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3화
오후에 걸려온 전화에서 예카테리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방금 두 번째 리허설 끝냈어.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게 잘 되어 가는 게 느낌이 좋아. 지휘자님도 내 연주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고.
지금까지 닷새간 쉼 없이 쭉 달려왔던 콩쿠르 일정은 이틀간 휴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 휴식 동안 7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쉬지 못하고 오케스트라와의 본격적인 리허설을 해야 했다. 예카테리나는 그 때문에 정신없는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겨우 이틀밖에 시간이 없고 심지어 준비해야 하는 곡도 두 곡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집중적으로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해도 짧은 시간이건만, 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누어서 하려면 정말 한정적인 시간만이 주어진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합을 맞추어 완성된 곡을 무대에 올려야 하기에 오케스트라와의 첫 인상과 연주 시 느낌 등도 굉장히 중요한데, 다행히 예카테리나는 그런 부분에서 문제를 느끼진 않는 것 같았다.
“문제없으실 거라 생각했어요. 미리 연습을 꼼꼼하게 해 가셨잖아요?”
- 그것도 다 네 덕분이지. 오케스트라 반주를 몇 번이나 도와줬었잖아? 덕분에 지금 리허설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더라니까. 정말로.
세미파이널 무대를 위해 연습할 때, 난 눈앞에 닥친 솔로 곡들의 연습을 도와주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총보 연주에 꽤 능숙해진 나는 악보를 보고 잠깐 연습해 보는 것으로 오케스트라 파트를 반주로 연주할 수 있었다. 때문에 예카테리나에게 파이널 무대에 올릴 협주곡 연습도 같이 해 보자고 권유했었고, 그녀 역시 피아노 듀엣으로 하는 협주곡 연습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꽤 많은 시간을 이미 협주곡 연습에도 투자했던 것이다.
그렇게 미리 연습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기쁜 일이 더 있다며 말을 이었다.
- 맞아, 파이널엔 우리 부모님도 보러 오시기로 했어.
“와, 정말인가요?”
- 두 분 다 일이 있으신 분들이라 일주일 넘게 모스크바에 머무는 건 어려웠지만, 파이널 무대 정도는 오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렸더니…… 반드시 와서 봐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 비행기 표도 끊어 놓으셨대.
“기쁘시겠어요. 예카테리나.”
치열하게 진행되는 대형 콩쿠르는 연주자의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한 순간이지만, 그 순간에 항상 가족이 있어 줄 수 있진 않았다. 일주일도 넘는 긴 시간을 여유 있게 내지 못하는 사정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까닭이었다.
예카테리나 역시 그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화려한 협주곡 무대만큼은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기까지 했다.
- 정말 기쁘지. 파이널에 가지 못했더라면 아무것도 안 되었을 테니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파이널이라는 큰 무대에 오를 기회를 붙잡았기 때문에, 예카테리나는 자신 있게 가족들을 모스크바로 초청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앞선 두 무대 어딘가에서 그녀가 탈락했다면 그녀는 가족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홀로 끊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에틀링겐 콩쿠르 우승자 출신이기 때문에 상당한 실력이 뒷받침되어 있지만, 늘 순간을 증명해야 하는 세계에선 그 어떤 뛰어난 연주자라 하더라도 연주하기 전의 무대를 확신할 순 없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에틀링겐 콩쿠르보다 훨씬 더 큰 콩쿠르이고, 그에 걸맞게 참가하는 연주자들의 경쟁도 정말 치열하기 때문에 마지막 7인 안에 들 수 있을진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카테리나는 그 어려운 난관을 뚫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실력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감격해하고 있었다. 어젠 결과가 나오자마자 눈물을 보일 정도였다.
“……잘 해내실 줄 알았어요.”
나도 살짝 목소리가 잠겼다.
처음 예카테리나의 실력을 봤을 때, 절대적 평가 기준으로 충분한 실력자라 생각했었고,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고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지금 예카테리나가 총 11명이나 되는 피아노 부문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받아 파이널리스트가 된 것은 그런 내 믿음이 옳았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예카테리나의 음악을 가족분들이 홀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라 생각한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타티아나 네겐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일단은 파이널에서 연주를 잘 하는 게 좋겠지?
난 생각할 것 없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이에요.”
- 알았어. 타티아나.
예카테리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무대에 올라 최선을 다하리란 것을 난 확신했다.
정말 모든 것이 잘 되어 갔다. 예카테리나도 파이널에 진출했고, 막심 선배 역시 바이올린 부문에서 파이널 진출을 확정지었다. 난 내가 응원하는 두 사람 모두 마지막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이 내 일처럼 기뻤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목이 말라 물을 한 컵 마시고는 스마트폰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별생각 없이 예카테리나의 이전 무대 영상들을 찾아선 다시 재생시켰다.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프로그램은 다시 들어도 정말 훌륭했다. 그녀의 협주곡도 이와 비슷할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으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다면 정말 만족할 만한 무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앞으로 있을 파이널 무대를 상상하던 나는 문득 다른 파이널리스트 6명의 연주도 제대로 찾아보고 싶어졌다. 고맙게도 홈페이지엔 모든 참가자들의 무대가 빠짐없이 올라와 있었다.
난 지금 예카테리나의 경쟁자인 그들의 연주를 하나씩 듣기 시작했다.
“…….”
비단 예카테리나만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무대에서 중요한 기회를 잡아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만큼, 모두가 정말 대단한 실력자들이었다.
나는 새삼 감탄하면서 연주를 감상했다. 그리고 이 연주자들이 지금뿐만이 아니라 내년 내 앞에 있을 경쟁자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이 중에 몇 명은 내년에도 콩쿠르에 나선다. 정말 내 일이나 다름없었다.
조용히 화면 속 연주에 빠져들었다. 마치 몇 개월 후 미래를 먼저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 연주자들과 각자의 음악을 저울 위에 올려두고 겨룬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명성이나 커리어, 상금, 혹은 개인적인 자기증명 등, 여러 이유로 연주자들은 콩쿠르에 참가한다. 하지만 막상 무대에 오르고 나면 그런 복잡한 이유들은 뒷전이 된다.
당장 바로 앞에, 그리고 뒤에 줄지어 있는 괴물 같은 실력의 연주자들의 존재감에 짓눌려 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내는 것에 모든 집중력을 다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건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누군가는 더더욱 송곳니를 내보이며 연주에 임하고, 누군가는 긴장에 무너지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무너진 음악을 잡아먹고 몸집을 키운다. 난 그 치열한 세계를 생각하며, 아직은 내 차례가 아닌데도 두근거리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이 파이널은 7명의 진출자의 무대가 총 3일에 걸쳐 치러지며 모든 연주는 협주곡이다.
예카테리나의 순서는 가장 마지막 날이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꽤 좋은 순서라 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시켜 주진 않지만 그래도 준비를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습이든 마음의 준비든.
일정을 확인한 나는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첫 무대가 시작되는 오후 6시가 되기를 기다리다가, 어차피 7명 모두의 무대를 관람할 것이라면 이렇게 방에서 영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직접 가서 보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물론 난 예카테리나가 1등상을 받기를 바라지만, 이전에 봤었던 다른 연주자들의 솔로 무대도 굉장히 훌륭했었으니, 그만큼 협주곡에선 얼마나 치열한 접전이 있을지 기대되는 게 당연했다.
피아노 건반을 꾹꾹 눌러보던 나는 더 시간이 늦기 전에 움직이기로 하고 우선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그녀도 가서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 응, 타티아나.
“전화해도 시간 괜찮나요? 아나스타샤.”
- 괜찮아.
“그렇다면 오늘 저녁엔 시간 어떠시나요?”
- 점점 늘어나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그녀는 아리송하다는 듯 대꾸하더니 곧 무슨 용건인지 알아차렸는지 웃으며 말했다.
- 파이널 라운드 보러 가자고?
“제 마음이 들렸나요?”
- 처음 목소리 들었을 때부터.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레 킥킥 웃더니 내게 물었다.
- 다른 애들은?
“지금부터 물어볼 생각이에요. 발렌티나와…….”
난 당연히 에르네스트도 떠올렸지만, 어쩐지 며칠 전 봤던 피곤해 보이던 모습 역시 동시에 생각났다. 어쩌면 부르는 것 자체도 그에겐 상당한 부담일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모스크바에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중요한 콩쿠르이지만, 그는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을 간신히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여러 생각이 들어 조금 주저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내 생각을 가로채듯 말했다.
- 발렌티나는 파이널은 예카테리나의 무대만 보겠다고 이미 말했었어. 그러니 에르네스트에게만 내가 연락해 볼게.
“지금요?”
- 그럼 지금 하지 언제 하니? 이제 곧 시작할 텐데.
시간을 보니 4시 30분경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긴 하지만 사실 늑장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에르네스트도 굳이 나오지 않고 집에서 볼 생각이라면 거절하겠지. 그럼 아나스타샤와 둘이서 보면 될 일이다. 그냥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 응. 그럼 바로 준비해서 최소 10분 전까진 음악원 앞으로 모이도록 하자. 알겠지?
이번에야말로 차로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움직이려면 동선이 많이 길어지기 때문에 되레 시간에 맞추기 어려웠다.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움직이기로 결정되고, 난 빠르게 나갈 준비를 했다. 캐주얼한 원피스에 숄을 두르는 것으로 가볍게 옷차림을 하고는 레오니드에게 바로 부탁했다. 사실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던 일정이기에 굉장히 미안했지만, 레오니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날 음악원으로 데려다주었다.
도착하니 거의 정확하게 5시 50분이었다. 차가 조금 더 막혔으면 큰일 날 뻔했다.
급히 차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딱 맞춰 왔으니 급할 필요 없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마음이 급해진 날 진정시키려는 듯 다가오며 말했다. 난 그 말을 듣고서야 짧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비스듬하게 서 있던 에르네스트도 날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늦으면 대충 어디서 영상으로 보지 뭐.”
“넌 그걸 말이라고 하니?”
“뭐 어때? 난 그것도 괜찮던데.”
“괜찮긴 뭐가…… 에휴, 말을 말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에르네스트는 묘한 미소로 맞받았다.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아서 오늘은 안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기쁘다. 그의 말대로 홀에 들어가지 못하고 같이 모여서 영상을 보더라도 사실 꽤 즐거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기왕 모였으니 홀에서 제대로 감상하는 게 좋겠지.
“들어가죠, 시간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깐요.”
“응. 그러자.”
우리 세 명은 음악원으로 들어섰다.
이미 복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수십 명의 연주자가 자웅을 겨루는 이전까지의 두 무대보다는 바로 이 파이널 무대를 관람하기 위해 티켓을 산 사람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었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대형 콩쿠르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7인의 경합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홀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방송에 따라 사람들과 함께 각 자리를 찾아갔다.
부산한 시간이 흘러가고 곧 1700명이 넘는 청중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이제 큰 소리들은 모두 멎었고 여기저기서 작게 속닥이는 소리들만이 들려온다. 무대 위로 올라온 사회자는 청중들을 살피더니 시작해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는지 마이크를 잡고 천천히 안내 멘트를 시작했다.
“착석하신 여러분께 다시 요청드리겠습니다. 이곳은 사진 촬영이 금지된 장소입니다. 안내를 지켜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제 곧 모두가 기다리던 것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속닥이던 말소리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회자는 이어 참가자를 소개했다.
“파이널리스트 1번. 루카스 맥케이. 미국.”
이름이 소개되자 아직 연주자는 무대 뒤에 있지만 짧은 박수가 쏟아졌다. 커튼콜과도 같이 연주자에게 에너지를 실어 주는 박수였다.
그다음으로는 연주할 곡들이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플랫 마이너…… 죄송합니다. 번복하겠습니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 제1번. A마이너입니다.”
첫 번째 곡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그리고 사회자는 마지막으로 연주자와 함께 할 오케스트라를 소개했다.
“위 두 곡을 레프 마트베예비치 바트라코브스키의 지휘와 함께 연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번엔 훨씬 더 큰 박수가 시작되었고, 거기에 응답하듯 무대 뒤에서 큰 키의 미국인 연주자와 지휘자가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