬란의 취향에 맞추어 요리를 하려는 타티아나를 보며 예카테리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야? 이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남매는?
부럽다고 해야 할지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기분에 빠진 예카테리나가 무념무상으로 스푼만 놀리고 있는데, 가만히 있던 유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슬란. 넌 네 동생에게 토스트 하나도 만들어 줘 본 적 없으면서 그렇게 주문만 하느냐?”
꽤 나무라는 투였다. 유리가 보기엔 루슬란의 행동이 조금 일방적이었던 모양이다.
타티아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괜찮다는 표정이었지만, 루슬란은 예카테리나도 있는 자리에서 오해받는 건 싫은지 항변했다.
“주문이 아니라…… 일류가 되려면 피드백이 필요하다고 했던 건 타티아나였는데요?”
“뭐?”
순간 유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낮게 되물었다.
피드백을 원한 게 실제로 타티아나였을진 모르겠지만, 지금 저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건 예카테리나도 알 정도였다.
유리는 고개를 들더니 루슬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좋은 말이구나. 난 루슬란 너 역시 일류가 되길 바란다.”
“예?”
“식사 후에 따라와라. 네가 저번에 보낸 지메르칸 건 보고서에 대해 해 줄 말이 많으니.”
“아니, 아버지…… 잠깐만…….”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
루슬란은 자신의 혀를 저주하는 것 같은 표정으론 말없이 스푼만 움직였다. 대체 어떤 피드백이 그에게 향할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걱정과는 반대로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예카테리나는 있는 힘껏 모른 척하며 테이블 정중앙만을 바라보았다. 실수로라도 루슬란 쪽을 보면 웃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게 손님으로서 얼마나 실례되는 행동일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안다.
그렇게 필사의 노력을 하는 예카테리나에게 타티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요. 예카테리나.”
“…….”
“웃으면 오빠가 삐칠지도 몰라요.”
“픕.”
설마 타티아나가 직설적으로 삐친다는 단어를 쓸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예카테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뿜었다. 무언가 입에 넣고 있었다간 큰일 날 뻔했다.
“타티아나.”
“들렸나요? 죄송해요. 들리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니…….”
루슬란은 놀리지 말라 말하고 싶은 듯했으나 곧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을 붙여 봐야 타티아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고, 저편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유리에게 더더욱 혼쭐이 날 것이란 사실만 명백했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맛있는 음식으로 현실을 잊으려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
예카테리나는 베르체노프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조금 더 긴장을 풀어놓았다.
예상했던 호화스러움이나 복잡한 예의 등은 없었다. 대신 화목함과 정성이 느껴지는 요리들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의 옆모습을 살짝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는 그녀는, 이 따뜻한 분위기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 루슬란이 유리에게 끌려가고, 타티아나는 티타임을 권했다.
저택 밖의 티가든에서 푸른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시간은 평소 늘 무언가에 쫓기듯 시간을 쪼개어 사용했던 예카테리나에게 느긋한 휴식 시간이 되어 주었다.
멍하니 찻잔을 기울이던 예카테리나가 물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 요리는 언제부터 배운 거야?”
“작년부터예요.”
타티아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예카테리나는 그녀가 피아노도 배운 지 얼마 안 되어서 엄청난 수준에 이르렀음을 다시 떠올렸다. 타티아나는 기본적으로 센스나 재주가 굉장히 뛰어나긴 한 것 같다.
자신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던 예카테리나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웃으며 말했다.
“난 뭔가 해 보려고 하면 엄마가 칼 쓰는 건 절대 하지 말라고 말…….”
막 이야기하던 그녀는 순간 꺼낼 필요 없는 주제를 괜히 말한 것 같단 직감을 느꼈다. 어떻게 이야기해도 말실수가 될 것 같았다. 심지어 두 개나.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타티아나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라도 있을 수 있었기에 조심스러워해야 할 주제였다.
그리고 칼을 쓰는 게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어젯밤 타티아나가 담담하게 말하던 목소리를 생각하면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생각 없이 입을 연 것에 후회하며 예카테리나가 수습하려는데, 타티아나는 의연하게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조심해서 다루면 괜찮아요.”
“다쳐 본 적은 없는 거지?”
“예.”
“괜찮아……?”
굳이 이어 물어볼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예카테리나는 충동을 멈추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내면에 품고 있는 불안감이나 단호함 등에 대해 예카테리나의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 가기만 했다.
그런데 어젯밤 타티아나는 특별한 감상에 젖어 있었던 것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별로 특이할 것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는 괜찮을 거란 확신이 있어요. 피아노를 하기 전부터 약간 흥미가 있었던 분야라서.”
“피아노보다 전에?”
“제 기억으로는 그래요. 그러니 괜찮겠죠.”
뭔가 모호하면서도 강력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뭔가 머릿속에 맴도는 궁금증은 많은데, 뭔가 말로 꺼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곤 적어도 스스로 정리를 한 뒤에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 차와 과자로 이야기의 흐름을 옮겼다.
“응. 나도 배워 보고 싶어. 사실 이런 과자들은 어떻게 만드는가 궁금하기도 하고.”
“제과나 제빵은 아직 잘 못하지만…… 다음에 같이 해 보시겠어요?”
“어? 정말?”
“정말이죠.”
타티아나는 짧게 웃으며 약속한다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가 결코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 예카테리나는 일단 이 콩쿠르가 끝나고 나서도 언제든 그녀가 친구로서 초대하리란 걸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티타임 후엔 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
“왕.”
어느샌가 다가온 커다란 개, 벨카가 타티아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뭔가 구체적으로 보채거나 하진 않지만 타티아나가 손을 뻗자 머리를 들이밀고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예카테리나는 개를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지금 벨카가 산책하자는 의사표현 중이라는 걸 느꼈다. 타티아나 역시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벨카가 걷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7월의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이런 날씨라면 몇 시간이고 돌아다녀도 기분 좋을 것 같았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냉방이 안 되는 그레이트홀에서 땀을 흘리던 생각을 하면 이런 천국이 없었다.
천천히 앞장서 걷는 벨카를 따라간다. 타티아나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가 문득 저편에 있는 꽃들이 궁금해서 시선을 던지면 마치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벨카가 그 방향으로 산책로를 돌렸다.
개를 산책시키는 게 아니라 전문 안내원에게 베르체노프가의 정원을 안내받는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똑똑하면 눈을 감고도 믿고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걸으면서 산책을 하니 곧 처음 출발했던 티가든이 저편에 보였다.
타티아나는 슬슬 이쯤하면 되었다는 듯 말했다.
“이만 가서 쉬세요. 벨카.”
“왕.”
타티아나가 말했고, 벨카는 군소리 없이 휙 몸을 돌리더니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 버렸다. 예카테리나는 조금 당황해서 멈춰 섰다.
“어디로 보낸 거야?”
“벨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
자유롭게 키우는구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벨카는 산책을 하자고 와서 어슬렁거렸을 뿐이니까…….
그런데 예카테리나의 눈빛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타티아나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쉴 수 없어요.”
“……응?”
“연습실에 데려다 드릴게요. 예카테리나.”
어떻게 초대받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베르체노프가에서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절대 본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정작 콩쿠르 참가자 본인인 예카테리나는 자신이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서 고개를 흔들곤 그녀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전날 밤에도 썼었던 별관 연습실이었다.
타티아나는 조명과 에어컨을 켜고는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피아노는 그대로 쓰시면 되어요. 에어컨 온도는 여기서 조절하시고…… 혹시 레퍼런스가 될 음악을 듣고 싶으시다면 이 플레이어를 쓰세요. 음반이나 악보는 저쪽 책장에.”
“정말 빌려주는 거야?”
“물론이죠. 연습을 제대로 못 하시면 안 되잖아요?”
그도 그렇지만…… 타티아나가 제공한 환경은 너무나도 훌륭해서 덥석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어딘가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타티아나는 괜찮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틀 정도겠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도와 드리겠어요.”
“고마워. 타티아나.”
예카테리나는 단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정말 오로지 연주자로서 지원하는 것만 생각하는지 설명해 줄 것들을 설명하고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방해되지 않도록 이만 나가 볼게요.”
혹시 같이 있으면서 옆에서 듣고 뭔가 피드백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타티아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예카테리나는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연습 힘내세요.”
곧 연습실 문이 닫히고, 연주자를 위한 완벽한 이 공간엔 오로지 예카테리나만이 남았다.
세미파이널에 올릴 곡들은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었지만, 예카테리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타티아나의 음반과 악보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
수천 개는 되어 보일 음악의 기록들은 한 사람이 소화하기엔 너무나 거대해 보였다. 예카테리나는 이 엄청난 양을 보면서 타티아나가 얼마나 음악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또한 피아니스트 타티아나의 존재감의 일면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장난하고 있지 않았고, 그 무엇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누구보다 음악에 진지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무언가에 순응하듯 말할 수가 있지.
타티아나는 성실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다. 어떠한 집념과 수용이 공존하고, 그 깊이를 모를 헌신이 마치 신념처럼 자리 잡고 있다.
예카테리나는 그녀의 절반이나 알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연습이나 할까…….”
일단 예카테리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는 이렇게까지 준비해 준 타티아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