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6화
식사 내내 환담이 오갔다. 오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세미파이널 무대라는 어려운 자리에 섰던 두 참가자는 스스로의 연주에 만족하고 있었고, 우리 역시 좋은 무대에 들떠 있었다. 테이블 위로 웃음소리가 가득 흘러넘쳤다.
난 그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함께하기도 했지만, 말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도 했다. 사실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 막심 선배도 예카테리나도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음식값은 막심 선배의 어머니께서 모두 내 주셨다. 우리는 그러시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지만, 이미 계산서와 카드를 웨이터에게 넘겨 버리신 뒤였다.
저번엔 아르카디 교수님이 사 주셨는데, 이번엔 막심 선배의 어머니였다. 감사할 따름이다.
“슬슬 갈까.”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막심 선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슬슬 저물고 있었다. 7월의 모스크바는 해가 늦게 지지만 이 시간대면 집으로 돌아가기에 딱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짝다리를 짚고 선 선배가 날 보며 웃었다.
“자 그럼…… 파이널 때 보겠네. 잘되면 말이지.”
“잘될 거예요.”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이야기였지만, 난 다시 한 번 공고히 말했다. 막심 선배 역시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을 또 들으면서도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예카테리나도 작별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봐. 타티아나.”
“예. 예카테리나. 혹시 나중에라도 놓고 가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고요.”
“알았어.”
그녀의 짐들은 이미 호텔에 있지만 혹시나 싶어 말하자 예카테리나가 웃었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도 그냥 여기에서 헤어질 모양이었다.
“우리도 갈게.”
“지하철로 가시나요?”
“응. 바로 앞이잖아.”
에르네스트는 지하철로 돌아가고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지하철 앞까지 그와 함께 간 뒤에 택시를 탄다고 했다. 어차피 택시를 탈 거라면 내가 태워다줘도 될 텐데, 두 사람은 내게 오늘은 빨리 돌아가 쉬라면서 사양했다.
사실 돌아가 쉬는 것보다 같이 있는 게 난 더 좋은데…… 피곤할 친구들을 더 피곤하고 부담스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난 그 이상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방어적인 태도란 기분이 들긴 하지만, 예카테리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내 스스로 깨달은 부분도 어느 정도 있어서, 지금은 약간 조심하고 싶었다.
레오니드가 운전하는 차에 타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사라져서 그런가, 평소 그렇게 멀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오늘따라 조금 멀게 느껴진다.
도착해선 레오니드와 야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두커니 섰다.
“…….”
요 며칠간은 예카테리나의 매니저가 된 기분으로 계속 움직이면서 항상 할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느낌이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이상해서 일단 침대맡에 앉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잠깐 이렇게 있다가 씻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메시지가 하나 왔다. 세연으로부터였다.
[전화해도 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안녕. 타티아나.
훌륭한 발음의 러시아어 인사였다. 혹시나 세연이 몇 개월 만에 러시아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나 싶었다. 나도 반년도 안 걸려 일상회화 같은 건 꽤 잘 할 수 있었으니 세연이라고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세연은 나지막하게 웃더니 영어로 이어 말했다.
- {지금 시간이 맞나 모르겠는데…… 거기 8시쯤 맞아?}
{맞아요.}
- {다행이네. 시차는 봐도 봐도 헷갈린다니까.}
투덜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동안 세연과 몇 번 연락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잡담 보단 용건이 있는 대화들에 가까웠었다.
{모스크바의 시간이 궁금하셨나요?}
- {응? 아하하, 아니야. 그냥 인터넷 보고 있는데 네가 나와서.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전화 해 본 거야.}
{제가요?}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보고 있었거든.}
그제야 난 세연이 전화를 건 이유를 깨달았다.
{정말 잠깐 스쳐 지나갔을 텐데요.}
- {옆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있어서 금방 알아봤어. 음, 예카테리나라는 애 연주를 보고 있던데? 그 애도 친구야?}
{맞아요.}
- {그렇구나. 그럴 줄 알았어. 정말 잘하더라.}
세연은 경쾌한 목소리로 예카테리나의 연주를 칭찬했다.
저 멀리에서 실시간으로 연주를 본 사람과 이렇게 감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요즘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묘한 느낌이었다. 카메라에 스쳐 지나갔을 날 바로 알아봤다는 것도 그렇고.
어쨌든, 생각도 못 한 전화를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예카테리나의 연주는 끝난 지 이미 3시간 가까이 흘렀다는 점이었다.
{바로 전화 주시지 그러셨나요.}
- {혹시나 방해될까 싶어서. 그런데 지금 연주 중인 피아니스트의 화면엔 아무리 봐도 너희가 안 보이길래. 이제 전화해도 되겠다 싶었지.}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리신 건가요?}
- {응. 조금 졸리네. 여기 지금 새벽 2시야.}
약간 당황스러웠다. 굳이 그렇게 기다릴 것 없이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메시지를 주거나, 아니면 저녁 인터미션에 연락을 해 줬어도 좋았을 텐데.
내 생각을 해 주었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약간 미안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세연은 지나간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듯 빠르게 화두를 꺼냈다.
- {그건 그렇고 타티아나. 내년엔 콩쿠르 나갈 거지?}
오늘 콩쿠르를 관람 중인 것도 보았으니, 당연히 그런 궁금증이 들겠지. 이미 거의 결정되어 있는 일이기도 해서 바로 대답했다.
{예.}
- {음…… 있잖아…….}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시나요?}
무슨 질문이라도 바로 답해 주고 싶어서 그녀가 말하기 편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도 세연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말했다.
- {어디에 나갈 건지 물어봐도 돼? 어, 혹시나 오해하진 말고. 어디 참가할지도 다 작전일 텐데 그걸 알려 달란 건 아니고, 그냥 기준이라든가 그런 게 궁금해서.}
그녀 역시 내년엔 쇼팽 콩쿠르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갈 생각인 걸까?
어느 콩쿠르에 나갈지에 대한 결정이 작전이라는 것도 이해는 간다. 어떻게 해야 수상 확률이 높을지 계산하는 연주자나 선생님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난 그런 걸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저도 아직 정하진 못했어요. 그래서 요번엔 일종의 견학 중이기도 해요.}
- {아, 그런 거구나…….}
때문에 있는 그대로 말했다. 세연 입장에선 내가 어느 콩쿠르에 참가할지 숨기려고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결정된 게 없는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세연은 묘하게 안심하는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그건 약간 이상했다. 불확실한 대답을 해 줬을 뿐인데 왜 납득하는 것 같지?
난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에겐 도와줄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세연도 천천히 고민해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보단…… 사사하는 분께서 훨씬 잘 아실 테고요.}
- {그렇겠지만 말야…….}
또 한참이나 주저하며 무언가 고민하던 세연은 결국 털어놓듯 말했다.
- {사실 너에게 물어보라고 한 게 우리 교수님이라서.}
{예?}
- {저번에 네 연주회 보러 모스크바에 갔던 걸 교수님에게 들켰었단 이야기는 했었지?}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생이니 혼자 모스크바에 와서 연주회를 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일주일이나 되는 꼬리를 밟히지 않고 몰래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니까.
그래서 세연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난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 잠자코 듣자 세연이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그 후엔 별말씀 없으시더니, 얼마 전에 말씀하시는 거야. 네가 어느 콩쿠르에 나갈지 물어볼 수 있으면 알아두는 게 좋겠다고.}
세연의 점점 목소리가 격양되기 시작했다.
난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 작전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꺼냈던 것처럼 세연도 콩쿠르 참가에 얼마나 계산이 들어가는지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굉장히 조심스럽게 전화를 한 것도, 그리고 계속 주저했던 것도 다 이게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지금 이야기를 던져 놓고 화를 내는 건 이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고.
- {너무하지 않니? 하마터면 따질 뻔했다니까?}
{따지다니요?}
- {널 피해서 다른 콩쿠르에 참가시키고 싶으시단 말씀을 돌리지도 않고 하신 거잖아. 그게 교수님 입장에선 당연할지 몰라도, 난 정말 화가 나.}
격양된 목소리는 거의 자기 교수님의 뒷담화를 하는 정도로 열이 올라 있었다. 직접 따지진 않았어도 쌓인 게 꽤 많은 것 같았다.
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박 교수님이 정말 세연의 실력을 폄하해서 그렇게 하시고자 한다면 세연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 다른 루트로 나에 대해 조사하시면 그만이니까.
{반대일지도 모르죠.}
- {반대……?}
{예. 저와 같은 콩쿠르에 참가하길 바라실지도…….}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이 세연과 날 같은 콩쿠르에 세워 같은 심사를 받게 하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저번에 듣기로 내 연주를 귀담아 들으셨다고도 했었고, 이번엔 세연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아시게 되었으니……. 어쩌면 날 그녀의 라이벌 같은 것으로 만들려 하실지도 모른다.
그런 단순한 추리를 이어 나가던 난 복잡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내가 조용해지자 세연 역시 뭔가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교수님이 내가 널 이길 거라 생각하실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세연.}
나 역시 일종의 죄악감에 휩싸여 있긴 했지만, 세연이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건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난 세연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면 안 된다.
{무대 위에 오르기 전의 예상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어요.}
딱 잘라 이야기하자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뚝 멎었다. 내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 좁은 세계에서 누군가를 피한다는 것 역시 의미가 없죠. 대형 콩쿠르 두 개가 동시에 열려서 사람들이 갈리긴 하겠지만 그게 수상 확률에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시나요?}
- {그렇진 않겠지. 진짜 잘하는 애들은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맞아요. 그러니 참가자가 아닌 콩쿠르를 보시고 결정을 하세요. 아마 교수님께서도 저 하나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시고 물어보라 하시진 않으셨을 거예요.}
구태의연하다고 느껴질 만도 한 조언이었지만, 그래도 세연이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교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진 모른다. 다만 세연이 제자로서 잘 성장해서 기뻐하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잠깐 스치고 지나간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세연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 {알았어. 내가 교수님에게 분명하게 말해 둘게.}
{……예. 잘 말씀드리세요.}
- {응.}
이렇게까지 답변을 받았더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세연은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올곧은 아이니까 교수님에게 이야기도 올바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다.
- {그런데 타티아나.}
{예.}
- {있잖아, 나 솔직히 말하자면 내년에 너랑 콩쿠르에서 만나고 싶어. 그게 어느 곳이든 간에.}
아까 주저했던 게 마치 거짓말처럼, 그녀는 솔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약간 방심하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스멀거리는 죄책감은 남아 있다. 때문에 난 세연을 어느 이상 가까이할 수도 없고, 또 무작정 밀어내고 모질게 굴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운명이 그리 바란다면…… 그렇게 되겠죠.}
내가 내 판단에 따르고 세연이 그녀의 판단에 따랐을 뿐인데도 선택이 겹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내가 할 일을 다 할 뿐이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세연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럴지도 모르겠네.}
난 복잡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세연의 밝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