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2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던 아나스타샤는 연습실 문을 힐끗 보더니 곧 고개를 젓고는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가자. 애들 기다리고 있겠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게 아니었나?
미련 없이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같이 가 있지 그랬어?”
“응?”
이럴 거면 뭐 하러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나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를 더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에르네스트의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더니, 장난기가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네가 길 잃고 스몰홀이 어딘지 못 찾아올까 봐 기다려 줬어. 고맙지?”
“넌 내가 바보인 줄 아냐?”
“아니었니?”
아나스타샤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너랑 내가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모르겠냐는 투였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농담이라 할지라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에게 들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에르네스트는 반론도 하지 않고 웃어 넘겼다. 아나스타샤는 키득거리며 다시 스몰홀 방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으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 예전에 왔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나, 4년 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공유할 거리도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 오래 있었는데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다.
친자매라 해도 믿을 정도로 가까운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의 관계. 그런 거리감으로부터 느꼈던 직감과 추측. 그런 것들이 불현듯 뇌리에 스쳤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모처럼 기분 좋게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그런 진지한 내용은 꺼낼 수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생각 없이 일단 콩쿠르 무대나 보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생겼다.
“야…… 잠깐만, 저기 문 닫는 거 같은데?”
“어?”
저 멀리 보이는 건 분명 바이올린 콩쿠르가 치러지고 있는 스몰홀의 입구였다. 그런데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천천히 그 문을 닫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연주가 시작되어 홀을 닫는 광경이었다.
당혹스러워하며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그 앞으로 다가갔다.
“자, 잠시만요. 저희 들어갈…….”
“죄송합니다. 지금은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무슨 용건인진 이미 잘 안다는 듯 직원이 잘라 말했다. 그 어떤 급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안 된다는 딱딱한 어조였다.
이렇게 되면 들어갈 방법은 없다. 연주가 시작되면 인터미션 전까지 홀 안으로 아무도 입장하지 못한다는 건 연주 중에 벨소리가 울려선 안 되는 것만큼이나 모든 클래식 감상자들이 지켜야 할 국제적인 룰이었다.
물론 콩쿠르 측에서도 룰을 지켜 줘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시간을 확인하더니 정당하게 따지고 들었다.
“아직 시간 남아 있는데요?”
“홀 내부 사정으로 시간이 앞당겨졌습니다. 미리 안내 방송을 드렸지만 못 들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당겨지다니요?”
“전 연주자가 트러블이 생겨 무대에서 일찍 내려왔습니다.”
연주를 망쳤는지 어쨌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찍 끝났으면 인터미션을 길게 잡으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해야 정해진 스케줄이 맞는다. 갑자기 이렇게 시간을 당기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직원은 해야 할 설명은 다 끝마쳤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는 그저 지시받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
슬쩍 아나스타샤의 옆모습을 보니 그런 게 어디 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지만, 그녀로서도 지금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홀에서 별의별 사건이 다 생기곤 한다는 건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었고,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 역시 빨랐다.
침묵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조금 미안해졌는지 직원이 덧붙였다.
“연주 실황은 인터넷으로도 제공되니 지금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그 한마디가 아나스타샤에게서도 한마디를 이끌어냈다.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말하곤 휙 돌아섰다.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짜증이 난 듯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다. 이런 일은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고, 연주자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뭐라도 좀 마시자.”
그래도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일이 될 것이 뻔했다. 에르네스트는 대신 차가운 음료를 붓기로 했다.
그렇게 휴게실로 가서 탄산음료를 뽑아왔을 때, 아나스타샤는 이미 차분해져 있는 상태였다.
“자.”
“고마워. 어라, 뭐 탔니?”
“타긴 뭘 타?”
“농담이야.”
가끔 타티아나에게 음료수를 줄 때면 따서 주는 게 버릇이 되어 있긴 했지만, 아나스타샤에게 그러는 건 실수였다. 아나스타샤는 평소 안 그러는 애가 왜 그러냐는 듯 장난을 걸어왔다. 조금 수위가 지나친 감은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건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원한 탄산을 목으로 넘긴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 나야말로 진짜 바보 같네. 그냥 애들이랑 갈걸…….”
“너 바보 맞아. 그러니까 먼저 가라 했었잖아.”
“그렇게 말하기야?”
“네가 먼저 하지 않았어?”
유치한 말싸움이 오갔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닫힌 스몰홀 쪽을 바라보았다.
“애들은 안에 있겠지?”
“여기 없는 걸 보니 그렇겠지.”
“음…… 확인이나 해 볼까?”
“어떻게.”
아나스타샤는 왜 자꾸 바보 같은 소릴 하냐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뭘 어떻게야? 저기 아저씨가 가르쳐 줬잖아. 인터넷으로 보라고.”
“뭐…… 그래.”
“폰 줘 봐.”
“왜?”
“얼른.”
네 거 있잖아?
갑자기 스마트폰을 달라는 말은 그 누구에게 듣더라도 거부감이 든다. 기본적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예의 문제인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손목의 스냅으로 휙휙 돌리며 말했다.
“나 데이터 없어.”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당당하네?”
“사실이니까. 네 걸로 보면 되잖아. 아, 걱정 마. 프라이버시는 존중할 테니까. 그리고 만약 뭐가 나와도 난 이해해 줄 수 있어.”
이해하긴 뭘 이해해? 에르네스트는 약간 짜증이 났다.
프라이버시라 해도 별것 없긴 하다. 사진첩을 한참 뒤로 돌리면 타티아나와 함께 카페에서 찍었던 사진 같은 게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그런 걸 보여 주고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짝 선을 넘는 당돌함이라 해야 할지 맹랑함이라 해야 할지 모를 무언가에 어울리는 건 그녀를 따라 바보가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절대 이해 못 할걸?”
“……뭐?”
순간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굳는다. 약간 당황했던 그녀는 에르네스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곧 태연하게 웃었다.
“이해 못 하다니, 왜?”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을 테니까.”
“어……?”
멍하니 되묻는 그녀의 표정에 순간 각오와 후회 등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뭐든 이해하겠다고 말한 데에서 비롯된 인과를 납득하면서도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길게 생각하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사진첩을 열어 보여 주었다.
“봐 봐.”
흠칫하던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에르네스트의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곧 고개를 갸우뚱했다.
“?”
어리둥절해할 만도 하다. 아무리 위아래로 사진들을 넘겨 봐도 온통 작곡이론에 대한 스크랩 등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진들은 너무 밑에 내려가 있었다.
“이거 뭐야?”
“내가 쓴 것들도 있고, 대부분은 아는 작곡가에게 받은 자료들. 거 봐, 봐도 모르겠지?”
아나스타샤 역시 수준 높은 음악교육을 받은 음악가였으니 유심히 보면 어느 정도 알아볼 순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에르네스트가 요즘 소화해 내는 연구 자료나 논문 스크랩 등을 한 번에 보고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
한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아나스타샤는 돌연 고개를 들더니 갑자기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 눈을 보니 뒤늦게 아차 싶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미처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때렸다.
솔직히 이 정도로 맞아선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아픈 척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왜 때리는데.”
“목 조르려다가 참은 거야.”
“죽일려면 나중에 죽여. 나 할 일 많아.”
“곡 쓰다가 죽어 그냥.”
웃어넘기기엔 너무 싸늘한 진심이 담겨 있는 말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순간적으로 아나스타샤의 옆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옅은 미소와 안도감 등을 발견했다.
문득 에르네스트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정말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해 줄 것 같다고.
뭔가 계산적으로 보고 있진 않았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친구 대 친구로서 진솔하게 어떠한 대화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
“…….”
그렇지만 아나스타샤가 먼저 진심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는 건 그로서도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한편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예카테리나와 했었던 대화 역시 에르네스트를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타티아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그보다 진지하다는 자각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게 경애를 넘어선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그의 언행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복잡한 생각이 짓쳐 들어 에르네스트는 상념에 잠겼고,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결국 다시 입을 연 건 아나스타샤였다.
“영상이나 틀어 봐.”
“……그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후원하는 클래식 방송사의 페이지에 들어가니 바로 실황 연주 영상이 떴다. 같은 화면을 보기 위해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레 옆으로 가까이 붙었다. 미워한다면 있을 수 없는 거리.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며 화면을 조금 더 아나스타샤 쪽으로 내밀었다.
이미 막심은 무대에서 올라 있었다. 당당하게 턱을 치켜든 모습은 도저히 국제 콩쿠르 첫 출전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 선배 자세는 참 거물이야.”
“뭐 그렇긴 하지. 실력도 만만찮고.”
“인정하는 거니?”
“잘하는 건 잘하는 거니까.”
에르네스트는 음악에 대해선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막심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상당한 실력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타티아나 역시 몇 번이나 막심의 실력을 추켜세운 적 있었고.
잠시 후 막심과 반주자 사이에 시선이 오가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친절하게도 재생 중인 영상 옆엔 현 연주자의 프로그램도 올라와 있었다.
에드바르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op.45.
비극적인 영화의 한 장면을 그리는 것 같은 다단조의 선율의 강렬하게 울려 퍼진다. 스마트폰에서 들리는 소리는 실제 연주에 비하면 굉장히 모자란 소리였지만, 이 오래된 장엄함은 아무리 열화시켜도 가장 아래에서부터 이루어져 올라온다.
훌륭한 곡과 훌륭한 연주다.
에르네스트는 집중해서 감상에 집중했다. 그는 바이올린 소나타에 그리 조예가 깊진 않지만, 작곡을 시작하면서 피아노 외의 악기도 연구한 덕분에 지금은 꽤나 잘 이해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
홀 안에 설치된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다각면에서 연주자를 보여 주었다. 막심은 정열적으로 몸을 뻗으며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한 카메라가 그 모습을 크게 담기 위해서인지 멀리에서부터 무대를 담았다. 400석 정도 되는 스몰홀의 한 면은 카메라 한 대에 모두 담겼다.
화면을 보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찾았다.”
그녀가 찾았다는 게 누구인진 묻지 않아도 뻔했다.
“어디?”
“저기, 보이잖아.”
무대를 담은 화면의 하단엔 청중들의 뒷모습도 보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익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있었구나.
“…….”
미동도 않는 자그마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해도 저 안까진 전혀 들리지 않겠지만, 이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면 되도록 소리를 줄여야겠단 생각만 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