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07화 (607/1,277)

##  607화

타티아나와의 전화 통화는 꽤 길게 이어졌다.

세연은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타티아나와 종종 메시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그동안 타티아나가 먼저 연락을 취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내가 별로 달갑지 않은 거 아닌가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타티아나는 세연과 거리를 두려고 했었고.

하지만 그런 태도가 세연에겐 무작정 밀어내려는 태도로 보이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세연으로 하여금 흥미를 가지게 만들었다.

저 애는 왜 날 무서워하는 것 같지. 난 무서운 사람이 아닌데.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직감과 생각 등이 세연의 머리를 빙빙 돌고, 그러면 곧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막상 연락을 하면 반갑게 받아 주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모든 말씨에 상냥함이 배어 있어서 어떻게 봐도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싫어했으면 리사이틀에 초대했을 리도 없었고.

적어도 싫어하진 않으리란 믿음만으로 세연은 어떤 일이든 연락할 만한 핑계가 있으면 가끔 연락을 하곤 했고, 오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화면에서 보게 된 것 역시 좋은 핑계였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도 있었고.

그런데 용건만 주고받고 금방 끊어질 거라 생각했던 전화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 정말? 예카테리나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다니는 거야?}

- {예. 굉장히 어릴 때 영재 클래스에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라는 전 세계 음악인들의 축제가 열려서 그런가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특히 화면으로 봤던 예카테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타티아나는 자기 일인 것처럼 살짝 들뜬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저런 큰 무대에서 파이널까지 간다면, 타티아나가 다른 친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저렇게 이야기해 줄까?

세연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상상을 하다가, 고개를 저어 흐트러뜨리고는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워선 타티아나가 흥미를 보일 만한 주제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그럼 한참 어릴 때부터 교수님들에게 배우는 거겠네?}

- {음악이론 등은 통합 과정에서 배우고…… 보통은 클래스에 들어가자마자 지도 교수님을 만나서 레슨을 받게 되죠.}

{그건 정말 부럽네…… 아니다, 무서울려나?}

- {세연도 음대 교수님에게 레슨을 받고 계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어…… 그렇네?}

어려서부터 교수님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건데 생각해 보니 세연도 같은 입장이었다. 물론 음대에 입학해서 배우는 건 아니고 학교 밖 비공식 제자 같은 것이지만.

그래서 교수님이 날 그렇게 혹독하게 가르치지 않으시는 건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던 세연은 문득 중얼거렸다.

{난 운이 좋았던 것 같아.}

- {운이요?}

{응. 원래 박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음대의 교수님이시거든? 원래 그런 분 레슨은 돈 주고도 못 받는다고 들었어.}

타티아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박 교수의 위상은 굉장히 높았다. 세연은 교수의 지도를 받은 지 2년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재작년 10월인가…… 우연히 우리 학교에 오셨다가 내가 피아노 치는 걸 들으시고는 갑자기 제자가 되어 달라 하시는 거야. 얼마나 놀랐…… 아, 타티아나 너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이 스카우트 제의했었다고 했지?}

- {예.}

예상했던 대로 무덤덤한 대답이었다. 정말 자신이 있으면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세연은 웃으며 말했다.

{난 그런 제의를 거절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하는 애였고…… 그래서 덥석 받아들였지. 아! 후회 같은 걸 하는 건 아니야.}

- {어떤 말씀이신지 알아요.}

교수는 정말 훌륭한 교육자였다. 비단 피아노뿐만 아니라 세연을 다방면으로 케어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레슨비는커녕 선물로 드리는 것조차 나중엔 괜찮다고 거절하실 정도니, 할 수 있는 건 사력을 다해 교수가 바라는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것뿐이었다. 세연이 짧은 시간 사이에 실력이 좋아진 건 그런 강력한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녀는 자신이 교수의 마음에 드는 제자일 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다. 왜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면 종종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지, 그러면서도 타티아나라는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실력자를 의식하는 것 같은 태도를 하는지.

뭔지 모를 기분으로 몸을 돌려 드러누우면서 세연이 말했다.

{아무튼…… 난 너희처럼 실력이 좋아서 교수님 눈에 든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예카테리나나 타티아나와는 누가 봐도 다른 경우여서 그렇게 말했는데, 갑자기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미세한 노이즈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던 타티아나는 이윽고 딱 자르는 투로 말했다.

-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응?}

- {좋은 음대의 교수님이라 하셨죠? 그런 분이 시간이 남아서 레슨을 하시진 않을 거예요.}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세연은 얌전히 혼나는 기분으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까 콩쿠르 이야기를 할 때도 승패는 무대에 가 봐야 아는 거라고 냉정하게 말하기도 했고……. 타티아나는 약한 소리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타티아나는 세연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서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 {그 기회의 가치를 아신다면, 그걸 받아 누리는 자신을 과소평가 하지 마세요.}

그런데 같은 나이의 학생에게 혼이 나면서도 세연은 그리 기분이 나쁘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하는 말들은 틀린 말도 없거니와, 전부 세연을 위해서 하는 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미소가 나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아이를 전화 너머에 두고 웃어 버렸다간 진짜로 한 소리 들을게 분명한지라, 세연은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베갯잇 끝을 쥐었다.

{아무튼…… 타티아나는 어때?}

- {어떤 말씀이신가요?}

어설프게 주제를 돌리려는 티가 확 나는데도 타티아나는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고 세연의 말에 집중해 주었다. 세연은 그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중앙음악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는지 궁금해서. 거기도 지도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

- {예, 맞아요.}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셔?}

중앙음악학교는 러시아에서 제일가는 음악학교이니만큼 그 선생님들도 분명 대단할 것이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의 진학을 미뤄 가면서까지 학교에 남아 있으니까, 분명 엄청 유명한 분에게 배우고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있었다.

타티아나는 잠깐 주저하더니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께서 지도를 맡아 주고 계시고…… 한 분 더 계세요.}

{응?}

- {정말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계셔서…… 지금 전 두 분에게 사사하고 있어요.}

스승을 여럿 두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음악학교에서 동시에 그러는 건 드문 거 아닌가? 러시아는 원래 그런가?

세연은 그런 부분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순간적으로 끔찍한 상상을 떠올렸다.

{숙제도 두 배니?}

- {아하하, 그렇진 않아요.}

그건 정말 다행이네.

타티아나의 웃음소리에 전염되어 세연도 따라 웃으며 물었다.

{다른 한 분이 학생을 정말로 생각해 주시는 좋은 분이신가 보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 {아……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라 해요.}

{알레니체프?}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러시아 연주자들의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워낙에 다들 어려운 이름들이었지만, 맨 뒤의 성만이라면 기억할 수 있었다.

세연은 곧 한 연주자와 시그니처 레퍼토리 등을 떠올려냈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와, 설마 그 바흐 스페셜리스트 알레니체프?}

- {바흐로 유명하신 건 맞아요.}

{세상에, 알레니체프의 제자였다니.}

깜짝 놀란 세연은 양다리를 파닥거리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황망하게 주변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정신을 차리곤 바로 책장 쪽으로 향했다.

모아 놓은 음반들을 마구 뒤적여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찾아냈다. 연주자 이름은 바로 구세프 알레니체프였다.

세연은 사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변주곡적인 형식으론 어떨지 모르겠지만 너무 고전 쳄발로 곡이었기 때문이다. 곡의 길이도 피아니스트에 따라 40분에서 1시간이 넘는 것까지 제각각이라 뭘 들어야 할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알레니체프의 연주만은 좋았다. 세연은 처음으로 50분에 걸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바흐에 대해서만큼은 그 이름이 굉장히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잔뜩 흥분한 그녀가 말했다.

{나 시디도 있어! 그런 줄 알았으면 저번에 갔을 때 인사시켜 달라고 할걸!}

- {아하하하,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나요?}

{그랬으면 미리 시디 가지고 가서 사인 받…… 아니, 갑자기 그러면 무례하다고 싫어하실려나.}

세연은 피아니스트 알레니체프에 대한 소문들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듣기론 키가 190cm 가까이 되고 성격도 굉장히 무섭다고 하던데……. 타티아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순 없었지만 솔직히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지레 겁을 먹은 세연의 목소리를 듣고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 {제가 부탁드리면 괜찮을걸요?}

소문은 소문일 뿐인가? 아무렴 그렇게 무서운 분이면 중앙음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리가 없……. 그런데 네가 부탁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여러모로 걱정되는 점들이 있긴 했지만, 세연은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에 꼭 사인을 받고 싶기도 했다.

{다음에 진짜 부탁할게. 아, 나중에 우리 교수님도…….}

당연한 조건으로 세연은 자신이 존경하는 교수도 소개해 주겠다 하려 했지만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와서 말을 툭 멎었다.

알 수 없는 직감이 이상한 경고를 해 왔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봐야 그 누구도 그리 기뻐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경고.

이유는 없었다. 전혀. 그저 석연찮은 기분이 느껴질 뿐이었다. 세연은 그 부분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 {언제라도 좋으니 다시 놀러 오세요. 세연.}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은 세연의 목소리를 미처 다 듣지 못했는지 타티아나는 그렇게 다음을 기약했다.

{응.}

슬슬 전화를 끊어야 할 때였다. 시계를 보니 2시 30분. 지금까진 타티아나와 이야기를 하느라 졸린 줄도 몰랐지만 시간을 다시 자각하고 나니 막 하품이 나오려고 했다.

{그럼…… 이만 자러 갈게. 타티아나. 다음에 또 통화해 우리.}

- {저도 목소리 들어서 좋았어요.}

빈말로 그냥 하는 말 같진 않았다. 타티아나도 혼자 있으면서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했던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해 봤지만 친구도 많고 집도 잘사는 그녀라면 밤중에 외로워져도 굳이 영어로 대화하지 않을 상대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워낙 예의가 바른 아이니까. 세연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안녕.}

- {좋은 밤 되시길.}

전화를 끊고 나니 다시 고요해졌다.

세연은 손에 들고 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으려다가, 그대로 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음반 케이스를 여니 꽤 오랜만에 보는 디자인의 음반이 놓여 있었다. 세연은 음반을 빼내선 침대 옆에 있는 시디플레이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작센의 영주였던 카이저링크 백작의 의뢰로 쓰인, 불면증 치료용 곡이라는 말이 있었다. 세연은 이 곡을 몇 번 들으면서도 왜 이 변주곡이 불면증 치료용 곡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자기 직전에 이렇게 들으면 제 기능대로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그렇게 음악을 틀어놓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변주곡의 선율은 세연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나갔고, 절로 음악가로서의 본능이 곤두섰다. 그녀는 다음 변주가 궁금해서라도 곡을 중단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세연은 50분 내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면서 타티아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교수 그리고 자신의 음악 등에 대해 생각하다가, 음악이 멎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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