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09화 (609/1,277)

##  609화

방학엔 선생님들의 정식 레슨이 없다. 때문에 구세프 선생님도 조금 한산하실 거라 생각해서 레슨을 요청했던 건데…… 정식 제자인 에르네스트가 이 타이밍에 레슨실에 올 줄은 몰랐다.

먼저 인사를 건네온 건 에르네스트 쪽이었다.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난 뒤늦게 인사를 받았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상황은 이제 익숙하다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물었다.

“레슨이야?”

“예, 잠깐 부탁드렸어요.”

“그럼 일단 난 나가 있을까?”

내가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을 받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미 굉장히 오래된 일이라서 에르네스트도 다른 친구들도 그러려니 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난 다른 학생이 없을 때 살금살금 눈치를 봐 가면서 받는 편이었다.

모두가 이해해 준다 해도 구세프 선생님의 시간과 집중력을 내가 어느 정도 빼앗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시간이 얼마가 지나더라도 그건 절대 당연해지지 않는다. 언제나 감사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나 때문에 에르네스트의 시간이 미뤄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내 레슨은 끝나기도 했고.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아뇨! 이제 끝났어요. 제가 나갈게요. 에르네스트도 레슨이신 거죠?”

“난 그냥 숙제 내러 온 거라서.”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방을 툭 치며 짧게 말했다.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근래 하고 있는 작곡에 대한 일 때문에 찾아온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잠깐 기다려 줄래. 금방 끝나.”

“그…… 그런가요?”

에르네스트를 만나서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지만 보통 레슨은 짧아도 1시간 정도 걸린다. 무작정 기다리기도 애매해서 어쩔까 싶었는데, 숙제 제출 정도는 금방이니 그냥 옆에서 기다리면 된다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금방 끝나긴 뭘 네 마음대로 금방 끝내나? 에르네스트.”

우리가 조잘거리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구세프 선생님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건 에르네스트의 말실수였다. 이미 레슨실에 왔다면 이 자체로 수업의 일환이라 봐야 한다. 이 수업이 언제 끝날지 결정하는 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사나운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곡이나 내놔 봐라. 그 곡의 수준 고하에 따라 네가 돌아갈 시간이 정해질 테니.”

“여기 있습니다.”

“흠.”

이런 숨 막히는 상황은 자주 겪는지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악보를 내밀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아예 삐딱하게 흠을 잡아 보겠다는 듯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내리깐 눈으로 악보를 바라보았다. 문제점이 보인다면 한 페이지로 2시간 동안 야단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문제가 없다면 구세프 선생님은 없는 문제를 만들어서 억지로 혼을 내는 사람이 아니다.

한참이나 첫 페이지를 보던 선생님은 고개를 까딱이더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저 정도로 작정하고 보시면 분명 아주 작은 흠집이라도 한 소리 하실 만한데, 에르네스트가 생각보다 정말 숙제를 잘 해 온 모양이다.

고요 속에서 호랑이가 악보를 읽어 내린다. 난 내 숙제도 아닌데 긴장감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두 번째 페이지도 어느 정도 넘어가자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생님.”

“그래.”

“그 곡은 제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무슨 말 같잖은 소리냐?”

선생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를 노려보았다. 나 역시 저절로 고개가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말을 한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아무 문제도 없다는 표정 그대로였다. 구세프 선생님이 답답하다는 듯 악보 뭉치를 흔들었다.

“그럼 내 손에 들린 이건 무슨 곡이지?”

천하의 구세프 선생님이 쉽게 흠을 잡지 못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곡이다. 그런데 그걸 이제 와서 제출하지 않겠…….

그런데 이미 선생님이 보셨다면 제출한 것이지 않나? 애초에 숙제의 제출이란 정의가 뭐지? 학생이 자신의 공부를 했다는 것에 대한 증빙자료를 서면으로 넘기는……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다 보니까 뭔가 엉뚱한 생각만 드는 것 같다. 난 그냥 생각하지 않고 에르네스트의 설명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는 담백하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건 그냥 지금까지 제가 놀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로 낸 거고요.”

“놀지 않고 열심히 했다?”

“예. 그 정도로만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듣고 보니 그렇게 이해가 안 가는 말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낸 악보를 그저 시간의 사용처에 대한 알리바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치부하기엔 곡의 완성도가 너무 높은 게 분명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끝까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에르네스트를 노려보다가, 결국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살다살다 숙제를 다 해 놓고도 안 한 걸로 쳐 달라는 녀석은 처음 보겠군.”

“단순한 숙제가 아니니까요.”

“……그래.”

수학 문제를 풀어오거나 영어 번역을 해 오는 등의 단순한 숙제들은 그저 그 시간을 공부에 온전히 투자하는 걸 증명하는 것으로 숙제의 의미가 완료된다.

하지만 작곡은 그렇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 내에 악보를 다 채우더라도 결국 작곡가 본인이 그 곡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마지막에 인정하지 않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난 그런 결정을 정말 존중해 주고 싶었다.

구세프 선생님 역시 에르네스트의 의사를 무시할 생각은 없으셨다. 다만 곡이 조금 아까우신 듯하다.

“어쨌든, 내게 이걸 보여 주었다는 건 폐기하겠단 건 아니고…… 네 곡으로 내는 건 보류하겠다는 건가?”

“네. 지금은.”

보류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지 구세프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한마디를 더 얹었다.

“그리고 악보 출판 건도 천천히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에르네스트.”

막 인내심이 무너지는 걸 느꼈는지 구세프 선생님이 다시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네가 먼저 하자고 하지 않았나?”

이건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아마 에르네스트가 자신이 쓴 곡들을 악보집으로 엮어 내고 싶다고 말하고 구세프 선생님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하면 선생님 입장에서는 화가 나실 만도 하다.

에르네스트도 지금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층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냥 제가 납득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죠.”

“납득?”

“무의식이라는 게 무섭더군요.”

“…….”

두 사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단지 서로의 의중을 꿰뚫는 것 같은 눈으로 마주할 뿐이다.

난 잘 모르는 이야기에 끼어들 수도 없이, 레슨실 구석에서 얌전히 바라보며 이야기가 좋게 끝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구세프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 든 악보를 에르네스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걸 알았으면 됐다. 좋다. 그럼 이건 제출하지 않은 걸로 하고…… 제출 기한은 네가 원하는 만큼 늘려 주마.”

“감사합니다.”

그 내용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마음대로 해 보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섬뜩했다.

“이 숙제에 대한 기한일 뿐이다. 그사이에 대위법과 변주곡 숙제를 잔뜩 내줄 테니 더 바빠질 각오나 해라.”

“이미 작곡과에서 대위법 숙제 받은 게 한가득인데요.”

“더 해!”

에르네스트가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버럭 고함을 치며 더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 에르네스트도 별수 없었다.

일만 더 크게 만들어 놓은 거 아닌가요……? 괜히 내가 더 불안해진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제야 구석에 앉아 있는 날 보더니 손을 휙 내저었다.

“됐다. 나가 봐라. 저기에 있는 녀석도 데리고.”

“가 보겠습니다.”

에르네스트는 미련 없이 뒤돌더니 내게 말했다.

“가자. 타티아나.”

“아…… 그, 그래요.”

멍하니 두 사제의 대화를 보고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곤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구세프 선생님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책상에 턱을 괴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나가자마자 담배를 피우시지 않을까 싶다.

분명 선생님은 만만찮은 분이시지만…… 그분을 머리 아프게 하는 에르네스트는 대체 얼마나 더 만만찮은 학생인지 모르겠다.

선생님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음악에 대한 완성도를 분명히 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하나.

여러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그런 내 생각도 모르고 시원하게 말했다.

“금방 끝났지?”

지금 그게 문제예요?

애초에 그는 곡을 내놓고는 평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일찍 끝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자기 말대로 된 것을 보라는 듯 킥킥거리는 그를 보니 부아가 치민다.

하지만 잔뜩 흘겨봐도 에르네스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난 결국 구세프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한숨을 쉬며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작곡이 잘 안되시나요?”

“아니? 아무 문제 없어. 하던 대로 하고 있지.”

“그러신가요……?”

“응.”

“혹시 그 곡, 제가 봐도 되나요? 궁금하네요.”

다시 돌려받은 그의 곡을 난 아직 보지 못했다.

대체 어떤 곡이길래 구세프 선생님은 보시면서 전혀 흠을 잡지 못하신 건지, 에르네스트는 그걸 자신의 숙제로 제출하지 않은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예상외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보류하겠다고 말하던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정말로 안 된다는 목소리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은 곡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한다. 그 또한 일종의 프라이버시라 할 수 있을 테니.

그래도 그냥 알았다고 하자니 아쉬워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왜요? 실패작이어도 괜찮은데.”

“실패작이 아니라…… 그냥 더 봐야 할 것 같아서.”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중에.”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잠시 동안 말없이 그렇게 복도를 거닐었다.

방학이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학생은 없었다. 마치 우리 둘이서 이 복도를 차지한 기분이었다. 다만 멀리서 들려오는 악기 소리가 있었다. 아마도 바이올린과 학생인 것 같은데 방학인데도 참 열심히 한다. 우리도 비슷하긴 하지만.

“타티아나.”

“……예.”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고 약간 정처 없이 그렇게 발길을 맞추어 걷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문득 날 불렀다. 고개만 돌려 올려다보니 그가 주저하며 물었다.

“어제 물었었잖아. 내 첫 소나타에 대해.”

그 곡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나? 작곡가로서 악보에 모든 걸 담아 해석은 맡겼으니 손을 떼겠다는 의미로 이해했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어쨌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랬죠.”

“뭘 물어보려고 했었던 거야?”

이제 와서 어떤 기준이 바뀐 건지 아니면 흥미가 생긴 건지 모르겠으나 난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첫 악장에서 주제가 갈라지며 스케르잔도scherzando 부분으로 넘어가잖아요? 전 그 부분을 영상처럼 부드럽게 넘기고 있는데 책처럼 넘겨도 될까 싶어서요.”

약간 모호한 비유였지만 그라면 충분히 요지를 이해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라면 늘 진지하게 듣는 그가 갑자기 웃으니 약간 당황스럽다. 내 말이 그렇게 웃겼나? 난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왜 웃으시나요?”

“역시 그런 게 궁금했던 거지?”

“?”

이제 와서 무슨 말이에요?

오늘따라 그는 상태가 약간 이상해 보였다. 의아함을 넘어 걱정에 다다른 눈빛으로 바라보니 에르네스트가 웃음을 참아 넘기며 말했다.

“오늘 시간 어때? 타티아나.”

어딘가 놀러 가자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도 착각의 여지가 없었다. 난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럼 잠깐 연습실 들렀다 가지 않을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난 그와 함께 비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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