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08화 (608/1,277)

##  608화

며칠간 나는 청중이며 매니저이자 방학을 맞이한 학생이었지만, 연주자로서의 자아를 망각한 건 아니었다.

예카테리나가 파이널 라운드를 위해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하는 사이 나는 학교에 가서 레슨을 받기도 했다.

“타티아나. 잘 들어라. 연주자란 언젠가 홀로 서야 할 때가 온다. 방학은 그때를 대비하기 위한 연습이기도 하지. 선생의 지도 없이 혼자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란 말이다.”

그런데 미하일 선생님이 안 계셔서 대신 찾아간 구세프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쓰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바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도망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언제까지고 제 선생님일 거예요.”

“내가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닌…… 하, 지금 장난 치는 게냐?”

“그럴 리가요.”

“갈수록 능글맞아지니 원…….”

선생님은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능글맞다는 표현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서 조금 재미있었다.

이것도 기억의 혼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과거의 행동들로부터 유추해 낸 그녀의 성향과 취향도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어떠한 자각에서 비롯된 동화는 아니었다. 여전히 난 모든 행동을 조심스럽게 통제하고 있지만, 무의식적인 부분에서부터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 느낌이다.

불쾌하거나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가야 할 길을 가는 기분이다.

난 선생님의 투덜거림을 웃어넘기며 다시 부탁했다.

“혼자 연습도 했어요.”

“이전 레슨에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면 많이 지났죠.”

“그냥 혼자 하지 그래.”

매정한 목소리가 조금은 아프다. 하지만 난 무턱대고 이렇게 찾아와서 시간을 내 달라 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연습해도, 조금 지체되고 헤맬지언정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건 안다. 단지 지금까지의 내 음악들의 과정을 지켜보시면서 앞으로의 방향도 객관적으로 봐 주실 수 있는 분들에게 내 결과물을 보여 드리고 싶을 뿐이었다.

난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번 겨울방학엔 혼자가 아니었기에 모든 게 가능했었다고 생각해요.”

“…….”

“전 아직 선생님이 필요해요.”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저번 방학 때 약속을 지켜 쇼팽 소나타 1번을 레슨해 주셨던 일이 기억나신 것 같다.

그때 내가 곡 제목만 받고 혼자였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때…… 난 널 극한으로 몰고 가는 일밖에 한 게 없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 엄격한 선생님이 죄책감을 느끼실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긴 했다. 당시 난 정신적으로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몸에 실제 악영향을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시력의 저하를 느끼면서도 연주에 집중하고 쓰러질 정도로 매달릴 수 있었던 건, 구세프 선생님과의 약속이 선생님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강하게 묶어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레슨 시간이 없었더라면 전 결코 이겨낼 수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최선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악착같이 그 곡에 매달렸기 때문에, 한승우가 거의 완벽한 복원을 해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더 나은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나 혼자 연구를 계속했다면 그 음악을 오래된 박제라고 여기고 딛고 올라설 생각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매듭을 지어 버렸다면 영원히 트라우마에 짓눌리고, 내 자신의 껍데기에 갇혀 숨이 막혀 죽어 갔으리라 생각한다. 탈피를 하지 못한 바닷가재처럼. 아마 연주자 생활도 길게 못 하지 않았을까. 그런 어두운 상상이 든다.

물론 지금은 전부 해결된 문제들이었다.

지금 난 몇몇 음악들에 대해 아련한 기분 등을 느끼긴 하지만 격렬한 충동이나 갈망 등을 느끼고 있진 않다. 한 음악적 해석을 내 정체성이라 여기며 무조건적으로 살려 내려는 일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내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타락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가만히 날 보시던 구세프 선생님은 작게 읊조렸다.

“……그런가.”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그간의 내 마음을 모두 읽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워낙 예리한 분이시기도 하고, 날 오래 보시기도 했으니 정말 읽어 내셨을지도 모르겠다.

문제가 많았던 예전엔 이런 내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숨기고자 했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선생님은 눈길을 돌려 잠시 말없이 책상 끄트머리를 바라보시더니, 헛기침을 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눈빛이었다.

“아무튼, 지나간 저번 연주회의 곡을 레슨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말이다…….”

중앙음악학교에서 제일가는 호랑이 선생님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린다.

“그렇게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마.”

곧 날 물어뜯을지도 모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난 희열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더 말하지 않고 피아노 쪽을 가리켰고, 나 역시 다른 변명이나 준비 없이 곧장 그 앞에 앉았다. 어떤 곡을 연주하고 레슨할지에 대한 이야기조차 없었다. 마치 정해진 약속처럼 난 머릿속 레퍼토리에서 한 곡을 꺼냈다.

최근 연구하는 곡들은 많았지만, 바흐 전문가로 저명한 구세프 선생님에게 지금 레슨을 받을 만한 곡은 얼마 전 마티네 연주회에 올렸던 곡이 제격이었다.

부조니 편곡의 바흐 샤콘느.

본래 무반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애잔한 선율이 레슨실을 울린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음들을 당겨와 붙이고 다시 늘어뜨린다.

전반적인 해석은 연주회에서 했었던 그대로였지만 홀의 울림이 없기에 터치를 조금 조정하고 무대에서 스스로 조금 아쉬웠던 부분들을 다듬은 연주였다.

머리에 있는 그대로의 음악을 피아노로 구체화시킨 지 약 15분. 난 강렬한 비극의 화성을 마무리 짓고 손을 내렸다.

“…….”

구세프 선생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난 이 곡을 꽤 공들여 준비했으므로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평을 기다렸다.

곧 선생님은 한 손을 들어 올리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냥 혼자 하라는 말은 철회하마.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혼자 열심히 했었군.”

거의 사과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약간 놀라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미 내가 레슨했었던, 그리고 홀에서 들었던 음악과는 달라져 있군. 연주회 후에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다듬은 흔적이 느껴져.”

솔직한 마음이 담긴 듯한 평이 내게 향하고, 다음은 짓궂은 목소리의 칭찬이 이어졌다.

“이걸 왜 가지고 온 게냐? 자랑하려고?”

“그, 그렇진 않아요.”

“그렇지 않긴 무슨. 아주 선생을 가지고 노는군.”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질책으로 오해하기에 딱 좋았지만 나는 웃으며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이건 아까 선생님의 말대로 딱히 내가 능글맞아져서가 아니라, 그저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 스타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몇 번 장난을 거시더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자 곧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툭툭 쳤다.

“미하일의 대신이나 제대로 해야겠군. 그래, 요즘은 뭘 하고 지내나? 타티아나. 듣자하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구경 다니고 있다면서.”

“아…… 에르네스트도 같이 보고 있어요.”

“그 녀석한테서 들었다.”

이미 에르네스트가 왔다 간 모양이다. 난 선생님께서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축약해서 말씀드렸다.

물론 최근 있었던 가장 큰 일은 예카테리나를 초대해서 마음 편히 연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구세프 선생님은 턱을 매만지며 말씀하셨다.

“예카테리나라…… 몇 번 봤었던 기억이 나는군.”

“알고 계신가요?”

“그래. 우리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생으로서 유망해 보이는 연주자들은 봐 둘 필요가…….”

그런데 기억을 되살리듯 중얼거리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내 쪽을 휙 돌아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타티아나 너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게냐?”

“예?”

“그러니까…… 예카테리나가 유망해 보였냔 말이다.”

난 겨우 열여섯 살짜리 학생이다. 선생님의 질문은 내게 하면 안 될 질문처럼 들렸다.

하지만 곧바로 아니라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예카테리나와의 친분이었겠지만, 예카테리나가 콩쿠르 준비에 문제를 겪는 것을 바로 해결해 주고자 했던 데엔 그 문제만 치워 내면 그녀가 잘 해낼 것이란 믿음도 굉장히 짙게 깔려 있었다.

난 모종의 기시감을 느꼈다. 선생님의 시선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느꼈던 기분이었다.

그런데 진짜 선생님을 눈앞에 두고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덜컥 든다. 난 그저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일 뿐이다. 선생님이 보시기엔 정말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구세프 선생님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문제가 있단 말이 아니니 그렇게 보지 말고. 난 되레 귀중한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으니까.”

“귀중한 부분이요?”

“그래. 교사로서의 자질 말이다.”

설마 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긍정적인 목소리로.

난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고, 선생님이 어떤 생각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도 궁금해서 일단 그 말을 받아 대답했다.

“그런 말 종종 들어요.”

“그러냐.”

“하지만 귀중한 부분이라는 말은 처음이에요.”

지금 생각나는 솔직한 감상 그대로 전하자 구세프 선생님은 소리 내어 웃더니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많은 음악가들이 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속을 학교에 두지 않아도 말이다. 그런데 너처럼 자연스럽게 음악계 전반의 공리를 생각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난 단지 예카테리나에 대한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구세프 선생님은 내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바람 등을 날카롭게 읽어 내고 있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만큼 두렵기도 했다.

선생님은 사전적 의미처럼 말씀하셨지만, 음악계 전반의 공리라는 게 얼마나 어쭙잖은 생각인지 잘 안다. 한마디만 더 잘못 한다면 구세프 선생님이 낱낱이 모든 걸 분석해서 내 멍청함을 바로잡아 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옳은 일이겠지만, 난 그게 두려웠다.

나도 모르게 절로 방어적인 말이 나왔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예카테리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를 초대하려 했겠죠.”

“그건 이상주의자나 할 소리고.”

“……예?”

“가까운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곧 세상을 위한 일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없나? 넌 그 말을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행 중인 셈이지. 그렇지 않나?”

“…….”

내 생각과 바람을 긍정하면서도 냉철하게 모든 걸 판단하는 목소리였다.

무작정 그 말에 기대고 싶기도 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옳겠지. 난 사실 합리적인 사람일지도 몰라. 현실적인 해결법을 선호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면 편해지는 것이 많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난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했다. 이젠 성격대로 하는 일도 많았지만, 이런 건 되는 대로 받아들여서 될 일이 아니다.

“모르겠어요. 전 제가 이기적이라 생각하니까요.”

“설마 혼자서 점심밥만 먹어도 이기적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제, 제가 그렇게까지 바보인 줄 아세요?”

“푸하하하.”

나름 진지하게 듣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느닷없이 농담조로 말씀하시더니 크게 웃어 버렸다.

지금 내가 그렇게 웃긴가? 아깐 쓸데없이 거창한 속마음을 들킨 게 부끄러웠고 지금은 그냥 창피했다.

난 살짝 약이 올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보기 드물게 킬킬거리더니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미하일이 왜 그렇게 너와 이야기하는 걸 재미있어하는지 알겠군.”

“…….”

미하일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지금도 놀리는 말이라는 건 알겠지만,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의 말 또한 누그러졌다.

“그래, 많이 고민해 봐라. 타티아나. 되도록 많이.”

장난치는 것 같은 어투는 그대로였지만, 자상한 눈빛과 목소리는 누그러지다가 못해 푹신하게 변해 있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잠깐 멍하니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잘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간 앞으로 얼마나 놀림당할지 모른다. 난 이제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다.

그냥 도망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 찰나, 갑자기 내 뒷머리를 퉁퉁 치는 것 같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들어와라.”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곧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보니 에르네스트가 네가 왜 거기에 있냐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도 비슷한 표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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