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05화 (605/1,277)

##  605화

예카테리나의 순서가 끝나자 5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다. 복도로 나와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우릴 불렀다.

“막심이 보자는데?”

“아, 연락하셨나요?”

“그쪽에서 왔어. 이쪽 연주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메시지 보낸 것 같아.”

막심 선배의 연주 바로 다음으로 예카테리나의 순서였기 때문에 우린 막심 선배와 잠깐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테니 어쩌면 그냥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릴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에르네스트가 앞장섰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빈 연습실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연습실 안에 있던 막심 선배와 어머니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쪽을 막 돌아보았다.

“오, 빨리 왔네.”

시원시원한 목소리. 난 선배가 연주했었던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을 떠올리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하자 선배가 받아 주었다.

“연주 후에 바로 뵙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나도 예카테리나의 순서가 바로 다음이었다는 건 알아. 안 그래도 실시간 영상 보고 있었고.”

그러면서 막심 선배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짤막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대단하던데. 내 음악 같은 건 다 까먹어 버린 거 아니야?”

“예? 전혀요.”

예카테리나의 무대는 정말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바로 전에 들은 막심 선배의 음악을 몽땅 덮어씌울 순 없었다. 애초에 악기가 다르기도 하고.

난 제대로 듣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빠르게 기억들을 되돌려서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부터 짧게 평했다.

휘황찬란한 미사어구들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이전부터 막심 선배와 나는 담백한 단어들로 서로의 음악을 논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중앙음악학교의 합주 연습실에서 음악을 두고 토론하고 때론 논쟁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벌써 1년 전 일이지만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막심 선배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지 미소를 지으며 내 평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고마워. 피치를 낮게 잡고 디테일에 힘을 준 보람이 있네.”

역시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선배는 콩쿠르라는 틀에 맞춰서 음표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자신의 리사이틀처럼 화려하게 음악성을 뽐내기도 했다.

연주자라면 누구나 하길 원하는 연주이기도 하지만, 엄격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점수를 따야 하는 콩쿠르라면 어느 정도 위험부담도 짊어져야 하는 연주였다.

물론 난 그런 연주를 정말 좋아했다.

막심 선배는 내 칭찬에 목을 만지작거리더니 옆을 보며 말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네. 사실 미안하다고 하려고 만나자 한 거야.”

“예?”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 말야.”

옆에 있던 두 사람은 갑자기 자신들에게 대화가 돌아오자 의아해했다. 선배가 다시 물었다.

“아까 혹시 일찍 연주가 시작되어서 입장하지 못하지 않았어? 청중석을 보니까 보이지 않던데.”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는지 선배의 목소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어떤 이야기인지 이해한 아나스타샤는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맞아요. 텅 빈 복도를 방황하고 있었죠.”

“하하하하, 미안. 진짜 황당했겠네.”

난처한 웃음이 흘렀다. 막심 선배는 자신의 무대를 보고자 온 사람들이 홀에 들어오지 못한 것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했다.

“사과할게. 빨리 무대에 오르고 싶었거든. 직원들도 이미 사람들 다 입장해 있다고 했었고.”

“뭐…… 괜찮아요. 사실은 그냥 앉아서 영상 보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니 더 미안한걸.”

콩쿠르에서 자기 순서를 앞에 둔 연주자는 대체로 주변이 잘 보이지 않고 머리는 온통 음악으로만 꽉 차게 된다. 우리 역시 모두 연주자로서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가볍게 이해하고 넘어갔다.

막심 선배의 감사와 사과가 지나가고 다음으로 무대에 대한 이야기 역시 오갔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본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생각보다 괜찮았던 화질이나 음질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콩쿠르를 직접 보는 것보단 영상으로 보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니, 영상으로 어떻게 들리느냐에 대한 감상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음악뿐만이 아니라 요즘 갈수록 좋아지는 방송 시스템 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때마침 첨단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기기인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내 가방으로부터 나는 진동이었다.

- 어디니? 혹시 집에 간 건 아니지??

예카테리나였다. 이제 막 복도로 나왔는지 주변으로 소음이 들렸다. 미리 메시지라도 할 걸 그랬다.

“막심 선배와 이야기 중이에요.”

- 아, 그래? 다행이다. 나도 갈게.

위치를 가르쳐 주니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예카테리나가 연습실 문을 열었다.

“얘들아!”

연주자 특유의 뜨거운 에너지가 물씬 느껴진다. 예카테리나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를 포옹하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예카테리나.”

“별로 고생이랄 것도 없었어. 얼마나 재미있었는데.”

50분이나 되는 연주를 마치고도 하나도 안 힘들다는 듯 그녀가 열렬히 말했다.

“원래 세미파이널쯤 되면 진짜 긴장 때문에 시간이 몇 신지도 모르겠고 눈앞이 핑핑 돌거든? 그런데 연습했던 곡들을 떠올리고 있으니까 빨리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라. 이런 건 처음이었어.”

대부분 연주자들은 자신이 원해서 참가한 콩쿠르라도 순번이 다가오면 긴장과 무서움을 느끼곤 한다.

그것을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마인드컨트롤과 루틴 등을 익히기도 하는데, 예카테리나는 자신이 준비한 곡에서 자신감과 집중력을 얻어 낸 것 같았다. 그건 내가 무대에 설 때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과 비슷했다.

예카테리나는 방금 전 연주를 생각하는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나 내일이면 냉정해져서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오늘은 정말 잘한 것 같아.”

어떠한 완성된 연주라도 더 나은 완성을 위해 나아갈 부분은 남아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발전할 길이 없는 완벽한 연주를 했다는 건 연주자로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실수나 미흡한 부분을 떠올리고 아쉬워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예카테리나는 오늘은 스스로의 연주에 만족했다. 난 그런 그녀의 자세까지 모두 합쳐서 한 번에 평했다.

“저도 만점 드릴게요.”

“정말?”

“심사위원은 아니지만요.”

“그런 건 상관없어.”

엄청나게 상관있지 않나요?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정말로 기쁘게 웃으며 내 이야기를 더 듣고자 했다. 결국 나 역시 곡들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평들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예카테리나의 무대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순간에 존재하는 음악은 시간과 함께 흘러갔다. 두 참가자들은 이제 며칠 후 있을 무대를 바라보았다.

“보자…… 내일까지 세미파이널 하고 결과는 밤에 나오네?”

세미파이널은 이틀간 치러진다. 이번에도 첫날에 연주를 다 끝마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콩쿠르 스케줄을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계획을 점검해 나갔다.

각각 피아노 부문 참가자와 바이올린 부문 참가자였지만 이야기를 공유하는 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막심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다루는 악기가 다르니 이런 건 또 좋구나. 막심.”

“뭐가요?”

“콩쿠르 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으면서도 경쟁할 일 없잖니?”

두 사람이 같은 악기를 다룬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긴 했다.

그런데 막심 선배는 무슨 소리냐는 듯 턱을 기울였다.

“경쟁해야 하는데요?”

“응?”

“그랑프리 상은 전체에서 한 명 뽑아요, 어머니. 1등해 봐야 3만 유로예요. 그랑프리를 따야 10만 유로를 받죠.”

“상금이 중요했었니……?”

“상금도 중요한 거죠.”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뭔가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배의 어머니는 약간 당황한 듯 주변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아들이지만 이렇게 현실주의자일 줄은 몰랐는데.”

“자랑스럽지 않으세요?”

장난기가 다분한 어투여서 모두 웃고 말았다. 선배가 상금만을 노리고 콩쿠르에 참가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대화 주제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선배는 마침 잘되었다는 듯 제안했다.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쉽고,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

“그럴까요?”

마침 시간도 적당했다.

다 같이 식사하기로 정해지자마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빠르게 전화로 근처 식당에 예약을 잡았다. 일곱 명이나 되다 보니 느긋하게 가면 자리를 잡지 못할지도 몰라 예약은 필수였다.

주변에 밝은 발렌티나가 곧 괜찮은 곳을 찾아내어 예약했고,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이런 덴 어떻게 찾았니?”

발렌티나가 예약한 곳은 지중해 요리들을 주로 하는 곳이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의 요리들은 나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우리는 각각 취향에 따라 요리들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샐러드를 한 입 먹으니 신선함과 풍미가 한곳에 어우러졌다. 그 뒤로 나올 메인 요리들도 꽤 기대되는 맛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하면서 우린 이전에 하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자연스레 예카테리나가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이야기를 했고, 그녀가 우리 저택에서 머물렀다는 말에 막심 선배는 조금 놀라워했다.

“오, 그냥 둘이 연습이나 한 줄 알았는데.”

부정적인 투는 아니었고, 약간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배도 초대할걸 그랬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일단 내일 결과 나오면 이틀 휴식하고 그다음 사흘간 파이널이니까…… 그럼 그동안에도 같이 있을 예정?”

난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미 예카테리나는 오늘부턴 호텔에 머물기로 결정이 나 있었다. 이미 오전에 짐들도 다 호텔로 옮겨 놨고.

에카테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선배에게 설명했다.

“아뇨, 파이널은 협주곡이니까 이젠 음악원에 가까운 호텔에서 머물려고요.”

파이널 무대는 각 연주자들이 협주곡을 두 곡 연주해야 한다. 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고, 다른 한 곡은 자유로.

때문에 당연히 혼자 연습하기도 해야 하지만, 중간에 있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에도 참가해야 한다.

리허설이 계속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저택에서 왔다 갔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예카테리나는 그렇게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막심 선배가 소시지를 쿡 찍으며 말했다.

“아쉽겠네.”

“지금까지 타티아나가 도와준 것만 해도 충분하죠 뭐.”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나 역시 마주 웃었다.

내 연습실이 부담스럽거나 어색해서 나가겠다 한 것이라면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니 괜찮았다.

“한 가지 아쉽긴 하네요. 타티아나가 만들어 준 카샤 진짜 맛있었는데.”

그런데 미련이 없다는 듯 말하던 예카테리나가 뒤늦게 한마디 덧붙였다.

막심 선배는 그 말을 듣더니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 저 애 밥도 해서 먹였어?”

“말씀이 이상하시지 않나요?”

“그런가?”

“아닌가요?”

실제로 그랬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처럼 보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막심 선배에겐 내 요리 실력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다. 일단 콩쿠르가 모두 마무리되고 나면 정식으로 모두 초청해서 한 번 솜씨를 보여 주던지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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