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9화
우린 함께 만든 샌드위치를 가지고 티가든으로 나왔다. 햇빛도 따뜻한데 바람도 잘 부는, 너무 좋은 날씨였다. 정원에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처럼 즐겨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시간이 들기에 간단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거의 다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일 늦은 밤 있을 첫 라운드 결과에 대해선 일단 통과했다 생각하고 세미파이널에 대한 내용만 주를 이룬다.
예카테리나는 오전에 연습했던 곡들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피아노를 두고 말로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따가 연습도 같이 해도 돼?”
“그래도 되나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당연한 걸 묻니? 애초에 난 널 따라올 때 가장 바랐던 게 너랑 연습하는 거였는데?”
“정말이신가요?”
“나도 피드백이 필요해. 진짜로.”
아침에 루슬란 오빠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도 일류가 되고 싶겠지. 물론.
난 그녀에게 그렇다면 말을 하지 그랬냐고 되묻진 못했다. 내가 그녀를 연습실에 데려다주고는 곧장 나와 버렸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저도 예카테리나의 연주가 듣고 싶었어요.”
“……다행이네 내 연습은 별로 관심도 없는 줄 알았잖아.”
“그럴 리가요? 오해예요.”
예카테리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직설적인 말은 약간의 곤란함을 가지고 오는 느낌이었다. 곤란함을 확 치워 버리는 느낌의 아나스타샤의 직설적인 어투와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편이었다.
난 예카테리나의 이런 스스럼없는 성격도 좋아했다. 가볍게 농담을 받아 주며 이야기했다.
“저도 오전엔 혼자서 독서하고 있었어요.”
“심심했지?”
“예.”
사실 아르세니예프의 생은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긴 했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를 꺼내자면 그 소설이 다루는 심각한 주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난 그런 건 바라지 않았기에 대충 넘기면서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따로 준비한 게 없으니 식후 정리도 간단했다. 난 예카테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갈까요.”
“응.”
연습실로 돌아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예카테리나는 피아노 앞에, 그리고 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음악 감상용 의자에.
내가 나가지 않고 앉은 것을 확인한 예카테리나는 손목을 스트레칭하면서 고개를 기울이고, 연주자가 될 준비를 하며 말했다.
“일단 준비한 거 한 곡씩 쳐 볼게. 어떤지 한 번 들어 봐 줘.”
“예.”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편하게 연주하라느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난 분명히 이 공간에 존재하고, 예카테리나는 내 시선과 호흡을 곧 청중의 그것으로 느낀다.
지금 그녀의 태도를 보면 굉장히 진지했다. 어쩌면 청중이 아니라 심사위원이라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멍하니 있다가 멍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집중해서 감상하고 되도록 도움이 될 평을 해 주는 것이다.
단순하고 당연히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쉽지만은 않다. 나 역시 이 연습실에서 이루어지는 연주를 실전이라 생각하며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방적인 평으로 연주자를 혼란스럽게 해서도 안 된다. 그냥 듣고 내 마음대로 이야기할 게 아니라, 그녀가 지도 교수님인 아르카디 교수님과 쌓아올렸을 해석에 기틀을 두고 어쩌면 그 해석의 디테일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들만 정확하게 봐야 한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어떤 평을 해도 소화해 낼 시간이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그녀의 도움이 되려면 최대한 지금 형태의 완성도만 끌어올릴 방향을 찾아내야 한다.
“…….”
건반을 내려다보던 예카테리나는 곧 손을 들어올리고, 세미파이널에서 연주해야 하는 곡 중 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난 뇌리에 있는 다른 해석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 두었다. 그리고 순수한 음악만 놓고 분석할 수 있도록 온 신경을 기울였다.
전신을 울리는 소리가 차곡차곡 그 형태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나로 결집된 소리는 정말 뛰어난 음악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카테리나가 날 돌아보았다.
난 곧바로 입을 열지 않고 잠시 생각하며 단어를 골랐다. 하지만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한 가지였다.
“……아르카디 교수님에게 한 번쯤 레슨을 받아 보고 싶어지네요.”
“교수님이 정말 좋아하실 이야기네.”
“좋았어요.”
이전에도 몇 번 예카테리나의 연주를 들으면서 아르카디 교수님의 스타일이 어떤지 어느 정도 감을 잡긴 했지만, 이 음악은 그 아카데믹함이 정말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모스크바 음악원 특유의 풍취라고 할 수도 있는 그 강렬한 다이내믹. 그것을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예카테리나가 선보이는 탁월함. 난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예카테리나는 약간 주저하면서도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난 손뼉을 치면서도 생각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전했다.
“그런데 혹시…… 교수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진 않으셨나요?”
“응?”
내가 옆으로 가자 자연스럽게 예카테리나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녀의 키에 맞춘 피아노 의자는 내겐 약간 안 맞는다. 하지만 길게 연주할 것도 아니기에 별 신경 쓰지 않고 난 건반을 터치했다.
딱히 내 해석이 담긴 연주는 아니었다. 예카테리나를 따라서 그녀가 했던 모든 아티큘레이션 등을 기억하고 연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이 음악 전체가 띠고 있는 주제와 색에 맞추어 균형을 유지하며 한 소절을 연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몇 초 안 되는 짧은 연주를 마치고 손을 놓으니 예카테리나가 기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안 거야?”
“이전까지의, 그리고 이후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읽어 냈어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아.”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듯 부정했다. 하지만 난 간단히 답했다.
“그만큼 예카테리나께서 또렷하고 의미 있는 연주를 해 주셨으니까요.”
“…….”
테크닉적인 흠결이 있다면 연주를 듣다가 어색한 부분을 짚어 내는 건 무척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처럼 테크닉적으론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듣는다면 디테일을 잘 들어야 하는데, 그건 쉽지 않다. 연주자가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쏟지 못한다면 음악의 형태 자체가 붕 떠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의 음악은 굉장히 견고한 형태를 하고 있었고, 때문에 완성이 덜 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부분을 고르는 것도 수월했다.
예카테리나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그간 어떻게 감상을 했었는지 떠올렸는지 납득하는 표정을 짓더니, 내 옆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좁은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옆을 보니 그녀의 얼굴이 가깝다. 예카테리나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어붙이면 좋을까? 나도 계속 고민이었던 부분이었거든. 도와줄래? 응?”
잔뜩 들뜬 그녀를 보니 진작 이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조금 더 신경 써서, 그녀와 음악을 주고받았다.
***
우리는 이틀 내내 거의 함께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다른 콩쿠르 참가자들의 연주 실황 영상을 보기도 하고, 컨디션을 최고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허투로 하지 않았다. 난 예카테리나에게 알렉산더 테크닉과 같은 요령들을 가르쳐 주었고, 반대로 그녀는 내게 요가가 좋다며 알려 주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대부분의 시간은 역시 피아노에 쏟아부었다.
그 덕분인지 예카테리나의 거의 완성되어 있던 곡들은 보다 더 자신 있는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해 준 피드백은 극히 사소한 것들에 불과했지만, 예카테리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음악가였다.
“타티아나.”
예카테리나는 건반에서 손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이 곡들 준비한 게 1년 가까이 되었거든?”
“예.”
“그런데 앞서 반년은 열심히 준비하면서 곡도 쑥쑥 커 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 뒤의 반년은 솔직히 계속 했던 것 또 하는 느낌이었단 말야?”
“늘 그런 법이죠.”
연주자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한 곡을 무대에 올릴 수준에 올리기까지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처음에 곡을 읽고 손가락을 움직여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까진 그래도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금방 되는 기분이 들지만, 그 뒤로 완성도를 높여 나가는 과정은 정말 긴 연구와 연습을 필요로 했다.
어쩔 땐 천장에 닿지 않는 로그함수 그래프의 모습처럼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너랑 같이 한 이 이틀간 그 지체되는 느낌을 완벽히 없애 버린 것 같아.”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곡의 완성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특정한 계기로 빠르게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예카테리나는 이미 이틀 사이에 곡을 몇 번이나 완성했다. 완성한 곡을 다시 뛰어넘어 완성하고. 또다시 그것을 깨뜨리고 완성했다.
끝을 모르고 완성을 덧씌우며 나아가는 음악. 난 그 과정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저도 이틀간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예카테리나는 킥킥 웃으며 의자 밑으로 다리를 흔들거렸다. 하지만 곧 살짝 불안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데 이 이틀이 그냥 공부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제 중요한데.”
오늘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첫 라운드 세 번째 날로, 각 부문의 참가자들이 모두 한 번씩 자신의 무대를 보이고 난 뒤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피아노는 총 25명 중 절반 정도만 세미파이널로 올라갈 수 있다.
중간중간 우리는 다른 연주자들의 실황 연주를 보기도 했는데, 그중엔 정말 잘 하는 연주자들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실력이 많이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예카테리나의 실력이라면 파이널까진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진출을 확신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하게 떨어져 버리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 또한 안다.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어떨진 받아 봐야 아는 것이다.
“통과하실 거예요.”
그래도 불안해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내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자 예카테리나도 힘을 풀며 웃었다.
연습을 마무리 짓고, 어둑해진 밤. 우리는 함께 연습실을 나왔다. 시간은 9시경. 슬슬 출발해야 할 때였다.
연주를 하진 않기 때문에 간편한 사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도 레오니드와 야콥이 고생해 주었다.
10시가 넘어서 모스크바 음악원에 도착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레이트홀에선 또 한 명의 연주자가 자신이 가진 실력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우린 그 소리를 들으며 복도에서 천천히 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마지막 연주자가 연주를 마쳤고, 잠시 후 청중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수천 명의 인파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되도록 구석에서 예카테리나와 잠깐 버티고 있자, 이윽고 사람들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젠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겠지?”
“그렇죠.”
거의 11시가 다 된 시간. 청중들이 바라는 음악은 멎었다. 아직도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잠시 후에 있을 세미파이널 진출자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저편에선 오늘 연주를 했던 연주자들과 그 가족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손을 부여잡고 있는 몇 명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예카테리나의 일행은 나 하나였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이 계속해서 메시지와 전화 등을 해 오긴 했지만, 멀리에 살거나 해외의 유학생들은 방학에 오기가 여의치 않은 것이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에게 와 달라고 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예카테리나는 진출자 발표는 몇 분도 되지 않아 금방 끝나니까 그럴 필요 없다며 만류했다.
“세미파이널 진출자 발표가 곧 있겠습니다.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콩쿠르 진행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사람들을 홀로 안내했다. 17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에 10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들어가니 티켓 확인이나 정해진 자리 같은 것도 없었다.
중앙의 빈자리에 예카테리나와 나란히 앉았다. 무대엔 11명의 심사위원들이 의자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분들이었다. 그중 러시아 출신은 세 명 뿐. 나머지 여덟 분은 다양한 곳에서 피아노로 이름이 높았다.
뒤이어 두 명의 남녀가 올라왔다. 그중 한 명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의원회의 디아나 레오니예바 의장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늦은 시간까지 오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디아나 의장이 먼저 이야기하고 옆에서 다시 영어로 통역한다. 그렇게 말이 두 번 반복될 때마다 박수소리 역시 두 번 반복되었다.
인사를 마친 디아나 의장은 뒤편의 심사위원들도 소개하고는, 지체 없이 세미파이널 진출자들의 이름을 올렸다.
“발표하겠습니다. 첫 번째 진출자.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보스크리센스키. 러시아.”
“좋아!”
옆에서 누군가 쾌재를 불렀고 그를 축하하는 박수가 이어졌다. 예카테리나도 따라서 박수를 치지만,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어서 계속 진출자들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 긴장감이 올라갔다. 잠깐 안심이라도 시켜 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던 이름이 들려왔다.
“다섯 번째 진출자.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 러시아.”
“!”
예카테리나는 말도 못 하고 크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갑자기 끌어안았다. 난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녀가 완성한 음악을 다음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더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기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