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화
세미파이널에 진출할 14명의 이름을 발표하고 그 진출자들의 일정 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발표 자체는 정말 10분도 안 되어 끝났다.
이렇게 짧게 끝나다 보니 예카테리나가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에게 오늘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 건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축하해 줄 사람이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다.
물론 그만큼 그녀는 전화로 많은 축하를 받기도 했다.
“아, 인터넷으로 바로 봤어? 기다리고 있었구나? 응. 응.”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대회 영상을 보고 바로 전화로 연락을 할 수 있다니, 새삼 세상이 참 좁아졌다 싶다.
너무 프라이빗한 이야기까지 들을 필욘 없어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런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멍하니 흐르는 상념들에 빠져들 즈음 날 부르는 전자음 또한 있었다.
“아나스타샤.”
- 아, 예카테리나에게 걸었는데 영 받질 못하는 것 같아서. 전화 받고 있는 중이겠네?
아나스타샤는 안 봐도 훤하다는 듯 말했다. 예카테리나 앞으로 밀린 전화가 몇 통이나 될지 모르겠다. 난 웃으며 대답했다.
“예.”
- 메시지를 보내 놓긴 했지만, 그래도 축하한다고 전해 줄래?
“그럴게요.”
- 고마워.
난 그녀와 전화를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틀간은 예카테리나와 같이 연습을 하거나 컨디션 관리를 돕느라 아나스타샤와 보지 못했다. 그 사이사이 메시지 등을 주고받긴 했지만, 난 역시 전파로 이어지는 것 보단 직접 만나는 게 좋았다.
그래서인지 괜한 물음인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세미파이널도 보러 오실 건가요?”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냐는 듯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 그럴 생각인데? 원래는 오늘도 갈려고 했었어.
“후후, 알아요. 그날 데리러 갈게요.”
- 괜찮다니까.
난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대답할지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졌고, 그녀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받아 주었다.
그 뒤로는 대화이기도 하고 끝말잇기를 닮기도 한 말들이 오갔다. 아나스타샤와 이런 이야기를 드문드문 주고받고 있다 보면 어쩐지 편안한 기분이 든다.
한참이나 그렇게 전화를 놓지 못하고 있다가, 돌연 아나스타샤가 작별을 고했다.
- 아무튼, 많이 늦었네. 좋은 밤 되고…… 나중에 봐.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안녕히 주무세요.”
- 응.
잠시 동안 조용한 전파만이 흐르다가, 톡 하고 끊어졌다.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시끌시끌한 주변의 목소리들이 귓가를 파고든다. 난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엔 우리처럼 전화를 하거나 떠들썩한 사람들도 있었고, 멀리 그림자가 진 곳에선 훌쩍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 25명 중 11명은 탈락했다. 그다음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안타깝긴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기운을 잃지 말고 힘을 낼 수 있기를 멀리서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기쁨과 실망이 뒤섞여 있는 이곳에서 실망은 보다 빨리 빠져나갔다. 나는 흥분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다시 조용히 예카테리나가 전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빠르게 전화 몇 통을 연달아 받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전화가 길게 이어져서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괜찮아요.”
고개를 젓자 예카테리나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나 때문에 전화들을 빨리 끊은 걸까?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하지만 세미파이널 진출자에게 온 건 전화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에게도 메시지가 와 있네. 답장해야겠어.”
“아나스타샤와 방금 통화했어요.”
“정말? 아, 내가 전화 받고 있어서 그랬구나.”
“내용은 메시지와 같을 거예요.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 하셨으니.”
그렇게 가볍게 전했는데, 예카테리나는 내 쪽을 돌아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로 듣는 게 좋아.”
방식이 어떻든 누군가가 축하해 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역시 메시지보다는 목소리, 그리고 목소리보단 직접 만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예카테리나.”
“고마워. 정말로.”
여러 사람들의 몫을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예카테리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를 보였다.
이렇게 일단 첫 라운드는 통과했다. 적어도 이후로도 준비한 곡들을 무대에 올릴 수는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예카테리나는 마음이 편해진 듯했다. 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본선에 나가는 것까지 가정해서 곡들을 준비했는데 그 전에 떨어져 버린다면 정말 씁쓸할 것 같았다.
아무튼 이젠 뒤를 볼 필요 없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준비하면 된다. 난 예카테리나와 세미파이널 무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요 이틀간 나눈 이야기들의 반복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리 색다를 건 없었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자정이 훌쩍 넘어 모스크바 음악원의 경비원이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요청할 때까지 이어졌다.
***
소파에 누워 자던 에르네스트는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
언제부터 자고 있었던 건지도 잘 모르겠다. 하품을 하며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그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확인했다. 오후 2시였다. 아무리 방학이라지만 생활 패턴이 정말 엉망이었다.
그런데 이미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 익숙했다. 스마트폰에 온 메시지와 메일 등을 대충 치워 버리고,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앉아 까맣게 꺼진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너무 서두르나…….”
이전부터 생각하던 작곡에 대한 욕심을 직접 결심하고 움직인 지 이제 반년. 앞으로 중앙음악학교에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밤을 새워 가면서 공부하는 건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일어났어?”
한참을 멍 때리고 있자 저편에서 사샤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에르네스트가 거실 소파를 차지하고 자버리자 좋아하는 텔레비전도 못 보고 자기 방에 계속 있었던 모양이다.
어린 동생에게 미안해져서 에르네스트는 손을 휘휘 저으며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오니 온통 종이들 투성이다.
산만하게 대충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전부를 분류하고 있었다. 저쪽은 구세프 선생님에게서 받은 것, 그리고 저건 아르카디 교수님이 요청한 것. 저건 작곡과의 선생님이 제출하라고 했던 것……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개인적으로 쓰고 있는 곡까지.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그중엔 완성된 것도 있었고, 진행 중인 것도 있었다. 앞으로 두 곡 정도만 마무리 지으면 일단 다음 주까진 괜찮았다.
“…….”
한 곡씩 집중해서 써 내니까 어떻게 할 수 있긴 한데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피아노 연습과는 달랐다. 연습은 하면 할수록 무언가 쌓이는 기분이 분명하게 드는 반면에 작곡은 쓰면 쓸수록 쌓여 있던 것들이 평평한 악보 위로 옮겨 가면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넘쳐흐르던 선율들을 마구 꺼내어 쓰다 보니 벌써부터 바닥이 드러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그렇게 바닥을 보인 다음부터가 진정한 작곡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것이라면서 작곡과에선 더 열심히 쓰라고 할 뿐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율들은 아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쓰고 싶은 곡에 차곡차곡 넣고 있었다.
그 애는 이 선율을 보고 뭐라고 말해 줄까.
“하…….”
그가 아는 가장 신뢰할 연주자, 타티아나에 대해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쉬며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기대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이렇게 작곡에 미친 사람처럼 사는 걸 그녀가 본다면 분명 쓴소리를 듣게 될 것 같다. 타티아나는 자기관리 또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정말 혼날지도 몰라.
그걸 알면서도 멋대로 구는 건 멍청한 행동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 번 악보들을 싹 정리하고는 일단 청소기부터 돌렸다.
청소기 소리를 들었는지 사샤가 근처를 기웃거렸다. 가서 신경 쓰지 말고 텔레비전이나 보지 왜 이러나 싶어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왜, 뭔데.”
“커피 끓여 줄까?”
“…….”
애가 크니까 이런 날이 다 있네.
에르네스트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는 생긋 웃더니 후다닥 달려갔다.
잠시 후, 사샤가 거실로 커피와 우유를 한 잔씩 가지고 왔다.
“그건 네 거야?”
“응.”
사샤는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전에 듣자하니 많이 먹고 나보다 커지고 싶다고 하던데…… 진짜 하극상을 벌이기 전에 기를 잡아놔야 하나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는 커피 잔을 기울였다. 분명히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일 텐데, 사샤의 커피는 맛이 상당히 괜찮았다.
동생을 돌아보니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대충 손을 뻗어 쓰다듬으면서 피식 웃었다. 이 꼬맹이가 더 영악했다면 커피를 일부러 엉망으로 타서 다시는 끓여 달란 소리를 못 하게 했겠지.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착하긴 했다.
그렇게 나란히 커피와 우유를 홀짝이고 있자니 문득 사샤가 물었다.
“오늘 나간다고 그랬지? 형.”
“어.”
“안 졸려?”
“별로.”
잠깐 자기도 했고, 악보를 정리하고 커피를 마셨더니 머리도 개운했다. 원래 그렇게 잠이 많지 않아서 이 정도로 충분했다.
사샤도 에르네스트가 알아서 하리라 생각하는지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엔 자기도 콩쿠르 무대를 관람하고 싶으니 티켓을 꼭 구해 달라 했을 뿐이다.
몇 년 후엔 굳이 구해 줄 것 없이 알아서 잘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피로를 떨쳐 낸 에르네스트는 슬슬 나갈 준비를 마쳤다. 오늘 나가면 예카테리나뿐만 아니라 분명 다른 애들도 만나게 될 테니 되도록 깔끔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여름 날씨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셔츠와 베스트, 슬랙스면 충분했다.
“…….”
집을 나선 에르네스트는 지하철로 향했다. 타티아나가 그를 태우러 오겠다고 제안했지만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항상 가는 길인데 그런 부탁을 하기엔 미안했다.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지나 아르바츠카야 역에서 내렸다. 길을 건너 잠깐 걸으면 중앙음악학교였다. 익숙한 등굣길이다.
에르네스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걸어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다르네.”
첫날의 화려한 느낌도 아니고, 첫 라운드가 진행될 때 느꼈던 그런 북적거리는 느낌도 아니었다.
치열하게 살아남은 진짜 실력자들이 남아서 발톱을 겨누고 있는, 그런 살기등등한 기운이 건물 밖에서부터 느껴졌다.
파이널에선 협주곡을 연주해야 하니 연주자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드러내야 하는 건 바로 이 세미파이널 무대였다.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는 음악원 안으로 들어섰다.
수천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들을 찾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먼 곳에서도 그가 찾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그를 발견하고는 손을 살짝 흔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그쪽으로 향했다.
“왔니?”
“일찍 와 있었네.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우리도 방금 왔어.”
네 사람이 모두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가 연주자인지 헷갈릴 것 같았다. 오늘 또 다른 연주자인 막심은 없는 걸 보니 이미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카테리나와 타티아나도 막 이야기를 마치곤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에르네스트.”
“안녕. 타티아나.”
며칠 못 봤을 뿐인데 타티아나는 굉장히 반가워했다. 에르네스트도 반가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짧게 인사로 받았다.
예카테리나는 생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와 줘서 고마워.”
“보기로 했으니까.”
특별히 어떤 약속을 한 건 아니었고 예카테리나 외에도 친분이 있는 연주자들은 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지금 여기 외에 다른 어디에도 갈 생각이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에르네스트의 얼굴을 가만 올려다보더니 슬쩍 다가오며 작게 말했다.
“타티아나에게 들었어. 네가 내 둠카를 꽤 좋게 평가해 줬다면서?”
“……그랬나? 뭐 여기까지 왔을 정도의 곡이니까 잘 했겠지.”
“영 솔직하질 못하네.”
그런 말을 들으면 혹평을 하고 싶은데.
에르네스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예카테리나는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따가, 잠깐 이야기 좀 할래?”
무슨 이야기인진 모르겠지만 대충 콩쿠르에 관한 이야기겠지 싶었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