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5화
무언가 상황이 파멸적으로 치닫고 있다는 강한 예감이 자꾸만 머릿속을 괴롭힌다.
난 다시 무대를 바라보았다.
루카스와 친분이 있거나 평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난 파이널리스트들의 첫 라운드와 세미파이널 중계녹화영상들을 찾아보면서 솔로 무대 영상들도 모두 본 적이 있었다. 심지어 루카스의 세미파이널 무대는 생중계로 봤다.
그렇게 몇 번 연주를 보면서, 나는 그가 음악에 임할 때의 자세를 기억한다. 그는 음악에 맞추어 퍼포먼스적인 면모도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이용할 줄 안다. 음악에 심취하는 연주자 특유의 버릇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유심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지금 루카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차이코프스키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체 왜……?’
분명 첫 순서는 슈만이었다. 난 안내를 잘못 듣지 않았고, 지금 오케스트라가 집중하는 것을 보아도 슈만으로 시작을 연다는 건 명백했다.
그런데 연주자만이 차이코프스키를 향했다.
너무 과하게 긴장해서 혼동하고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잘 보면 그렇게 긴장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면 내가 지금 미친 건가? 음악을 들어 보지도 않고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건가.
난 내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연주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을 떠올리며 점점 시간을 거슬러 생각해 보았다.
입장하기 전에 안내 방송에서 살짝 실수가 있었지.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을 먼저 말했다가, 사과하고는 다시 슈만의 이름을 말했다.
따라서 처음 연주되는 곡은 슈만이다.
그런데 저 사람, 러시아어로 사과하는 걸 알아들을 수 있나?
‘잠깐…….’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난 혼란스러운 와중에 모든 상황을 염두에 놓고 생각해 보았다.
일단 미국인인 루카스와 지휘자 레프가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못 하는 상황이라도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 자체엔 큰 문제가 없었다. 음악의 언어는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믿음이 너무나 강력해서 정말 필요했던 말들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연주 프로그램의 결정권은 전적으로 루카스에게 있기 때문에 어색한 언어로 상세한 회의 등을 할 필요도 없었고, 또한 지휘자 역시 7명이나 되는 연주자들과 단기간에 리허설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이미 결정된 곡들을 가지고 서로의 음악만 확인하고 만족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연주자가 제출한 프로그램이 팸플릿에 출력할 때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출력되는 일도 종종 있는 것처럼, 위원회와 오케스트라에게 잘못 전달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가능성들이 합쳐진다면 루카스가 원하는 프로그램 순서를 지휘자와 위원회가 혼동하여 받아들였을 때,
사회자가 이미 뒤집힌 프로그램을 말실수로 다시 한 번 더 뒤집는다면, 연주자는 정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순서를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
모든 것이 라이브로 이루어지는 무대에선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특히나 언어가 다른 음악가들 사이에선 더더욱 빈번하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그런 실수가 발생한다는 게 말이 되나? 관계자가 몇 명이고 확인할 기회가 몇 번일 텐데,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해결이 안 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그런데 그런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생각 위로 지금 눈으로 보이는 상황이 훨씬 더 명료하게 자리 잡았다.
지금 연주되어야 할 곡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휘둘러서 강렬한 시작을 끊으려 하고, 모든 단원들의 동작과 자세는 E코드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보아도 피아노 연주자는 금관의 풍부함으로 시작되는 차이코프스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분명히 그렇게 확신한다.
‘어쩌지…….’
이제 몇 초 후면 연주가 시작된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냥 내 걱정은 치워 놓고 콩쿠르 위원회를 믿고 가만히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직접 보고 느낀 직감과 확신을 믿고 무언가 해 볼 것인지.
하지만 무언가 해 보기엔 시간도 너무 없고 난감했다. 지금 내 눈엔 오케스트라와 연주자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가 결국 찢어져 버리는 광경이 생생하지만, 이걸 전할 수도 없었다. 연주자는 이제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고, 난 1700명 사이에 있는 한 명일 뿐이었다.
“…….”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되레 머리가 차가워졌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이렇게 불안해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손해 보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없다면 없는 대로 좋고, 예상한 문제가 그대로 터진다 하더라도 아무도 내게 왜 말해 주지 않았냐고 하진 않을 테니까. 무대 관계자 모두의 잘못일 테니 청중인 나는 그냥 입 다물고 어떻게 될지 지켜보면 그만이다.
오케스트라가 그대로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시작한다면 준비되지 않은 연주자는 절대로 거기에 못 따라간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바로 따라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혹감에 연주를 완전히 망쳐 버릴 수도 있겠지. 만약 위원회가 다시 기회를 준다 하더라도 완벽한 컨디션의 연주가 나올진 의문이다.
그리고 루카스는 예카테리나의 경쟁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를 내가 도울 필요가 있나?
가만히 있을 이유만 잔뜩이지 않나?
‘가까운 사람을 우선하기에도 바빠.’
그게 현실적이니까.
구세프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선생님은 내가 예카테리나를 높게 평가하고 가까이 두며 도와주려고 한다 하셨지. 그 말대로 지금 이 콩쿠르에서 내가 제일 위하고 싶은 건 예카테리나였다.
예카테리나도 지금 내 상황에 처한다면 아마…….
“…….”
난 순간 움찔했다.
방금 스스로의 이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난 예카테리나까지 끌어들이려 했다. 그런 생각을 하려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이 든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생각을 잘 할 수가 없었다. 난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담아 눈빛을 교환하는 연주자와 지휘자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적어도 저 믿음이 한 번은 무대에 온전히 올라와야 옳은 것 아닐까.
이 세계가 치열하고 숨 막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딱 하나 지켜지는 건 있었다. 모든 연주자에게 반드시 한 번은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음악을 펼칠 확실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었다.
당연하게 지켜지는 그 공정함을, 난 명예롭게 생각한다.
선생님은 날 합리적이라 평하셨지만, 또한 음악계의 공리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 하시기도 했다.
그 말대로였다. 난 수많은 이유를 들어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사실 그런 이유들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가만히 있기 싫다는 반증이었다.
‘슈만…….’
오케스트라가 시위에 올리고 있는 곡이 슈만이라는 걸 어떻게 알리지? 너무 큰 소동이 있으면 곤란해진다. 난 이 상황 안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연주자에게 문제를 알려야 했다.
슈만, 슈만……. 내가 아는 슈만의 곡들이 머리를 마구 스치고 지나간다. 난 슈만을 즐겨 연주하는 편이었고, 지금까지 정말 많은 곡들을 들어왔다. 많은 음반들…… 그리고 벨소리.
“?”
시시각각 상황은 연주 시작으로 향해 간다. 루카스가 막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눈으로는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슈만의 곡을 벨소리로 등록해 놓은 친구가 있음을 떠올렸다.
다시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그도 느낀 모양이다.
난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아직 전원을 끄지 않았다.
찾았다.
순간적으로 든 발상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나중에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솔직히 그런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릴 시간도 없었다. 무대에서 라이브를 하는 연주자들은 각종 트러블에 마주하는 경우가 잦은 편인데, 그때마다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부분을 확실하게 훈련받은 나는 빠르게 그에게 속삭였다.
“벨소리 끄셨나요?”
에르네스트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직, 이제 끌게.”
그 대답을 확인하고, 난 다시 무대 쪽을 돌아보았다.
지휘자가 단원들을 죽 둘러보며 신호를 줄 준비를 한다. 루카스는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은 건반에서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바로 피아노를 연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오케스트라의 전주를 여유 있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다시 한 번 확신이 굳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난 전원을 끄려고 들었던 스마트폰의 화면을 켜고는 바로 최근 통화 목록을 불러내어 전화를 걸었다. 모든 과정이 2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에르네스트 쪽을 바라보니 날 지켜보고 있던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내가 벨소리에 대해 물어본 것, 그리고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른 것. 그 모든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순간적으로 직감한 듯했다.
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고 할 수도 있었고 믿어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기 때문에 사과하는 것 자체도 기망처럼 느껴진다. 미안하면 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인데, 알면서도 난 지금 하고 있었다. 대체 에르네스트에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
전화를 건다고 해서 바로 벨이 울리진 않는다. 몇 초 정도 걸리고, 곧 난리가 날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없이 나와 눈을 마주하다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곧 무슨 일이 터질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한 술 더 떠 벨소리 볼륨 키를 위로 쭉 올려 버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는 웃고 있었다.
“!”
막 음악이 시작되기 전, 내 옆에서 요란한 음악이 먼저 터져 나왔다. 그건 전자음으로 된 슈만의 곡이었다.
연주를 준비하던 집중이 와르르 깨져 버렸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무너져 내리고, 그와 동시에 홀의 중심이 무대에서 내 옆으로 바뀌었다. 1700명의 이목이 확 집중된다. 무대에 있는 연주자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시선과 숨소리는 어마어마한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또 저런 몰상식한 사람이 있느냐는 경멸 섞인 눈초리가 날카롭게 날아든다. 루카스는 첫 라운드에서도 벨소리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이 있었다. 파이널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니 정말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그런데 그 신경질적인 눈빛은 곧 에르네스트를 발견하고는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오케스트라 쪽을 보고 있다가 살짝 이쪽을 바라본 지휘자 레프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
욕설만 없을 뿐이지 어이없음, 짜증, 경멸, 분노 등등 온갖 격렬한 감정이 사방에서 날아드는데, 에르네스트는 여유 있게 스마트폰 화면에 내 이름이 떠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벨소리가 조용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홀 안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아예 그 어수선함을 모두 가지고 사라져 주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싶었는데, 그는 그대로 확실하게 나가 버렸다. 난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 제대로 의미가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시 무대를 보니, 에르네스트가 다 나가길 기다리던 루카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지휘자를 불렀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더니 곧 경악했다.
지휘자는 지휘자대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을 했지만, 허리를 굽혀 루카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곧 두 사람은 각자의 언어에 손짓을 섞어 가며 급하게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서로 언어가 다르니 두 사람 다 답답해했지만 지금 트러블이 생겼음을 인식한 건 분명해 보였다.
난 직감이 옳았음을 느꼈다.
“…….”
아무 문제 없이 여유롭게 연주를 바로 시작하려던 모습과 비교하면 뭔가 문제가 생긴 모습이었지만, 난 그것을 바라보면서 되레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당연히 그 편안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옆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에르네스트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하고 또 멋대로 그를 희생시킨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내 의사를 알아차리곤 믿고 따라 주었다는 것에 대해 약간 기뻐하는 마음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일에 기뻐한다는 건 절대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난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거기엔 모든 걸 지켜본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난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에르네스트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어마어마하게 혼이 날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