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0화
에르네스트가 먼저 아무 연습실이나 열고 들어갔다. 난 그의 뒤를 따랐다.
7월의 연습실의 공기는 따끈한 무언가가 푹 눌러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에르네스트는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문을 열고 환기부터 시켰다.
시원한 바람과 햇살이 피아노 위로 향한다. 그 옆에 선 에르네스트는 잠시 창밖을 내려보다가, 햇빛을 뒤로하며 날 바라보았다.
“이렇게 둘이서 연습실 온 건 오랜만인 것 같네.”
“그렇네요.”
작년만 해도 연습실에서 자주 대결도 하고 연구도 했었는데…… 올해 와선 에르네스트는 작곡으로 바쁘고, 나 역시 쇼팽을 연습하다가 일주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던 적도 있었고 그 후엔 혼자 곡들을 정리하고 리사이틀을 준비하느라 정신없기도 했다.
최근에 있었던 마티네 연주회는 아나스타샤까지 합쳐서 세 명이서 연구하고 준비했었다. 요즘은 계속 예카테리나와 함께 연습했었고. 그래서 에르네스트와 둘이서 연습실에 온 건 정말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픽 웃더니 가볍게 손목을 흔들었다.
“간만에 속주로 손이나 풀어 볼래?”
“자신 있으시나요?”
“아직 상대 전적은 내가 이기고 있을 텐데.”
난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난다. 곰곰이 잘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계속 지고 있던 상태였던 건가?
“질 수 없겠네요.”
호기롭게 대답하자 에르네스트는 마음에 든다는 듯 경쾌한 동작으로 겉옷을 벗어 놓았다.
“곡은?”
“이걸로.”
이런저런 부차적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곧장 피아노 앞에 앉더니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스크리아빈의 연습곡 op.8의 1번.
올림다장조의 연속되는 화성이 연기처럼 새어 나온다. 그 연기들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
본래 이보다 훨씬 느긋하게 구름처럼 풍성한 질감을 그려 낼 수도 있는 곡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 곡을 족히 1.5배는 빠르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티큘레이션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포인트를 잡아내며 음악을 이룬다.
신기하게도 그 음악은 원래 속도에서 느껴지는 것과 굉장히 달랐다. 그냥 단순한 속주가 아니라 마치 독립되어 있는 다른 곡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세부적인 수정이 있거나 프레이징을 뒤튼 것도 아닌데 대단한 일이었다. 작곡을 배우면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기 때문일까? 그의 실력은 자주 봐 왔지만 그래도 신기했다.
1분도 안 되는 사이 연주는 끝났다. 에르네스트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자.”
“……못 따라 할 것 같은데요.”
“따라 할 필요 없잖아? 네 음악을 하면 그만이지.”
에르네스트는 교과서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난 피아노 앞에 앉지 않을 수 없었다.
건반을 마주하고도 한참이나 방금 전의 선율이 떠올랐다. 어디서 잘랐더라? 여유를 주어야 할 부분도 있었는데.
여러 생각을 하며 건반을 연주해 나갔다.
“…….”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속도로만 따지면 나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빠른 속도 안에서도 피어나는 음악성을 놓고 보자면 오늘은 에르네스트에게 졌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꽤 근접하게 잘 한 것 같긴 한데…… 괜히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결정적인 디테일이 조금 모자랐다. 공부가 일천한 탓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빙그레 웃으며 날 바라본다. 우리 사이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스스로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졌다고 말해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졌어요.”
“가볍게 승복해 줬네?”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이 상대라면 또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라면 괜찮았다. 이런 일은 언제나 있었고,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까.
난 어깨를 늘어뜨리며 일어섰다.
“어떤 걸로 사 올까요?”
“응?”
“음료수 사 드릴게요.”
지금까지 해 왔던 내기라면 대부분 음료수가 걸려 있었다. 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삐딱하게 고개를 뒤틀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걸로 넘어가려고?”
“……?”
난 조금 당황했지만,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진 명백했다. 지금까지 늘 똑같이 해 왔던 조건을 깨뜨리려는 것이다.
매번 같은 걸 하는 건 재미없을 수도 있지. 그런데 이겨 놓고 이러는 건 배신 아닌가? 약간 억울해져서 항변했다.
“다른 조건 건 것 없었잖아요……?”
“확인 안 한 건 네 잘못이지.”
그는 작정하고 치사하게 굴었다. 믿은 내가 바보인 걸까.
머리가 딱 아파 오는 걸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입으로 졌다고 시인한 걸 뒤엎을 순 없었으니까.
“이상한 걸 시키려는 건 아니죠?”
“이상한 거 뭐?”
“그야…….”
내기거리들을 궁리하던 나는 말을 삼켰다. 지금 저울을 두고 날 시험하는 건가?
애초에 내가 지금 입을 열어서 유리할 게 없었다. 그가 가늠할 수 없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지금 정도를 넘어서면 다음에 각오하는 게 좋을 거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이겨 놓고도 마치 진 사람처럼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가볍게 말했다.
“한 곡 더 연주해 줘.”
“예?”
“아까 네가 물어봤던 것 있잖아. 1악장만 연주해 줘. 책처럼 표현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네 피아노가 더 듣고 싶어졌어.”
무슨 말을 하나 기다렸던 나는 연주를 듣고 싶다는 말에 머리가 식는 걸 느꼈다. 사실 그런 거라면 내기 조건이 아니라도 언제라도 해 줄 수 있는데.
왜 지금 듣고 싶다는 걸까. 그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약간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내 음악이 무언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사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아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었다.
***
타티아나는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교복 차림이었다. 학교에 오는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게 분명했다.
처음엔 약간 고지식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경건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교복을 입고 올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셔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내기에서 졌다고 시인하고, 얌전히 에르네스트의 조건을 받아들인 타티아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소리를 내지 않고 의자 위에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건반을 내려다본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타티아나의 모습을 옆에서 비추었다. 마치 고요한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을 몰래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
천천히 타티아나가 건반을 짚는다. 서사시와 현악의 뮤즈인 칼리오페의 노랫소리가 천천히 울린다.
이 곡을 쓰기 전부터 에르네스트는 이 광경의 심상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상당히 오래된 심상이었다.
제목도 없이 무작정 곡을 쓸 땐 그저 타티아나가 연주할 만한 환상곡을 썼을 뿐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로지 그녀에게만 어울리는 곡을 쓰고자 했던 것 같다.
예카테리나가 했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곡은 타티아나에게 바치는 친애의 곡이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그녀만을 위해 무언가를 바친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정말 숭배에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에르네스트의 내면엔 그런 무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 어떤 피아니스트에게도 경애를 넘어선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처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타티아나가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 역시 에르네스트의 무의식에 그런 게 깔려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복잡하지 않고 훨씬 단순하게 애정이 넘치는 선율을 헌정했다면 그녀가 태연하게 거기에다가 제목을 붙이거나 자신의 리사이틀에서 초연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피아노를 부리는 칼리오페는 무슨 마법 같은 것으로 현을 튕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미처 생각도 못할 정도로 화려하게 음들을 흩뿌렸다가 거두어들이길 반복한다. 음악의 신에게나 가능할 것 같은 묘기를 목격하며 에르네스트는 숨을 멈췄다.
“…….”
방금 전 스크리아빈의 에튀드는 타티아나가 약간 방심하며 져 준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속주와 즉석 연주 등에 조예가 모자라서 맥없이 진 것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타티아나가 정말 모든 집중력을 동원했다면 승부는 모를 일이었다.
지금 이 연주만 봐도 그러했다. 타티아나에게 맞춰 작곡된 곡은 이미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가 완벽하게 현실에 현현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세상 그 누구라도 이보다 잘 할 수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는 조용히 연주를 감상하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어땠나요?”
연주를 마치고 난 타티아나가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박수를 쳤다.
그녀는 환하게 웃더니 옆으로 다가왔다.
“내기 조건에 부합했나요?”
“응. 충분히.”
“다행이네요.”
건반 위에서 노래를 하던 칼리오페는 어느새 그가 잘 아는 타티아나로 돌아와 있었다. 이 와중에도 성실하게 내기를 마무리 지으려 하는 걸 보며 에르네스트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다행이라는 말 후로 타티아나는 조용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아까 물어보았던 것에 대해 얼른 작곡가 평을 해 달라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길게 할 말이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
“……그뿐이에요?”
“그래, 그뿐이야.”
이미 타티아나가 그보다 훨씬 더 이 곡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만을 위한 곡이었고, 그녀에 의해 제일 잘 연주될 곡이었으니.
잠시 생각한 에르네스트는 이참에 말해 두어야 할 것 같아 그녀에게 전했다.
“그리고 하나 더 결정했어.”
“결정이요?”
“이 곡은 출판하지 않으려고 해.”
“예?”
이전에 했어야 했던 말이었다.
타티아나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더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잠시만요……. 아까 구세프 선생님에게도 말씀하셨죠. 악보 출판은 잠시 미루겠다고. 원래는 이 곡도 함께 넣어서 낼 생각이셨던 거죠?”
“그랬지.”
“그런데 왜……?”
계기는 외부로부터 있었다.
타티아나가 리사이틀에서 겨울의 표리를 연주한 뒤로 에르네스트의 에이전시로 문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연주자는 타티아나인데 에르네스트에게 문의할 일이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어서 악보를 내 달라는 말이었다.
과거에도 작곡가들은 곡을 쓰고 나면 바로 출판하지 않고 믿을 만한 연주자에게 초연을 부탁한 뒤 그 초연이 성공하면 출판을 하곤 했다. 그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7분짜리 소나타인 겨울의 표리 한 곡만을 악보로 내기엔 볼륨이 약하니 몇 곡을 더 붙여서 악보집으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작곡가로서 별다른 생각 없이 그렇게 결정했다.
하지만 뒤늦게 별다른 생각이 생겼다.
“네게 준 곡이니까.”
“헌정인이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요? 그런 식이라면 현재 있는 거의 모든 악보들을 없애야 할 거예요.”
“그건 그거고 이건 내 마음이잖아.”
무의식 속에 에르네스트가 그렸던 1악장의 풍경엔 타티아나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이 독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상연될 때 가장 완벽하듯, 겨울의 표리는 그녀가 연주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이 곡을 연주하는 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곡에 스며 있는 그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오늘 가지고 온 악보를 구세프에게 제출하지 않은 것 또한 같은 이유였다. 이 곡에도 타티아나를 주제로 하는 선율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이유로 그녀만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두는 건 되레 더 우리 두 사람만의 음악인 것처럼 특별히 여기는 것같이 느껴지지만, 그편이라면 차라리 안심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절대 타티아나를 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감정이 훨씬 강하다는 걸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 돼요.”
하지만 물끄러미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래도 변하는 건 없어. 타티아나. 내가 억지를 부리면 어떻게 할 건데?
“내 마음이라니까?”
“그건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에요.”
“뭐?”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한마디에 에르네스트는 얼이 나간 듯 대답했다.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다는 것처럼, 악보를 내지 않는 일에 대해 공공의 이익이란 말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대체 이 애는 내 음악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 거야?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들썩거린다. 에르네스트는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
“그런 것까지 따질 일이야?”
“당연하죠!”
“무슨…… 하, 하하하.”
짐짓 화가 난 것처럼 즉답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결국 웃어 버렸다.
음악가로 살면서 이렇게까지 기쁜 말을 들어 볼 수 있을까. 계속 복잡하게 머릿속을 꼬아 놓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