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03화 (603/1,277)

##  603화

난 막심 선배가 무대 위로 올라오기 직전까지 주위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시간 내에 입장하지 못했다.

“걔들은 밖에서 기다려야겠네.”

“그렇겠네요…….”

발렌티나가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선 참가자가 빠르게 무대에서 내려와 버리는 바람에 붕 뜬 시간이 생기게 되었고, 콩쿠르 운영회는 남은 시간을 인터미션으로 길게 사용하지 않고 홀 앞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을 모두 입장시켰다. 그리고 밖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몇 분 더 기다릴 것 없이 문을 닫아 버리고 콩쿠르를 속행했다.

그냥 천천히 스케줄대로 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텐데……. 조금 아쉬움이 생긴다.

하지만 콩쿠르의 흐름이 깨지지 않게 이어 나가는 것도 중요했다. 마치 그것을 증명하겠다는 듯 사회자는 빠르게 다음 참가자를 무대 위로 올려 보냈다.

“…….”

무대 위에 선 막심 선배가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난 아쉬움 등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무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50분 정도 되는 프로그램 동안 막심 선배는 우중충한 겨울비를 홀 안에 내리기도 하고,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을 흉내 내기도 했다.

커다란 자연의 풍경부터 한낱 사람의 감정까지, 막심 선배는 그 모든 것을 탁월하게 표현해 냈고, 또 굉장히 절묘하게 결합시키기도 했다.

피아노 반주를 하는 분의 실력도 얼마나 뛰어난지, 나중엔 바이올린의 소리를 읽고 미리 예측하여 앞서나가듯 음악적 구조를 다지고, 바이올린이 연주하기 편하게 했다. 그만큼 바이올린으로부터 명징한 주제가 주어졌기에 가능한 합주였다.

저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떤 느낌인지 잘 안다. 저런 바이올린 연주자와 합주를 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난 바이올린 소리를 감상하는 데에도 집중하고, 가끔은 피아노 반주자가 된 기분도 상상하면서 콩쿠르 무대에 빠져들었다.

“후…….”

50분이나 되는 시간은 언제 그렇게 흘렀나 모를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막심 선배의 뒤로 나 역시 박수를 보냈다.

발렌티나가 머리를 슥 내밀더니 작게, 하지만 열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첫 라운드 때보다 훨씬 잘하는 것 같지 않아? 타티아나 네가 보기엔 어때? 숨겨 둔 카드를 얼마나 꺼낸 거야?”

난 막심 선배와 친분이 좀 있는 편이었으므로 발렌티나는 내가 선배의 실력도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 역시 선배와 제대로 연습해 본 게 꽤 오래 전이다. 난감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던 시절의 카드들은 이미 없어요. 저도 모르겠네요. 막심 선배가 얼마나 잘하실지.”

“파이널은 그냥 가겠는데?”

“후후……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희망이 담긴 말을 보내고, 발렌티나와 일어섰다.

홀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북적였다. 인터미션에 잠시 쉬러 나온 사람들이나, 돌아가려는 사람들. 그리고 다음 무대를 보러 온 사람들이 온통 얽혀 있다.

난 주위를 잠시 살피다가 혹시나 싶어 발렌티나를 이끌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있었다.

“바로 나왔네?”

나와 발렌티나를 발견한 아나스타샤가 반색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녀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서로 뭔가 미안함을 느끼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응? 아하하, 아니. 우리도 무대 보고 있었어.”

“예?”

“이걸로.”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그 화면엔 우리가 방금 있었던 홀의 영상이 떠 있었다. 그런데 이거 에르네스트의 것 아닌가요?

때마침 배터리 방전 알림이 깜빡였다.

“배터리가 다 되어 가네요.”

“상관없잖아?”

“난 상관있는데.”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쓰며 말했고,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계속 저걸로만 같이 본 모양이다.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 홀에 두 사람이 입장하지 못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만 했는데, 그래도 같은 무대를 떨어져서나마 봤다는 것에 조금 위안이 된다.

“일단 그레이트홀로 가 있을까?”

“그게 좋겠어요.”

다시 네 명이 된 우리는 잠깐 앉을 틈도 없이 바로 움직였다. 인터미션 후에 바로 피아노 부문 예카테리나의 무대가 있을 예정이니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다.

그렇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그레이트홀 쪽으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아, 그런데 있잖아, 타티아나. 아까 막심 연주 어땠니?”

홀에서 느낀 감상을 공유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그 연주를 평하자면 이렇게 걸으면서 말하기 어렵다.

일단은 짧고 단순하게 말했다.

“훌륭했지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그렇지? 조율 같은 것도 완벽하게 맞췄고. 깔끔했잖아.”

각 곡들에 대해 느꼈던 심상이나 포인트 등을 생각하던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서 내 의견을 붙였다.

“피치는 살짝 낮춘 것 같았어요.”

“어?”

나란히 걷던 아나스타샤가 멈칫했다. 그녀는 정말 깜짝 놀란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예. 진짜. 제가 듣기론 5hz정도 낮추지 않았을까 해요. 아마 옛 프랑스 기준을 따랐겠죠.”

현대의 바이올린들은 대부분 A음을 440hz나 442hz정도로 조율한다. 이건 일종의 합의로서 인간이 다루기 편한 평균율로 나눌 수 있는 주파수의 위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절대적인 규칙이라 할 순 없어서, 연주자들은 성향이나 음악에 따라 적당히 조율을 하여 음색을 맞춘다. 19세기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선 435hz를 많이 썼고, 심지어 더 이전인 바로크 시대로 가면 415hz를 기준으로 했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으면 잘 모를 차이이긴 하지만, 절대음감이 아닌 나도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차이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내가 바이올린도 조금 배웠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율에 대해 이야기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아나스타샤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게 들리니?”

“많이 듣다 보면 알 수 있어요.”

“칫…….”

“!?”

바이올린의 조율 차이도 짚어 내는 내 청각이 순간 고장 났나 싶었다. 그녀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혀를 차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본 것 같았다. 난 귀를 의심하며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옆을 휙 하고 앞서 나갔다.

약간 놀라기도 했고, 순간적으로 내 말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피아노과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너무 알은척한 걸까? 또 선생처럼 군 건가?

지금까지 아나스타샤가 많이 참아 주었다는 건 안다. 어떻게 하지?

난 뻣뻣하게 굳은 다리로 간신히 뒤를 따르며 당황스러움을 억눌렀다. 뭐라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쿡쿡 찔러 멈춰 세우더니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의아해하며 보니 갑자기 지폐를 내민다.

“자.”

“좀 더 걸어볼 걸 그랬네.”

에르네스트가 으스대며 말했다.

난 이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분 내기하셨나요……?”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간신히 평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했다.

보아하니 바이올린의 조율에 관해 내기를 한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나와 같은 의견을 냈고.

사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이올린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었는데, 근래 작곡을 배우다 보니 이런저런 공부들을 병행하면서 바이올린의 음색에 관해서도 연구하게 된 것 같았다.

어쨌든 바이올린 피치가 약간 낮다는 것을 바로 알아맞힌 게 기쁜지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내가 말할 땐 죽어도 인정 안 하더니 바로 인정하네.”

“우린 스마트폰으로 들었잖아. 직접 홀에서 들은 타티아나라면 정확하겠지.”

아나스타샤는 신뢰가 가득 담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나라고 해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 건 좋았다.

그런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발렌티나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왜 내 의견은 안 들어 봐? 나도 홀에서 들었는데.”

“넌 알았어? 피치 낮은 거.”

“아니.”

“…….”

완전히 불신하는 눈초리가 발렌티나에게 향했다. 발렌티나는 항의하듯 아나스타샤의 팔을 붙잡았지만 바이올린에 대해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면 사실 잘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웅다웅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두 사람을 보면서 웃다가, 순간 아나스타샤가 혀를 차던 모습이 생각나서 흠칫했다.

그녀가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순간적으로 내 모든 행동들이 잘못된 것 같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나 발렌티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나스타샤가 내게 화를 내지 않는 건 사실 그걸 내가 가볍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그녀가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 중엔 조금 더 가볍게,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편하게 될 수 없다는 건 이미 공고하게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날 여기에 보낸 운명 혹은 신일 무언가가 검은 새와 함께 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난 떨쳐낼 수가 없다. 떨쳐내서도 안 되고.

예카테리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나왔던 깊은 본심. 의무든 강박이든 그건 친구들에게 향하기엔 너무 부담스럽고 무거웠다. 나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짝 떨어져서, 친구들을 따라 걸었다. 내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게 나았다. 다만 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여긴 미리 시작 안 했네.”

“바이올린 쪽이 이상했던 거지.”

그레이트홀에 도착하니 이제 막 인터미션이 끝나 사람들이 입장하려는 타이밍이었다. 우리는 허둥지둥할 필요 없이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홀 안은 그 전 연주자들의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며 천천히 그 열기에 파묻힌다.

“청중 여러분들은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곧 다음 참가자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의 연주가 있겠습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가라앉아 버리고 열기만이 남았다. 시간이 정확하게 되자 사회자가 다시 안내하며 무대 뒤쪽으로 신호를 주었고, 한 연주자가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예카테리나였다.

그녀를 환영하는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첫 라운드에서 굉장한 실력을 보여 준 만큼, 그녀가 이번에도 좋은 음악을 들려주리라 생각하는 기대감들이 가득하다.

예카테리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 꾸벅 묵례하고는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았다.

“…….”

세미파이널은 솔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50분에서 60분 사이로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안에 러시아 작곡가의 곡을 딱 한 곡만 포함한다면 그 외는 전부 마음대로 해도 되는 자유도 높은 무대였다.

앞선 첫 라운드가 고전과 낭만 등의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라운드였다면, 이번엔 연주자의 테크닉과 레퍼토리는 물론 근간이 되는 음악성과 센스를 판단하고자 하는 고난도의 심사다.

난 요 며칠간 예카테리나가 가져온 프로그램을 면밀히 지켜봤고, 때문에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

장난감 병정들의 발소리.

두서없이 빠르게 달리다가 휘청이고, 균형을 잡고는 발을 구른다.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

예카테리나는 세미파이널 무대의 첫 곡으로 또 다른 강렬한 곡을 준비해 왔다.

악보상으론 가단조이지만 사실상 조성이 존재하지 않는 회색의 불안정한 화성. 난해하게 튀어 오르던 음악은 어느 순간 대열을 갖추고 행진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 볼 수 있는 귀여운 장난감 병정들이 아니다. 보다 무섭고 기괴하다.

굉장히 다루기 힘든 해석과 음향임에도 예카테리나는 연습했던 그대로 십분 활용해내고 있었다.

‘어렵다고 했던 부분도…….’

그녀가 잘하리라 생각하면서도 긴장감에 팔걸이를 쥐고 있던 나는 그녀가 난색을 표했던 구간도 가볍게 넘어가는 것을 보곤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순간 이것도 선생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진지하게 그녀가 잘 해내길 기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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