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2화
에르네스트와 차 한 잔을 마시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오후 내내 연습실에만 있었다.
오늘 그는 헌정한 곡은 세상에 낼 생각이 없다고 하질 않나, 새로 쓴 곡은 보여 주지도 않았지만…… 무언가 확고한 이유가 있을 그의 뜻은 날 꽤 고무적으로 만들었다. 그가 작곡 등 여러 가지 공부를 병행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앞길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의욕이 더 생긴다.
덕분에 오늘은 평소보다 더 연습에 집중할 수 있었다.
“…….”
손을 내려놓고 고개를 드니 희미하게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긴 연습을 마치고 뒤늦게 찾아오는 피로감이 온몸에 스며든다.
기분이 좋았다. 피로를 떨쳐 내려 하지 않고 멍하니 몸을 늘어뜨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연습한 음악들과 함께 이런저런 상념들이 섞인다.
예전 일들, 혹은 훨씬 더 오래전 일들부터 시작된 상념은 책갈피가 꽂혀 있는 기억들로 향했다. 콩쿠르, 리사이틀, 레슨…… 친구들과 함께 했던 모든 일들. 첫 만남까지.
난 오늘 봤던 한 친구와 과거 기억들을 대조하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에르네스트와 만난 것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때만 해도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제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너무 짙어서 정말 걱정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이젠 그런 치기 어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확고한 의지로 나아가는 강인함만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빛날 뿐이다.
친구에게 할 말로는 굉장히 부적절하지만, 아이들은 정말 빠르게 성장한다는 걸 직접 목격하는 기분이 든다. 언제부터인지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불안하지 않고 믿음이 갔다.
에르네스트가 그간 무언가 느끼고 좋은 방향으로 변한 부분도 있을 테고, 내가 그를 보는 시선도 변했으리라 생각한다. 글쎄, 무엇이든 간에 지금 난 그가 이렇게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열중하는 것에 대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앞으로도…….”
더 바라는 건 별로 없었다. 지금 같은 날들이 계속될 수 있다면.
난 가만히 해가 다 질 때까지 평화를 만끽했다.
***
밤이 되어 나갈 채비를 했다. 아버지에게 이미 허락은 받아뒀으니 시간에 맞춰 출발하면 된다.
예카테리나는 파이널 진출자 발표에 올 필요 없다고 만류했지만, 난 중요한 시간에 그녀의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발표가 10분 남짓밖에 안 걸린다는 건 잘 안다. 그 10분을 위해 당사자도 아닌 내가 왕복 2시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한다는 건 그리 경제적인 생각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계산을 떠나서 난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예카테리나에게 기쁜 상황이 온다면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픈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위로해 줄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와 나누지 못하고 혼자서 그 상황에 있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아쉬운 일인지 나는 잘 안다. 때문에 그녀의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닐지라도 그저 곁에 있는 한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다.
“아가씨, 말씀하신 시간입니다.”
“갈까요.”
미리 부탁했던 레오니드가 날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음악원 입구에서 그와 잠깐 서성이고 있자니 멀리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타티아나!”
“예카테리나.”
나도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예카테리나는 거의 뛰듯이 발걸음을 빨리하더니, 내 손을 맞잡고는 포옹했다.
그녀의 연습을 도와주면서 함께 오래 있어서 그런지 잠깐 떨어졌다 만나는 것인데도 무척이나 반가웠다.
예카테리나는 내 뒤편에 있는 레오니드에게도 인사를 건네고는,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춥지 않니? 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저도 방금 왔어요.”
“일단 들어가자.”
여름이라 할지라도 자정이 다가오는 한밤중의 날씨는 쌀쌀하다. 발표만 보고 갈 것이기 때문에 우린 적당한 가벼운 차림이었다. 밖에 오래 서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음악원으로 들어서면서 예카테리나는 약간 흥분한 사람처럼 빠르게 말했다.
“오늘은 진짜 혼자서 발표 볼 생각이었는데…… 네가 와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만큼 창피하지 않게 파이널까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난 그녀가 꽤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달랬다.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럴까?”
“예.”
“긴장이 좀 풀리네. 오늘 계속 파이널 협주곡 연습하면서도 어차피 진출 못 하면 다 헛수고 되는 거 아닌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었거든. 건반에 손이 잘 안 가더라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막 이야기하던 예카테리나는 갑자기 말을 뚝 멈추고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았다. 무언가 잘못한 사람 같았다.
난 갑자기 그녀가 왜 그러는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러시나요?”
“이런 이야기 하면 너한테 혼날 것 같아서.”
진출자 발표가 걱정되어서 연습에 집중하기 어려웠단 말에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혼을 낼 수 있는 건 구세프 선생님 정도밖에 없을 것 같다.
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괜한 걱정을 지워 주었다.
“아하하하, 아니에요. 저도 콩쿠르 참가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는걸요.”
“그래? 그런 거지?”
“물론 지금 예카테리나에겐 집중력이 가장 필요한 때이지만요.”
“그런 말 할 줄 알았어…….”
혹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싶어 덧붙였더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거꾸로 내게 물었다. 당하고만 있지 않고 반격하겠다는 뜻이 엇비친다.
“타티아나, 오늘 하루는 뭐 했어? 방학인데.”
방학이라면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만, 내 일과는 사실 언제나 다 비슷비슷했다. 요리나 향초를 만드는 이런저런 취미들이 생긴 후에도 거기엔 큰 변화가 없었다. 난 단조로운 내 방학 일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오전에 학교에 가서 잠깐 레슨을 받고…… 오후엔 연습을 했어요. 그리 특이한 건 없네요.”
“……그게 전부야?”
“음, 콩쿠르 중계를 보기도 했어요.”
“그래? 누구?”
“루카스라는 미국 연주자예요.”
“아.”
루카스는 분명 탁월한 연주자였다. 에르네스트가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예카테리나도 이름을 듣자마자 알은척을 했다.
난 그녀가 루카스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살짝 물어보았다.
“함께 보던 에르네스트가 기억하고 있던 연주자라서 실력이 어떨지 꽤 기대했었는데, 예상 이상으로 좋은 연주였어요. 예카테리나도 혹시 염두에 두고 있나요?”
“뭐라고? 에르네스트?”
“아뇨, 루카스를 말하고 있어요.”
“그런 것 말고. 에르네스트랑 같이 본 거야?”
뭔가 이야기가 엇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일단 그녀의 흐름에 맞춰 주기로 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예. 마침 시간이 좋아서…….”
“잠깐만, 첫 번째였잖아. 두 사람 언제부터 같이 있었어?”
“레슨을 받고 나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리고 같이 식사라도 한 거야?”
어느샌가 그녀의 흥미는 나와 에르네스트의 만남 쪽으로 쏠려 있었다.
예카테리나가 말하는 흐름대로 따라가던 나는 문득 그녀로선 이게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했었던 연애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오랜 기억을 통해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우연한 만남과 데이트 같은 건 레슨과 연습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들보단 훨씬 더 관심이 가는 이야기일 테니까.
난 예카테리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간 잘 느끼지 못했던 괴리를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평범하게 나와 에르네스트를 바라보고, 난 연애로 향하는 깊은 만남에 대한 모든 조건과 이야기들을 유예시켜 놓았기 때문에 생기는 괴리였다.
저번엔 이 괴리를 자각했음에도 내 생각에 몰두해서 괜한 이야기를 털어놓아 그녀를 곤란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엔 그렇게 실수하지 않으려 생각하고 있는데, 이미 예카테리나는 예전의 그 어색한 상황을 떠올린 후였다. 그녀가 멈칫하더니 사과해 왔다.
“아, 내가 너무 말이 많았지. 미안해.”
“괜찮아요. 사과하지 마세요.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는 물어봐선 안 될 이야기를 물어본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이야기를 내가 잘 받아 주지 못했던 문제였다.
서로 미안해하는 묘한 상황이 잠시 펼쳐지고, 우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음, 슬슬 사람들 모이기 시작하네. 저 중에 누가 통과하려나.”
평범한 잡담을 하기에 난 그리 좋은 상대는 아니겠지만, 예카테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린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레이트홀로 향했다.
홀 앞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첫 라운드에 비해 그 수가 확 줄어들긴 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와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거의 새벽 1시로 향하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각에도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피로를 모르고 각자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여기저기에서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몇 개나 되는 언어들이 섞여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에서도 느껴지는 열망은 전부 비슷비슷했다.
나와 예카테리나는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연주자들을 찾아냈다. 인상적인 연주를 했던 연주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연주자들 쪽에서도 우리 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몇 번 느껴졌다. 예카테리나 역시 저들이 보기엔 굉장한 경쟁자로 보이는 걸까? 단순한 시선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난 예카테리나가 혼자 있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금 더 많이 말하고 많이 웃었다.
“입장하여 주십시오.”
잠시 후 세미파이널 진출자 발표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입장이 이루어졌다.
***
밤늦게까지 곡을 쓰던 에르네스트는 한 단락을 마무리 짓고 기지개를 켰다. 조금 쉬고, 조금 더 본 뒤에 잘 생각이었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스마트폰을 든 에르네스트는 곧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파이널 진출자 발표라는 것을 알고는 중계 채널을 틀었다.
이번엔 14명 중 7명을 뽑는다. 사실 에르네스트는 그 7명 전부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늘 저 자리에 있을 친구는 굉장히 관심이 많을 터였다.
곧 화면엔 모스크바 음악원 그레이트홀의 풍경이 나타났고, 여러 각도의 카메라가 무대와 청중석을 번갈아 비추었다. 에르네스트는 장시간 집중하느라 피곤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집중했다. 그리고 찾고 있던 두 사람을 찾아냈다.
“…….”
이 늦은 시간에 저렇게 옆자리에 앉아 있어 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에르네스트는 잘 안다. 그리고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도.
묵직한 긴장감이 맴도는 홀 안에서, 타티아나와 예카테리나 두 사람은 작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 긴장을 해소했다. 예카테리나가 혼자였다면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다가올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보단 훨씬 나아 보였다.
잠시 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의원회의 디아나 레오니예바 의장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인사 멘트를 짧게 한 뒤, 7명의 진출자들을 한 사람씩 호명하기 시작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되는 진출자들에 대해 생각해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 생각했던 것과 심사위원들의 선택이 같은지 맞춰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한 사람도 빗나가지 않고 완벽하게 적중했다.
“걱정할 필요 없었다니까.”
에르네스트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화면을 보며 웃었다. 그 화면 속엔 예카테리나가 기뻐하며 타티아나를 와락 끌어안고 있었다. 타티아나도 환하게 웃으며 예카테리나를 안아 주었다.
피아노의 화신과도 같은 그녀이지만, 친구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보는 에르네스트는 여러 이유로 복잡하게 즐거워졌다. 미리 예상하고 있던 파이널 인선이 모두 맞았던 것도 기분 좋았고, 그 인선에 예카테리나가 들어가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지금 타티아나가 예카테리나의 진출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이, 에르네스트는 그 무엇보다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