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01화 (601/1,277)

##  601화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네 사람은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주변이 시끄러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잘 모르는 시선들이 느껴진 탓도 있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그 대부분은 에르네스트나 예카테리나, 타티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종종 겪는 일이라 별 상관 없는 일이긴 했지만 괜한 신경 쓰이는 것도 싫고, 예카테리나도 슬슬 마지막으로 리허설을 하고 몸을 풀어야 할 시간이었다.

배정받은 연습실로 오니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의 목소리는 약간 더 커졌다.

“곡 연습도 타티아나랑 같이 했었어?”

“응. 덕분에 너무 잘 됐어.”

“그거 어떤 건지 나도 알아. 가끔은 타티아나가 선생님보다 낫더라니까?”

“저기, 발렌티나…….”

예카테리나가 타티아나의 집에 묵으면서 연습실을 빌렸던 것을 놓고 발렌티나는 무슨 합숙 레슨이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예카테리나가 더 고등교육기관에 재학 중이라는 건 그녀에게 별 상관 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의 생각도 비슷했다. 타티아나는 혼자서 자신의 음악을 추구할 때도 굉장한 집중력과 재능으로 음악을 이끌어 내지만, 다른 음악가와 음악을 교류하며 의견을 나눌 땐 그 능력이 한층 더 높아지는 면이 있었다. 그 날카롭고 영민한 음악성은 누구에게나 영감이 되는 좋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도 몇 번이나 그렇게 타티아나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예카테리나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녀는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결국 곤란해하는 건 겸손한 성격의 타티아나뿐이었다.

“연습은 나중에?”

“너희들 가고 나면. 연주는 무대에서 처음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래? 아…… 그렇구나.”

지금의 예카테리나의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에르네스트에게도 조금 있었지만, 예카테리나는 미리 연주를 들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말인즉슨 세 사람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녀의 무대 준비에 방해가 된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건 타티아나였다.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만 저희 가 봐야 해요. 예카테리나도 준비하셔야 하고, 막심 선배의 무대도 있고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이번 콩쿠르에서 타티아나가 신경 쓰는 사람은 막심과 예카테리나 두 사람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시간이 겹치지 않아서 차례로 볼 수 있었다.

타티아나를 따라서 먼저 아나스타샤가 인사를 건넸다.

“이따가 봐. 예카테리나.”

“고마워. 아나스타샤.”

“진심으로 응원할게!”

“응. 나도 최선을 다할게.”

세 사람은 며칠 전 친해진 사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랜 친구 같아 보였다. 그렇게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친화력이 좋은 예카테리나와 발렌티나가 잘 맞은 덕분이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예카테리나와 포옹했다.

“분명 좋은 연주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

그래도 지난 며칠간 예카테리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건 타티아나였다. 때문에 무대를 앞두고 감회도 색다르리라.

예카테리나 역시 타티아나는 조금 특별한지, 이전과 다르게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실망시키지 않을게.”

“아하하, 실망이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타티아나는 웃어 넘겼지만, 에르네스트는 예카테리나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는 마치 자기 교수를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에르네스트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가 연습실 밖으로 나갔고 남은 건 두 사람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계속 여기 있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짤막하게 말하곤 등을 돌렸다.

“이따 보자.”

“잠깐만. 에르네스트.”

“뭔데?”

“잠깐이면 돼.”

아까 잠깐 이야기할 게 있다고 했었던 그건가?

에르네스트는 연습실 문고리를 잡고 다시 돌아섰다. 먼저 나간 친구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먼저 가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세 사람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발걸음을 옮겼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연습실로 들어섰다.

차이코프스키의 둠카에 대해 이야기했었던가? 그 연주는 분명 좋았었지. 하지만 할 말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미파이널 무대를 앞두고 있는 지금, 굳이 지나가버린 무대의 곡을 이야기 할 이유를 딱히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불렀으면 말을 하라는 뜻으로 삐딱하게 서서 예카테리나를 바라보았다.

예카테리나는 무작정 그를 불러 세운 게 분명했다. 그녀 역시 고개를 기울이며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고민하는 눈빛이 심상찮았다.

그냥 먼저 용건을 꺼내길 기다려도 되겠지만, 일단 선수를 잡아야 할 것 같단 기분에 에르네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타티아나에게 그랬었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

너도 그 애가 혹시나 실망할까 봐 두려워?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곤 있지만 직접적으로 말할 순 없었다. 예카테리나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에르네스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농담을 빙글 돌렸다.

“걱정 마. 그 애가 실망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어. 지난 2년 내내 봐 오면서도 몇 번 없었으니까.”

“몇 번? 대체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건데?”

예카테리나가 갑자기 몰아세우자 에르네스트는 당황했다. 그 애가 어지간해서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건 조금만 어울려보면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작년 스위스 연주회에 갔다 와선 상관없는 일로 타티아나에게 화풀이를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말하면 예카테리나의 오해를 풀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 그만큼 어렵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

“…….”

그 말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예카테리나는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곧 천천히 말했다.

“그리 어렵게 대하지 않았는데. 그냥, 저 애가 슬퍼하는 모습은 안 봤으면 좋겠어.”

그게 그거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슬슬 본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예카테리나는 무언가 재는 눈초리로 에르네스트를 본다.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 그녀가 뱉은 말은 정말로 예상외였다.

“에르네스트. 혹시 스포츠 즐기는 거 있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묻는 거야.”

뜬금없는 말도 적당히 뜬금없어야지. 이건 도저히 종잡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그 말의 속뜻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엄두도 못 내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어차피 하는 것도 없었다.

“축구를 가끔 보긴 해도 직접 하진 않아. 할려면 할 수도 있지만.”

“그럼 공으로 하는 거 말고, 음…… 위험한 익스트림 스포츠에서 스릴을 만끽할 때 비로소 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거나 그런 사람도 있잖아?”

“어이가 없네 그냥.”

느닷없이 스포츠를 안 하냐고 묻더니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익스트림 스포츠?

황당함에 혀를 차자 예카테리나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 취미는 없니?”

“있겠냐고.”

“다행이네.”

살짝 짜증이 차오른 에르네스트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해도 예카테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슬슬 이쯤 되니 짜증을 넘어서 궁금해지기도 했다.

콩쿠르를 몇 시간 앞둔 참가자의 질문이라기엔 너무 기이했다.

분명 타티아나와 함께 있으면서 대화 중에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무언가 그녀에게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생겨서 에르네스트를 불러 세운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뭔지 속 시원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갑자기 부르더니 뭔 취미 조사야? 진짜 별일을 다 겪겠네.”

“나도 묻고 싶어서 묻는 건 아니거든?”

“……?”

어쩌라는 거야?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예카테리나의 말들을 짜 맞추고 유추하고 있었다.

혹시 타티아나가 대신 물어봐 달라고 했나? 가장 단순하게 닿는 추리는 그 정도였다.

“…….”

하지만 타티아나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스포츠를 따로 즐기진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고, 혹시 몰래 하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 할지라도 직접 물어볼 스타일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방법을 쓸 사람이 절대 아니다.

대체 뭐야?

어떤 문제를 마주해도 논리적인 해답을 끌어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에르네스트였지만 이번엔 어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는 한술 더 떴다.

“위험한 스포츠는 안 하고…… 그럼 작곡하면서 술을 마신다거나? 운전을 한다든가? 아니면 둘 다?”

“예카테리나…… 적당히 하지?”

짜증에서 궁금증으로 향했던 기분은 이제 정말 화로 변질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가 특별히 나쁘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대충 믿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그 평가를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경고가 담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인가 궁금한가 본데. 전혀 아니니까 신경 꺼.”

“방금 그건 실수야. 미안해.”

“…….”

“그런데 오늘 유독 피곤해 보이긴 하는데.”

“작곡하느라 밤새서 그런데. 문제 있어?”

“작곡?”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신경 썼는데, 그래도 예카테리나의 눈엔 보였나 보다. 혹시 타티아나에게도 피곤하게 비쳤을까 싶어 에르네스트는 약간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작곡이란 말을 듣고 예카테리나는 이야기의 방향을 그쪽으로 휙 틀었다.

“아 맞아…… 네가 작곡한 그 곡. 이번에 부탁해서 들어 봤어.”

“……그래?”

마냥 혼란스럽던 기분에 긴장이 깃든다. 예카테리나가 그 곡을 듣고 무슨 말을 할지, 에르네스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하는 언행을 보면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있잖아, 에르네스트. 그 곡 첫 악장 말이야. 신적인 존재를 숭배하는 마음으로 쓴 거야?”

“뭐?”

“내 귀엔 그렇게 들려서.”

하지만 예카테리나의 평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상적이었다.

뭐,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지. 에르네스트는 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의 첫 소나타, 겨울의 표리. 그 첫 악장엔 칼리오페와 새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때문에 지금 예카테리나가 하는 말 역시 그 표제에 따라 움직이는 이미지와 의견에 가깝게 들렸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의 눈을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렇게 단순한 평이 아니란 직감이 들었다.

이 곡을 쓸 때, 에르네스트는 도저히 거짓말할 수 없이 타티아나를 대상으로 두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 가장 경건한 음악의 신자는 타티아나였으니까.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말한 신앙적 숭배는 타티아나의 것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간 견고하던 관점에 갑자기 예리한 송곳이 틀어박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어렵게 쓸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해. 주제넘은 소리일진 모르겠지만.”

“…….”

아나스타샤와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녀도 1악장의 전개부를 조금 더 쉽게 썼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칠 수 있을 거라 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작곡 당시 다른 사람은 그리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쓴 1악장을 본 예카테리나는 그 어려움을 신적인 존재를 향한 뜻이라 해석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타티아나가 지은 제목을 받았을 때도 그녀가 스스로에게 칼리오페라는 음악의 여신의 이름을 붙일 리 만무하니 그저 음악 자체의 이미지화를 잘 시킨 제목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다. 두 사람의 관점은 어딘가 도가 지나쳐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난 너희들이 여전히 부러워.”

“뭐라고?”

“왜, 부러워하면 안 돼?”

“……?”

지금까지 하고 있지 않던 이야기를 살짝 드러내던 예카테리나는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튼 이야기 끝났어. 가 봐. 그리고 연주 꼭 들으러 오고.”

“진짜 제멋대로네. 나야말로 묻고 싶은…….”

“나가 줘. 이제 연습해야 하니까.”

“…….”

정말 어이도 없고 정신도 없었지만 무대를 몇 시간도 남기지 않은 연주자의 축객령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느라 혼란스러운 머리로 연습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복도엔 아나스타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했니?”

다른 두 사람은 먼저 간 것 같은데, 이 애도 나랑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에르네스트 역시 아나스타샤와 할 말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곳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어지러울 땐.

그래서 그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글쎄. 운동 친구 가지고 싶었나 봐.”

“장난치지 말고.”

“진짠데. 무슨 스포츠 좋아하냐고 물어보더라.”

“……??”

아나스타샤는 드물게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그 모습은 웃겼지만, 에르네스트는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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