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1화
오늘 어딘가 이상해 보였던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모든 게 해결된 사람처럼 숨이 넘어가라 웃어 댔다.
난 약간 황당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 혹시나 그런 문제라면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항상 친구들이 아무 문제 없이 지낼 수 있기만을 희망하는 내게 있어서 지금 에르네스트가 보이는 이상행동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불안하기도 했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자,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
괜한 걱정이었어!
전부 장난에 말려든 기분이다.
짐짓 화를 내며 눈썹을 찌푸려 보았지만, 내가 화를 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킥 웃으며 말했다.
“난 공공의 이익 같은 거 잘 모르거든.”
“모르긴 왜 모르시나요? 큰 목표를 러시아 음악을 되살리는 것으로 삼고 계시는 분이.”
“듣고 보니 그렇긴 한가.”
계속 억지를 쓰는 것 같길래 어디까지 억지를 쓰나 봤는데, 막상 또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혹시나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 하면 봐주지 않고 계속 논리적으로 몰아세울 생각이었는데, 이제 와서 순순히 인정해 버리니 되레 내 쪽에서 할 말이 없어졌다.
말문이 막힌 내가 가만 바라보자 그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
불신이 깃든 눈빛으로 봐 봐야 소용없었다. 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왜 악보를 내지 않으려는 걸까. 난 여러 상황들을 가정해 보았지만 사실 그런 이유 같은 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작곡가가 자신의 모든 곡을 꼭 악보로 내야 한다는 법은 없었으니까, 전부 그의 자유였다. 지금 꼭 악보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쪽이 되레 억지 주장이다.
그래도 먼저 악보를 내기로 했다가 뒤늦게 거두었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평범한 이유가 아닐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다 해 놓은 숙제를 마지막에 제출하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최악의 상황은 내 연주가 뒤늦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세상에 보일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인데…… 어떻게 봐도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고.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 물어본다고 해서 그가 제대로 대답해 줄 리도 만무하고. 그냥 오늘은 잔뜩 놀아난 느낌이다. 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럼 됐어요.”
“어디 가?”
“집에 가서 연습하려고요.”
콩쿠르 참가자나 할 법한 말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콩쿠르와 관계없이 난 방학에 해야 할 공부가 많았고, 태만해질 수 없었다.
내 표정을 본 에르네스트가 웃으며 제안했다.
“차 한잔 마시고 가.”
“…….”
오늘도 해야 할 공부와 연습이 많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차 한잔 마시자는 제안도 거절할 정도로 바쁘게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어딘가 약간 미안해하는 눈빛이었다.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결국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간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이 거리에 잘 어울리는 굉장히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인테리어다. 겉보기엔 상당히 비싼 곳 같아 보이는 곳이었는데 막상 학생들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싸고 좋은 곳이었다. 난 친구들과 이 카페를 애용하는 편이었다.
1층엔 사람들이 많아서 우린 조용한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을 관리하고 있는 웨이터에게 캐모마일 차와 작은 케이크를 주문했고, 에르네스트도 루이보스 차와 디저트를 몇 가지 주문했다.
곧 우리가 주문한 차와 간식이 나왔다. 난 티스푼으로 찻잔을 젓는 그를 보며 약간 의아해져서 물었다.
“허브티는 잘 안 마시지 않으셨나요?”
“원래 난 커피파였지. 그런데 마셔 보니까 또 괜찮더라고.”
그의 주변에 허브티를 마시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날 따라 마시다 보니까 입맛에 맞게 된 걸까?
난 찻잔을 기울여 입술을 적셨다.
“깔끔한 맛이 좋죠.”
“근데 작업할 땐 이거 마시면 나도 모르게 자고 있더라.”
“아하하하, 정말요?”
“잉크가 다 안 말랐는데 자다가 다 묻은 적도 있…… 아니, 못 들은 걸로 해.”
책상에 앉아 작곡을 하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엎드려 자 버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나 역시 잠을 깊게 자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연습에 매진했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평소 졸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는 시간에 깨어서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어려움에 깊게 공감하며 말했다.
“힘드시겠어요.”
“할 만해.”
에르네스트는 픽 웃더니 포크로 티라미수를 잘라 입에 넣었다. 차는 허브티이지만 디저트로는 커피향의 티라미수를 시킨 걸 보니 역시 커피가 필요하긴 한가 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날 보던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그리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안 힘들어.”
“그건 그렇죠.”
“너라면 무슨 말인지 알 거라 생각했어.”
그는 킥킥거렸다. 그 역시 내가 음악에 얼마나 미쳐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문득 구세프 선생님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밤새워서 하는 포커 게임도 따면 힘들지 않다고. 그 말이 정말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난 몸소 몇 번이나 체감한 적 있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가 밤을 새워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따냈을지 굉장히 기대되기도 했다.
우린 한동안 마주 보며 웃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시겠네요.”
“두 개였으면 좋겠네. 그럼 내년 콩쿠르도 편하게 다 나갈 텐데.”
티라미수를 푹푹 자르면서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렸다. 그 역시 내년에 있는 두 개의 콩쿠르를 굉장히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저번 연주회 이후 방학 동안은 작곡에 매진하면서 피아노는 상대적으로 조금 뒷전으로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약간 있었는데, 모두 기우였다. 그가 오늘 보여 주었던 스크리아빈도 굉장했고 콩쿠르 역시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게 분명했다. 그는 원래 내가 없어도 최고의 연주자로 이름이 높던 사람이었으니까.
또 이야기가 나오니까 궁금해졌다. 저번엔 분명 비밀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 역시 아직 정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결정하신 건가요? 어떻게 하실지.”
“비밀이라니까.”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정말 결정하셨나요?”
“…….”
은근히 계속 밀어붙이니 그는 결국 포기한 듯 이야기했다.
“아직이야.”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나요?”
“중립.”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또 괜히 고집스럽게 에르네스트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정말 없는 건가?
12월까지이니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디션 DVD부터 시작해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여유 있다고 할 순 없었다. 기존 레퍼토리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난 약간 경각심을 일깨워 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아 그에게 말했다.
“원서 접수 기간이 머잖았어요.”
“괜찮아. 충분해.”
“참…….”
말 안 듣고 여유 부리는 학생을 보면 이런 기분일까.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지만, 또 선생님이라도 된 마냥 말하는 건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그만두었다. 친구들을 돕고 싶은 건 좋지만 내 뜻대로 간섭하려고 해선 안 된다.
조용히 찻잔만 기울이고 있자 이번엔 에르네스트가 내게 물었다.
“너는 결정했어?”
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에요. 이번 파이널을 보고 생각하려고 해요.”
“다 보면 뭔가 결정되나?”
“글쎄요, 결국은 동전을 던질지도 모르죠.”
“하하, 네가 콩쿠르같이 중요한 일에 동전을 던질 리가 있나.”
“……절 너무 잘 아시는데요?”
괜한 농담을 한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동전 던지기 따위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일은 없겠지.
우린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었다. 꼭 음악 이야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근래 읽었던 책들, 영화. 더 시시콜콜하게는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는 영상들까지. 함께 나눌 주제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서 한참이나 이야기한 것 같다. 에르네스트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보여 주겠다면서 화면을 툭툭 누르더니, 갑자기 말했다.
“아, 지금 막 시작했겠네.”
“무슨 시작이요?”
“아직 세미파이널 마지막 날이잖아.”
그제야 나도 시간을 확인했다.
세미파이널은 이틀에 걸쳐 치러진다. 예카테리나의 순서는 어제 끝났지만, 그래도 그녀의 경쟁자가 될 연주자들의 세미파이널 무대가 궁금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지금 볼래?”
“음악원에 가서요?”
“아니, 그건 귀찮고. 인터넷으로.”
“귀찮다니…….”
차마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을 에르네스트는 직설적으로 했다. 별로 멀지 않으니 직접 가서 봐도 좋겠지만, 지금 들어가면 오늘 콩쿠르가 끝나도록 못 나올 것 같았다. 조용한 홀에선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 것 같고.
내가 딱히 의견을 내지 않자 이걸로 결정되었다는 듯 그가 찻잔을 비웠다.
“여기서 보면 되잖아? 틀어 줘.”
“제 걸로 할까요?”
“난 배터리 없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난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에르네스트와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어서 옆으로 놓으면 같이 볼 수 있었다.
그는 디저트와 함께 나온 종이 냅킨을 이리저리 접더니 재주도 좋게 스마트폰을 세워놓았다. 어떻게 한 건지 나중에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난 막 화면 위로 올라온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저분…….”
“아, 루카스네.”
“알고 계시나요?”
“예전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그런데 넌 어떻게 알고 있어?”
콩쿠르 경력이 별로 없는 내가 미국인인 루카스를 아는 게 이상하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사실 루카스라는 연주자를 알고 있다고 할 순 없었다. 난 그와 인사도 한 번 해 본 적 없다. 이전 첫 라운드에서 이름이 스쳐 지나가길래 얼굴을 봐 둔 게 전부였다. 내가 그나마 인사를 하고 안다고 할 수 있는 건 그의 부모였다.
“그의 부모님과 만난 적이 있어서요.”
“……뭐? 어디서? 어떻게?”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며 연달아 물었다. 드디어 무언가 복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같이 계셨잖아요?”
“내가?”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제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대해 설명 드렸었던 미국인 부부.”
기억을 조금 되짚어 보던 에르네스트는 눈을 크게 떴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기억력 좋은 그가 잊을 리가 없었다.
황당하다는 듯 그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었어?”
“예. 모르셨나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
사실 이야기는 내가 다 하고 그는 멀찌감치에서 듣기만 했으니 모를 만도 하다. 게다가 루카스라는 이름은 내가 말을 걸기 전에 지나가면서 나온 이름이기도 했고.
아무튼 그는 첫 라운드를 잘 치러서 세미파이널까지 올라와 있었다. 저기 어딘가에 그의 부모님도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예카테리나의 경쟁자이긴 하지만…… 결국 실력이 모든 걸 말해 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그 역시 파이널 라운드의 7인 안에 들어갈 만한 사람인 걸까?
내가 진지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자 에르네스트 역시 약간 더 집중했다. 루카스가 어떤 연주를 하는지 궁금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걸까.
그렇게 우린 고즈넉한 카페에서 함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세미파이널 무대를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