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4화
장난감 병정들은 순식간에 무대를 짓밟으며 행진을 계속해 나갔다. 엄청난 긴장감이 모두를 휘어잡았다. 마을의 주민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행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숨죽인 채 지켜보는 건 청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말과 마차가 지나가고,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정말 갔느냐고 묻고, 마을에 손해가 난 것은 없는지 살핀다.
“…….”
음악을 이루는 각 마디에 갑자기 8분음표가 3개씩 추가되며 혼합박자로 변한다. 템포는 안단티노andantino. 느릿한 흐름이다.
순식간에 음악의 장르가 행진곡에서 녹턴으로 바뀐 것 같은 변화무쌍함이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연주하면 도대체 무슨 음악인지 알아듣기 어렵게 된다.
테크닉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이런 표현력을 요구하는 곡들은 정말 익히기 어려운 편인데, 예카테리나는 아주 능숙하게 모든 음악을 한 화폭에 그려 냈다.
병정들이 지나간 시골 마을의 풍경은 느릿하지만 깊은 불안과 섬뜩함이 묻어난다. 군대가 움직인단 말인즉슨 전쟁이 다가왔다는 뜻과 같다. 마을 주민들은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뻣뻣하게 행동한다.
불안 속에서도 목가적으로 흘러가는 회색빛 풍경과도 같은 음악은 곧 다시 돌아온 장난감 병정 군단에 의해 공포로 물들었다. 주민들은 다시 집으로 숨어들었다. 딱딱한 목각 다리가 지면을 박찬다.
그 기괴한 광경에 긴장을 풀어놓았던 청중들은 다시 숨을 들이삼켰다.
공포와 불안, 신비함 등이 한곳에 얽히며 화려한 음형을 보인다. 연습한 만큼 훌륭한 솜씨였다.
‘음악에만 집중해야지…….’
예카테리나가 연습하던 모습과 그것을 도와주었던 기억 등이 난다. 난 선생님이 아니라 지금은 청중 한 명일 뿐이다. 조금 더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다시 장난감 병정들이 물러가고, 마을엔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지만 말이 한 마리 남아 있었다.
모두가 그 말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갑자기 눈앞에 기괴한 표정 그려진 병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뻣뻣하게 행동하던 마을 사람들의 팔다리는 나무로 변하고 만다. 그동안 무조로 색채가 없던 음악에 짙은 붉은색이 끼얹어졌다가, 휙 사라져 버렸다.
“……!”
소름 돋는 공포를 느끼며 공기가 확 얼어붙는다. 나 역시 몇 번이나 이 곡을 들었지만 이 섬뜩함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런 강렬한 긴장감을 밀어 넣은 예카테리나는 마치 달래기라도 하듯 다음 악장을 연주한다.
2악장 안단테 칼로로소andante caloroso.
공포스러웠던 1악장과 달리 마장조로 시작되는 활기를 지닌 느린 악장이었다.
예카테리나는 표정마저 느긋하게 풀어놓으며 춤추며 건반을 쓰다듬는 것처럼 연주했다.
피아노로부터 피어오르는 벽난로와 따뜻한 우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바단조로 바뀌며 음악은 점점 초조해지다가, 가단조에서 폭발하듯 현실로 시선을 확 잡아끈다. 벽난로와 우유는 곧 환상처럼 희미해지고 창밖으로 행진하는 군대의 이미지가 확 드러난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눈을 감는다 하여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혼탁한 절망마저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마치 마네킹처럼 팔꿈치를 들어 올리며 건반을 누른다. 그 행동에서 만들어지는 음색은 이 음악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렇게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뒤 장의사의 종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몇 번이고 반복되다가, 서서히 잦아들며 그렇게 악장은 마무리되었다.
“……후.”
난 간신히 숨을 고르며 무대를 지켜보았다. 예카테리나 역시 목 근처를 들썩이며 잔향이 멎길 기다린다.
다음 음악을 쏟아붓기 위한 준비였다.
‘3악장…….’
곧바로 폭력적인 음악이 빗발쳤다. 프리시피타토precipitato의 다급한 지시에 따라 쏟아지는 음표로 된 총탄과 포탄이었다.
무시무시하게 빠른 토카타의 형태는 심장을 들끓게 하는 경쾌함을 지니고 있었다. 내림나장조의 고함소리와 함성은 거기에 사람을 강제로 따르게 만든다. 이전까지 이어지던 단조의 음악에 불안을 느끼던 사람들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없이 음악을 따라간다. 지시에 따라 겨누고 쏟아붓는다. 명령에 따라 짓밟고 으깬다. 무너뜨리고 불사른다.
이전까지 다가온 전쟁을 보면서도 군대에 두려움을 느끼던 선량한 주민들은 여기에 없었다. 공포에 짓눌리고 짓눌린 사이 나무가 되어 버린 팔과 다리. 차가운 목과 얼굴. 악에 찬, 광기의 장난감 병정들만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휘몰아친 음악은 한달음에 피날레로 향해 결국 병정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지만, 우리는 승리의 깃발을 받아 들고도 모두 넋이 나가 있었다.
끔찍한 저주 혹은 마법.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풍자와 사르카즘.
결과적으로 이 음악은 훌륭했다.
“브라바!”
보통 콩쿠르의 찬사는 박수소리에서 그치곤 하는데, 마치 불길처럼 환호가 일었다.
예카테리나는 환호가 잦아들 때까지 피아노를 바라보며 기다리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미 그녀의 마법에 사로잡힌 청중들은 동작을 멈추고 모든 소리를 지웠다.
난 만족스런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의 다음 연주를 기다렸다.
***
50분 정도 전개된 예카테리나의 연주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7번에서 시작하여 쇼팽의 발라드 3번을 연주하고,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op.33의 9곡 전부 연주하기까지, 50분에 거의 정확하게 맞는 프로그램도 괜찮고 어느 하나 흔들림도 없었다.
“그걸 그렇게 연주할 줄은 몰랐는데.”
특히 처음 그녀가 연주했었던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작곡되어 6번 그리고 8번과 더불어 전쟁 소나타라고 불리는 소나타였다. 특히 스탈린그라드라는 부제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린다면 결코 가볍게 해석하고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때문에 현재 7번 소나타는 두루뭉술하고 넓은 해석으로 주로 연주되는 편이었다. 이 공격적인 현대 소나타가 흐리멍덩한 해석으로 연주된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연주자들은 전쟁의 아픔과 희망, 혼돈 같은 메시지들을 뭉뚱그려 집어넣고 특히 3악장은 야단스럽게 연주한다. 에르네스트는 평소 그런 해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그렇게 몰입하기 쉽지 않은 해석으로 연주하지 않았다.
시작은 가벼운 행진곡처럼 연주하면서 청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끌어들이고 알게 모르게 긴장감을 주입한 뒤 나중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것 같은 연주였다.
좋게 말하면 명료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교활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런 연주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런 예카테리나의 연주의 기반엔 분명 그녀 본연의 음악성과 아르카디 교수의 지도가 또렷하게 드러났지만, 타티아나의 목소리 또한 약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급변하는 프레이즈 사이를 언제 넘어갔나 싶을 정도로 스무스하게 슥 흘러가는 일련의 느낌은 타티아나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방식이었다.
물론 보통은 한참을 준비한 음악이 겨우 며칠 사이 바뀌는 일은 드물겠지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중간중간 던지는 비유나 의견이 얼마나 알아듣기 쉽고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안다. 예카테리나가 그걸 잘 받아들일 흡수력만 갖추고 있다면, 며칠이 아니라 단 몇 시간뿐이라도 음악이 영향을 받아 좋아지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
첫 라운드도 괄목할 만한 연주를 보여 주더니 이번에도 상상 이상이긴 했다. 정말 1등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예카테리나가 좋은 성적을 받아 기뻐하는 것보단, 그런 그녀의 성공에 타티아나가 자기 일처럼 기뻐할 것이 더 기대되었다.
집에 데려가서 재우고 연습도 시켰으니 아마 느끼는 보람도 더 크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에르네스트는 자신도 타티아나에게 초대받아 똑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타티아나라면 흔쾌히 허락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애의 아버지는 가만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러시나요?”
옆자리에 있는 타티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더니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예카테리나가 너랑 시간을 보내면서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정말요? 그렇죠?”
방금 연주가 흡족했는지 타티아나는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좋아했다. 그녀가 듣기에도 예카테리나의 연주는 파이널에 진출하기에 충분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킥 웃으며 말했다.
“예카테리나가 1등상을 탄다면 상금 반은 달라고 해 봐. 줄 것 같은데.”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농담이야.”
실없이 흘리자 타티아나가 눈을 흘겼다.
“못 할 농담이에요.”
“알아. 어쨌든 많이 도와주긴 한 것 같은데. 그렇지?”
“도와 드리긴요,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말이라면 거의 다 믿는 편이었지만, 한 것이 없다는 말 만큼은 전혀 믿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자 타티아나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덧붙였다.
“연주를 듣고 의견을 몇 번 냈을 뿐이에요.”
“그렇게 하면서도 예카테리나가 준비해 온 음악은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게 대단한 거잖아.”
“에르네스트도 예전에 제 콩쿠르를 그렇게 도와주신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그랬었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타티아나와 함께 다니기도 했고, 콩쿠르 도중에 연습실에서 이것저것 코칭한 일도 있었다. 전부 분명하게 기억나지만 에르네스트는 괜히 말을 흐렸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 이상 묻지 않고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저 역시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
“예. 겨울의 표리에 대해 평을 받았었거든요. 처음엔 조금 난해해하시는 것 같았지만요.”
분명 음악적인 무언가라 예상은 했지만, 갑자기 그 곡의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에르네스트는 순간 머리가 굳어 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치워 두고 있었던 예카테리나의 목소리가 다시 뇌리에 머문다.
1악장은 무슨 생각으로 썼냐고? 그야……
타티아나의 얼굴을 보니 다시 생각이 멎는다. 에르네스트가 멍하니 있자 타티아나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말했다.
“에르네스트에게도 묻고 싶었던 것이 있어요. 첫 악장이…….”
“잠깐만.”
에르네스트는 급히 타티아나의 말을 잘랐다. 지금 보아하니 아직도 그녀는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가 작곡 당시의 의도나 무의식의 발로 등에 대한 말이라도 나온다면 에르네스트는 무어라 적당히 설명할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전 같았으면 음악의 사도인 널 그렸다고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카테리나에게서 일침을 당한 후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일단 상황을 회피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
말을 하고 나니 끔찍하게 바보 같은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한심하다는 눈빛 대신 무언가 살피는 눈으로 조용히 말한다.
“그야 에르네스트가 작곡가잖아요…….”
네 말이 맞아……
에르네스트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애랑 있으면 가끔 멍청한 소리가 절로 나오곤 한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에르네스트는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해소할 말을 찾아다니다가, 일단 일어나자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먼저 타티아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너무 귀찮게 하나요?”
“……뭐?”
마치 잘못이라도 한 사람 같은 태도였다.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그녀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질문에 너무 성의 없이 대답해서?
당황이 앞서지만 일단 오해는 빨리 푸는 게 우선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급히 말했다.
“전혀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단지 난…… 그 곡을 네게 헌정하면서 상당 부분 해석 역시 맡겼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가요……?”
설명이 되었는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타티아나는 짧게 되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의아함을 여전히 느끼는 것 같았지만, 곧 웃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이해해 주겠다는 표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고마우면서도 굉장히 미안했다.
“연주 평은 끝났어? 나가서 이야기하자.”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일어서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밖에서도 연주 평이 이어진다면 어떤 말들을 해야 할지 궁리하며 따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