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14화 (614/1,277)

##  614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 첫 번째 파이널리스트. 루카스 맥케이는 연주자 대기실에서 나와 무대로 바로 향하는 복도에 섰다. 이제 그는 무대와 문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다.

문 너머에선 각자 자리를 찾아 가는 청중들의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아주 좋아…….}

루카스는 중얼거리며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완벽한 컨디션을 위해 오후에 낮잠을 푹 자서 생체 리듬을 최적화시켰고, 저녁 식사도 정확하게, 수분 보충도 완벽하다. 행운의 증표로 사용하는 손수건도 챙겼다.

루카스는 그런 부분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느 정도로 철두철미했는지 부모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절대로 실수할 수 없었다. 루카스는 지금 이 상황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무슨 러시아까지 가서 콩쿠르에 참가하느냐고 역정을 냈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는 건 좋지만 그렇다면 본고장인 유럽이나 고향인 미국을 타깃으로 활동하란 말이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적어도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데에 있어선 러시아에서의 커리어를 빼놓는 건 굉장한 손해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대로 이 콩쿠르는 정말 전 세계 피아노 괴물들의 각축장이라 할 수 있었다. 루카스는 그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갈고 닦은 칼날을 보이기 위해 애썼고, 운도 좋고 노력도 따라 주어서 흡족한 결과가 돌아왔다.

처음엔 팔짱을 끼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던 아버지도 막상 루카스가 좋은 성적을 내니까 조금 누그러들었다.

{후…….}

이제 마지막 기회가 왔다. 러시아 최고 권위의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에 들었고, 최고가 될 차례다.

파이널리스트 7명의 실력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테크닉적인 부분은 이미 모두가 최상위권에 도달해 있다고 해도 무방했고, 따라서 차이가 나는 건 음악성과 세세한 디테일과 해석 같은 부분이었다. 직접 무대에서 대 보지 않고선 누가 탁월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고로 실수를 하는 쪽이 떨어진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 □□□ □□□□□□□.”

혼자만의 집중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리니 그가 대기 중인 복도엔 연주자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오케스트라 관계자. 심지어 대포처럼 커다란 카메라를 든 카메라맨도 있었다. 파이널은 연주자가 대기 중인 모습도 중계하는 것 같았다.

카메라 렌즈와 눈이 마주친 루카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히 손을 흔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준비된 연주자로서의 모습을 보이면 완벽하다.

“□□□ □ □□□.”

“□□.”

옆을 보니 지휘자 레프가 직원과 러시아어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성이 뭐였더라. 콘트라베이스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몇 번 부르려다가 실수하니 레프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사실, 원래 러시아는 이름을 부르는 문화라는 것도 새로 배웠고.

어쨌든 루카스는 이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도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리라 생각했지만, 레프는 노련한 지휘자로서 수많은 국적의 연주자들을 만나 본 사람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저 음악가라면 모두가 아는 단어 몇 개와 눈빛, 그리고 소리로 의사소통이 전부 가능했다. 딱히 길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루카스와 레프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하루는 차이코프스키, 하루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만족스럽게 리허설했다. 짧은 시간 동안 후다닥 맞췄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다른 참가자들도 똑같은 조건이었다. 루카스는 이보다 잘 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젠 결과물을 보여 줄 때였다.

“차이코프스키 □□□ □□□ □□. B플랫 마이너…….”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사회자가 러시아어로 그가 연주할 프로그램을 안내했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듬성듬성 들려오는 단어로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루카스도 이해한 것을 러시아인인 레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 슈만 □□□ □□□ □□□. A 마이너□□□.”

뭔가 문제인가 싶어 보니 다시 레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마주치니 걱정 말라는 표정이다. 루카스는 다시 한 번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차이코프스키에서 슈만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그가 원한 것이었다. 인터뷰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원래는 슈만을 앞세우려 했지만, 나중에 오케스트라 직원과 프로그램을 확정지을 때 지금 이 순서로 결정했다.

“□ □ □□ 레프 바트베예비치 바트라코브스키□ □□□ □□ □□□□□□□. 감사합니다.”

지휘자에 대한 소개도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영어로 되풀이되는 안내는 필요하지 않았다.

루카스가 고개를 들자 레프가 씩 웃으며 무대 쪽으로 팔을 펼쳤다. 어서 박수 소리에 응해 가 보라는 의미였다.

레프 바트베예비치 바트라코브스키. 진짜로 외워 둬야겠다.

아직도 어색한 지휘자의 이름을 되뇌며 루카스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

환한 조명에 눈이 부시다.

커다란 무대엔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이미 반원을 그리며 앉아 있었고, 그 정중앙에 커다란 검은색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피아니스트 한 명만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호화스러운 무대였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1700명의 청중이 보내오는 어마어마한 박수 소리. 루카스는 긴장하지 않으려 일부러 그쪽으론 그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직접 이 거대한 인원을 목격하면 압도되어 버릴 것 같았기에.

“□ □□□.”

무대 중앙까지 다다른 루카스는 가까이에 있는 악장과 악수를 나누고, 지휘자 레프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파이널 무대는 이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에 걸려 있기도 했다. 물론 프로 중에서도 손꼽는 프로들이니만큼 충분히 잘 해 주겠지만.

오케스트라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 없이 피아니스트인 자신이나 잘 하면 된다. 애초에 그런 자리이기도 하고.

루카스는 청중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박수 소리가 더 커진다. 먹먹해져 가는 에너지 속에서 루카스는 집중하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의자의 위치를 조정하여 발이 잘 닿도록 두고 손을 뻗어 건반까지의 거리를 가늠한다.

손수건을 꺼내 마지막으로 손을 닦으며 루카스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박수가 터져 나오던 청중석 쪽은 지금은 그 모두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쥐죽은 듯 조용했다. 루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청중들이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

그리고 한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루카스는 순간적으로 그 소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타티아나. 파이널 진출자 발표 날 참가자들과 지인들이 모여 있을 때, 아버지가 발견하고는 말해 주었던 이름이었다.

다른 참가자의 지인으로 보이는 여자애를 아버지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무척이나 의아했는데, 막상 물어보니 아버지는 휴게실에서 잠깐 인사만 나누었다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혹시 내 팬인가?

루카스는 속으로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했다가, 아직 무명인 피아니스트에게 팬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어넘겼다.

어쨌든, 다른 참가자의 지인으로 온 것 같지만 지금 내 연주회에 왔다면 내 청중이 되어 주어야겠다. 혹시 팬이라도 되어 준다면 더 좋고.

가볍게 생각하며 루카스는 다시 오케스트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자세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긴 했지만, 긴장감에 착각을 느끼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그냥 리허설이 아닌 무대에서 이 사람들을 보는 건 처음이라 드는 불안감인 것 같았다. 루카스는 괜히 그런 기분에 휩쓸려서 집중을 흐트러뜨릴 생각이 없었다.

무대에 올랐다면, 이젠 믿고 함께할 뿐이다. 루카스는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음악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가 연주해야 하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다른 모든 건 머리에서 지웠다. 오로지 차이코프스키의 선율로만 온 신경을 가득 채웠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여 준비되었음을 알리면 레프의 지휘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움직일 테고,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서 피아노 선율을 얹으면 된다.

다시 한 번 모든 준비를 마친 루카스는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

적막 속에서 루카스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자세와 집중력을 준비하는 그사이에, 문득 고개를 돌린 그와 나는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살짝 미소를 짓는 모습이 팬서비스도 잘하는 프로 연주자의 태도였다. 여유로운 태도는 꽤 마음에 들었다.

첫 곡은 슈만 피아노 협주곡 1번.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루카스가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해 줄지 기대되었다.

흥미진진하게 연주를 기다리던 나는 문득 스마트폰을 아직 끄지 않았음을 깨닫고, 가방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막 전원을 끄려는 찰나, 다시 고개를 든 나는 순간적으로 무대 위의 연주자가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갑자기 찾아온 직감이었다. 평상시 보던 풍경에서 무언가 툭 불거진 느낌. 그게 무대 장식 등이면 별 상관 없겠지만, 하필이면 연주자에게서 그런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난 눈을 가늘게 뜨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될 첫 곡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

그 곡은 현악의 강렬한 투티tutti가 한 화성에 집약되어 피아노를 밀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한순간을 준비하며 벌써부터 모든 현악기들이 E코드로 집중되고 있었다. 멀리서도 난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를 딛고 솟구친 다음에 곧바로 낙하하며 자신의 음악을 찾아나가야 하는 피아노 연주자는 바로 다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긴장을 풀어놓고 느긋하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난 지금 무언가 잘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연주자의 모습과 태도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케스트라는 날카로운 톱날을 준비하는데 혼자서 고무망치를 들고 있다. 연주를 하기 전인데도 느껴지는 그 기묘한 괴리가 날 단순한 감상자의 입장에서 연주자의 입장으로 돌려놓았다.

‘이상해.’

협주곡은 수십 명의 사람이 동시에 만들어야 하는 예술이므로 아주 사소한 문제도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때문에 조화가 잘 되지 않거나 연주자들 간에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종종 멀리서 봐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문제점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음악도 아닌 준비 동작만 보고 지금처럼 이토록 강한 위기의 예감을 느끼긴 난생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저렇게 오케스트라와 연주자 사이가 크게 갈라져 있는 거지? 지휘자와 싸우기라도 했나?

하지만 사이좋게 무대로 입장하여 악수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악장과도 예의바르게 악수한 걸 보니 그쪽과 트러블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아예 엉망진창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오케스트라는 명망 높은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오케스트라답게 잘 준비되어 있고 연주자는 연주자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난 불안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너무 혼란스럽고 이상해서 나는 옆자리의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왜?”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확인해야 할 메시지를 휙휙 넘기고는 스마트폰 전원을 끄려고 하는지 지금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700명 중에서 나 혼자만 이상한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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