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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98화 (598/1,277)

##  598화

예카테리나에게 연습실을 넘겨준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

평소 같았으면 지금 시간은 나도 오전 연습에 매진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에게 연습실을 주고 나니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다른 분들이 일하시는데 응접실의 피아노를 쓸 수도 없었고.

아마 며칠간은 계속 이래야겠지.

그래도 멍하니 있거나 도로 자버릴 순 없었다. 몇 시간 정도 뭘 할까 싶어 고민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뭐하는 중이야? 타티아나.]

안 그래도 그걸 고민 중인데, 그렇다고 서성이고 있다고 답할 순 없어서 재빨리 정했다.

[책을 읽을까 해서요.]

[책? 피아노는 예카테리나가 치는 중?]

[예.]

[그렇구나.]

애초에 예카테리나의 연습이 우선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수긍하더니 이어 메시지를 보내 묻는다.

[연습하는 거 봐 주거나 하진 않으려고?]

사실 그럴 생각도 있었다.

함께 연습하는 건 좋은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이틀밖에 시간이 안 남았으니 이미 갖춰진 해석을 흔들 정도로 과한 의견을 내면 절대 안 되고, 가볍게 짚어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아니면 그냥 가만히 견학하고만 있어도 되고.

예카테리나라는 피아노 연주자의 음악은 듣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부분이 많았으니 콩쿠르를 앞두고 준비하는 모습을 견학하는 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종종 시선마저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난 아직 예카테리나가 콩쿠르를 앞두고 어떤 방식으로 준비하는 걸 선호할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애초에 내가 그녀를 호텔에서 데려온 것도 첫 라운드 때 방해를 많이 받았다는 하소연 때문이었고.

그래서 난 그녀의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방해하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왜 그러시나요?]

아나스타샤는 잠시 답장이 없더니 손을 흔드는 토끼의 이모티콘을 보내오며 답장을 보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럼 나도 방해하지 않을게.]

[전 한가한걸요.]

[한가하면 한가한 대로.]

아나스타샤는 장난으로라도 놀러온다거나, 아니면 놀러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나 역시 예카테리나가 무대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연습실을 빌려줬다고 해서 내 할 일은 이제 끝났다는 식으로 마음대로 놀러다니거나 할 순 없었다.

불편하지 않게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주위에서 내가 할 일을 할 뿐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봐야 책을 읽는 것 정도였지만.

“…….”

난 스마트폰으로 바흐의 음악을 틀어놓고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의 ‘아르세니예프의 생’이라는 소설이었다.

부닌은 1870년생으로 이 소설로 러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기도 했다. 사실 그 명성 때문에 일종의 문학 공부의 일환으로 읽게 되었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도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떠한 사건의 전개 없이, 심지어 시간의 흐름도 잘 느껴지지 않는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생과 운명 그리고 삶과 죽음을 건조하게 이야기한다.

난 그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갔다.

“……으응.”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니 독서를 시작한 지 2시간쯤 지난 시간이었다. 난 창 밖으로 보이는 별관을 일견했다. 예카테리나는 얼마나 했을까?

일단 슬슬 점심때이기도 하고, 살짝 가서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

발뒤꿈치를 떼고 살금살금 걸어 별관 연습실 앞에 다다랐다. 그 안에선 피아노 소리가 연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한 프레이즈가 몇 번 반복되는 걸 보니 완벽하게 연습하려는 모양이다.

난 연습이 멎으면 노크를 할 생각으로 조용히 문 옆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피아노 소리가 그치고, 잠깐 숨을 고르기도 전에 갑자기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 대응을 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

“악!”

움찔하며 예카테리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진짜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발소리를 듣자마자 자리를 피하거나 먼저 노크로 내가 있음을 알릴 생각이 들긴 했지만, 미처 행동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까, 까, 깜짝 놀랐잖아!”

“저도 놀랐어요…….”

“후…….”

심호흡을 한 예카테리나는 손으로 문가를 짚고 서선 날 바라본다. 난 뭔가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서 있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왜 그러고 있어? 유령인 줄 알았…….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대체?”

“방금 왔어요.”

“왔으면 이야기를 하지.”

“연습에 방해가 되잖아요.”

도저히 내 말을 안 믿는 듯 가늘게 뜨고 있던 그녀의 눈이 방해라는 단어엔 휘둥그레졌다.

“방해는 무슨 방해야? 도움이 되면 모를까.”

빠르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흔들더니 내게 말했다.

“아……. 가지 말고 잠깐 앉아 있어. 세수하고 올게.”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나온 건 세수하러 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연습실로 들어섰다.

항상 오는 내 연습실인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예카테리나가 쓰고 있어서 그런 걸까?

피아노로 다가갔다. 보면대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이미 그녀에겐 악보가 딱히 필요하진 않은 것 같았다.

난 괜히 건반을 누르지 않고 그냥 음악을 들을 때 앉는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예카테리나가 돌아왔다. 그녀는 가만 앉아 있는 날 보더니 오묘한 눈빛을 했다.

난 웃으며 물었다.

“연습은 어떠신가요?”

사실 다음 무대를 앞두고 있는 연주자에게 지금 할 만한 질문이라곤 이것 밖에 없었다. 예카테리나가 손목을 흔들거리며 답했다.

“잘 되고 있어. 어차피 마지막 디테일 다듬는 중이기도 하고.”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요?”

“당연히 없지. 이렇게 좋은 연습실인데?”

혹시나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카테리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빠르게 말했다. 어쩐지 직접 칭찬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예카테리나는 오전 시간을 연습에 잘 쓴 것 같았다. 이대로 마음에 들 때까지 연습하게 둘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갑자기 찾아온 용건을 전했다.

“다행이에요.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저희끼리 먹어야 하는데…….”

“아, 유리 아저씨는 출근하셨어?”

“예.”

“사실 그렇게 생각 없는데…….”

지금 저택엔 고용인 분들과 우리 둘뿐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아무거나 괜찮은데, 예카테리나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연습을 하다 보니 그렇게까지 식욕은 없는 모양이다.

사실 이해는 간다. 하지만 식사를 거르면 전반적인 집중력과 퍼포먼스가 떨어진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연습은 효율도 안 좋거니와 실전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약간의 매니지먼트를 할 작정을 하고 있는 나는 그녀의 컨디션 관리도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시다면 가볍게 드실 수 있게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올게요.”

“응?”

내 말에 예카테리나는 놀라며 되묻더니 내가 일어서자 뒤늦게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잠깐만! 나도, 나도 갈게. 타티아나.”

갑자기요? 난 그녀와 피아노를 번갈아 보다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연습하셔야죠.”

“물론 그렇긴 한데! 쉴 시간도 필요하잖아.”

“그럼 쉬고 계세요. 제가…….”

“그냥 같이 하면 안 돼? 아깐 과자 만드는 것도 같이 하자고 했었으면서…….”

무언가 큰 실수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카테리나는 부탁하는 사람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심심해서 혹은 콩쿠르에 대한 압박을 피하기 위한 도피성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살짝 반성했다. 벨카와 산책을 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난 예카테리나가 이 연습실에 들어선 이후로 거의 속세와 차단되어야 한다는 것마냥 굴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은 생각하지도 않고.

난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예카테리나. 제가 콩쿠르에만 신경이 쓰여서…….”

“네 콩쿠르도 아닌데?”

“아하하, 맞네요. 제 콩쿠르는 아니죠.”

예카테리나가 준비를 잘 해서 수상한다면 내게 감사를 표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진짜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예카테리나의 음악에 깃든 가치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고, 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라는 커다란 콩쿠르에서 커리어를 얻는다면 그녀가 장차 클래식 세계의 전반에 걸쳐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난 음악에 목숨을 걸고 있지만, 그건 비단 내가 직접 무언가를 이루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음악가를 도움으로서 이룰 수 있는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재능과 가능성이란 그런 것일 테니.

그냥 개인적인 감사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평범하단 생각은 한다. 괜히 멀고 큰 가치 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쓸데없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난 예카테리나는 물론이고 다른 친구들을 볼 때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그래도…… 최선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어서요.”

가감 없이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항상 의무감이 날 하여금 무너지지 못하도록 해 주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향하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 향하기도 한다. 내가 가진 것들의 사용처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어떠한 믿음.

“그런 강박은 가질 필요 없는데…….”

“전 그런…….”

예카테리나는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내겐 그런 의무감이 필요하다고 하려고 했다가, 순간 그녀의 말을 뒤늦게 알아듣곤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무와 강박관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공부가 헛되지 않아 두 단어가 전혀 다르다는 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난 그녀가 다른 단어를 말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고, 때문에 의심의 화살은 이미 스스로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다른 누군가에게 답을 물어볼 수 없는지라 그간 혼자 정립해 나갔던 것들. 논리학, 철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다시 한 번 뒤죽박죽 섞인다.

혼란스러워하는 날 보던 예카테리나는 아차 싶었는지 내 눈을 피하더니, 이번엔 내 손을 붙잡았다. 강인한 연주자의 에너지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물론 네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맞아. 우리 아르카디 교수님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너랑 똑같은 이야기 했을걸? 아마가 아니라 분명히.”

선생님 같다는 말. 난 이전에도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예카테리나는 그저 그런 이야기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린 친구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난 지금 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어. 정말로.”

“…….”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의무감이 없는 친구로서의 난 어떻지? 순간 불안감이 찾아든다.

하지만 곧 안도할 수 있었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난 분명 어느 상황에서든 예카테리나가 곤란해했다면 똑같이 했을 테다.

짧은 상념이 스쳐 지나가고,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온몸을 휘감고 있던 무언가를 떨쳐 냈다. 예카테리나를 기쁘게 초대하면서도 계속 느끼고 있었던 어떠한 긴장감의 일종이었다.

약간 더 편안해진 기분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네가? 왜?”

“그냥요.”

예카테리나와 친해지는 과정에서 할 수 있었던 대화에선 이미 너무나 친해져 버린 다른 친구들에겐 미처 하지 못했을 내용이나, 듣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있었다.

난 어리둥절해하는 예카테리나를 이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드미트리는 함께 온 우리를 보자마자 뭘 만들 것인지 물어보더니 필요한 재료들만 꺼내 주고는 잠깐 쉬겠다며 가 버렸다.

셰프가 가 버린 것이 예카테리나는 조금 충격인 듯했지만, 당황해할 것 없었다. 드미트리가 없는 부엌의 2인자는 바로 나였으니까.

난 앞장서서 샌드위치를 만들 재료들을 다듬으며 예카테리나에게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일들을 맡겼다. 그녀는 처음엔 약간 허둥지둥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서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타티아나, 이 민트도 넣어 보면 어떨까?”

“…….”

알아서 드시고 싶은 걸 넣는 건 좋지만 제 거엔 넣지 말아 주세요. 예카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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