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16화 (616/1,277)

##  616화

연주를 시작하기 전 벨소리가 울리는 일이 생겼다. 기껏 조성해 놓은 모든 분위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엉망이네, 엉망.}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어차피 연주자로 살다 보면 종종 겪는 일이니까 그냥 연주 도중에 울리지 않은 걸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카스는 중얼거리며 청중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게 아까 본 타티아나의 옆자리에서 울렸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또 그 옆에 앉아 있었던 게 에르네스트였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에르네스트는 젊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굉장히 두각을 드러내는 피아니스트였다.

루카스는 예전에 콩쿠르에서 에르네스트를 만났던 후로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에게 꼭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에르네스트에게서 느꼈던 인상은 강렬했다.

그런데 그 에르네스트가 콩쿠르장에서 벨소리를 울려? 알 만큼 알 사람이?

{……어이가 없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은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어서 콩쿠르를 망치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루카스는 에르네스트와 한 번 만났던 것 외엔 접점이 전혀 없었고 원한을 살 일도 없었다. 애초에 말이 안 통하니 인사도 한 적이 없다. 그냥 모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인 방법으로 방해를 하려고 한다는 건, 그냥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루카스는 그 생각은 아예 지워 버렸다.

그냥 깜빡 잊고 꺼 놓지 않았던 건가……?

“□□ □□□ □□□□.”

지휘자 레프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에르네스트가 홀에서 벨소리를 울릴 사람으론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건만, 에르네스트는 소리를 끄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선 홀을 휙 빠져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나갈 것 까진 없을 텐데……. 하지만 미련 없이 나가는 모습을 보니 괜히 신경 쓰이게 하거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깔끔하게 없어져 주겠다는 의사가 그의 등에서 느껴졌다.

대체 뭔지 모르겠다.

약간 맥이 풀리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루카스는 레프를 바라보았다. 레프 역시 피식 웃더니 말했다.

“슈만□ □□□□□.”

{음.}

확실히 에르네스트의 벨소리는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의 한 변주였다. 얼마나 벨소리가 크게 홀을 울렸는지, 뇌리에 콱 박혀 버릴 정도였다.

차이코프스키를 준비하면서 기껏 슈만은 미뤄 두었는데, 제대로 방해를 받은 기분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레프는 슈만의 벨소리로 단순히 방해를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를 발견하고는 신기해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왜지? 슈만은 다음 곡인데.

혼자 동떨어진 기분을 느끼며 루카스를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레프.}

“?”

문제가 있다면 즉각 이야기하라는 표정으로 레프가 고개를 돌렸다.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루카스는 가벼운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것을 그대로 물어보았다.

{우리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려는 것 맞죠?}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이니까, 당연히 바뀐 건 없겠지.

레프는 차이코프스키라는 이름에 반응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 □□□? 슈만□ □□□□ □□□.”

누가 봐도 그는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찬물을 확 뒤집어쓴 기분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지금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1번을 연주해야 하잖아요? 그다음이 슈만이고.}

그러자 레프 역시 황당하단 표정을 싹 지우고는 진지하게 허리를 숙였다. 장난 칠 때가 아니란 얼굴이다.

“□□□□□ □□□□ □□□□. 슈만, □□□ 차이코프스키.”

{지금 슈만 다음 차이코프스키라고요?}

“슈만, 차이코프스키.”

{아뇨, 아뇨. 무언가 잘못되었어요. 차이코프스키, 슈만.}

“……? □□□?”

{차이코프스키, 슈만!}

“빌어먹을.”

루카스는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르지만 간단한 인사말과 욕설은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 단어들은 기억에 잘 남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레프는 그 점잖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당황해했다.

하지만 무대 위의 음악가들에게 당황이란 감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노련한 지휘자인 레프는 에르네스트 때문에 아직도 분위기가 붕 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낮고 매서운 목소리로 빠르게 물었다.

“□□□ □□ □□□. 슈만□ □□□□ □□?”

{슈만을 하라고요?}

“슈만.”

{갑자기 이게 무슨……. 미치겠네.}

억울했다.

며칠 전부터 바로 방금 전까지, 루카스는 차이코프스키로 첫 시작을 열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생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조건 자기 입맛에 맞추어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지금은 레프의 판단이 옳았다. 슈만에 맞추어져 있는 오케스트라를 다시 차이코프스키로 바꾸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럼 청중들과 심사위원들도 이상함을 느낄 테고,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쏠려 있던 비난의 화살이 의사소통의 부재로 문제가 생긴 무대 쪽으로 향할 거다. 그렇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루카스였다.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좋아요. 하죠, 그대로.}

“□ □ □□□?”

{슈만으로 바로 할 수 있어요. 걱정 말고…… 잘 부탁합니다. 레프.}

루카스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상황을 이제라도 바로잡은 건 좋지만 루카스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레프는 그 손을 바라보더니, 탁 낚아채며 강하게 쥐었다.

두 음악가는 잠시간 말없이 악수를 나누었다. 사실 말만 통한다면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았다. 대체 어떻게 순서가 거꾸로 전달된 건지, 또 지금까지 왜 한 번도 확인을 안 한 건지.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의문과 불평은 아무 의미 없었다. 루카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해 왔다. 순서가 바뀐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

다시 루카스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벨소리 사건으로 웅성거리던 청중석의 소음이 뚝 하고 멎었다.

루카스는 준비했던 슈만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악장을 기억 속에서 끌어냈다. 이미 에르네스트가 한 번 휘저어 놔서 그런지 아예 새 무대를 준비하는 기분이라 조금 수월했다.

그렇게 슈만의 선율을 떠올리던 루카스의 머릿속엔 섬뜩한 생각이 끼어들기도 했다.

만약 이렇게 벨소리가 울리지 않아서 그대로 연주가 진행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시작하자마자 오케스트라가 딱 한 번 크게 화음을 뿜어내고 바로 피아노로 이어진다. 아무 준비 없이 차이코프스키를 생각하다가 그걸 맞이했다면 루카스는 대응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분명 타이밍을 놓치고 몇 초나 멍청하게 있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건반을 누르고, 모조리 끝장났을 것이다.

뒤늦게 억울함을 호소한들 제대로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다. 콩쿠르든 연주회든 크고 작은 트러블은 항상 생기지만, 청중이나 심사위원들은 그런 연주자의 억울한 사정을 크게 고려해 주지 않는다.

그 최악의 상황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에르네스트의 벨소리를 울리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루카스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기회를 얻었으니…….}

루카스는 생각을 떨쳐 내며 다시 슈만에 집중했다. 운 좋게 모든 트러블은 에르네스트가 안고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콩쿠르 참가자인 루카스가 제 실력을 내는 것뿐이다.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슈만을 준비한 루카스는 다시 레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프 역시 이 상황에 미안해하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연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해 주는 게 루카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레프의 왼손이 오케스트라를 준비시키고 지휘봉이 들어 올려졌다.

그 지휘봉이 허공으로 떨어졌을 때, 폭발적인 화음이 오케스트라로부터 무대 위로 뿜어져 나왔다.

루카스는 완벽한 타이밍에 그 소리의 끝을 붙잡아 피아노에 매달고 이어 나갔다.

***

1시간 10분 내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루카스는 정말 잘 해 주었다. 지휘자와 이야기하며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 맞춰 슈만을 먼저 연주하기로 정하곤 곧바로 연주에 임했다.

그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덕분에 여기에 있는 1700명은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는 건 전혀 모를 테니까.

그렇게 바로 연주되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훌륭했다. 난 그 연주에 감탄하면서 스스로 한 일에 대해 약간은 자신감을 가졌다가, 다시 빈 옆자리를 보고는 우울해졌다가, 아나스타샤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고는 겁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감정들이 자꾸 번갈아 가면서 마음을 채우니, 곡을 감상하면서도 솔직히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머리도 아픈 게 열이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복잡한 와중에도 시간은 분명하게 흘러갔고, 곧 1시간 10분의 유예가 끝나고 해명과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

“브라보!”

연주를 끝낸 루카스가 박수와 찬사를 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무대를 빠져나갔다.

난 박수를 보내다가,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박수를 치곤 있었지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타티아나.”

“……예.”

“나갈까 일단.”

왜 그랬냐고 묻진 않는다. 그녀는 이미 나와 오래 지내면서 내가 이런 일에 자꾸 끼어든다는 것을 직접 보기도 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다는 건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아나스타샤가 왜 화가 났는지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루카스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연주자를 위해 이런 일을 감수했다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걸 감수한 건 에르네스트이긴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보기엔 나나 에르네스트나 둘 다 할 필요 없는 일을 감수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진 않지만, 아나스타샤 역시 옳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되레 날 굉장히 걱정하기 때문에 그녀는 종종 그렇게 내가 막 나가는 걸 불안하게 생각한다.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다른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그리고 홀 밖으로 나온 나는 감사마저도 쉽게 할 수 없는 친구를 만났다.

“…….”

“끝났어?”

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미안하다고 하면 그를 바보 취급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고맙다고 할 정도로 양심이 파탄 나 있지도 않다.

바보처럼 눈도 못 마주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스마트폰을 흔들며 말했다.

“밖에서 이걸로 보고 있었는데, 파이널리스트다운 무대던데. 이전에 봤던 솔로보다 어쩌면 협주곡에 더 능숙한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랬나요?”

“그러니까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지 않나 싶어.”

“예?”

내가 맹한 소리를 내며 되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사이에 의사소통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었어? 내 생각엔 둘 중 하나가 차이코프스키를 준비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마, 맞아요! 알고 계셨나요?”

난 깜짝 놀랐다. 에르네스트도 모르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건가? 그래서 내가 멋대로 하는 것도 다 받아 준 거고?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답했다.

“아니? 전혀 몰랐는데.”

“예?”

“그냥 네 의도에 따라 주고, 그다음에 나와서 생각해 봤지. 그런데 그때 굳이 벨소리로 방해를 해야 할 이유가 딱히 없겠더라고.”

“…….”

그의 추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떻게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렇게 추리해 낼 수가 있지?

난 결국 모든 걸 실토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바보라서 그래요…….”

“……응?”

“차라리 그냥 손을 들고 일어나서 직접 말할걸 그랬어요. 그저 머릿속에 슈만만 가득 차서…….”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서 다른 생각이 전혀 안 났다. 그래서 에르네스트까지 끌어들였다. 이제 와서 변명이 될 거라 생각도 하지 않지만, 난 적어도 그가 궁금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러지 않길 잘했다는 투로 말했다.

“그랬으면 더 난리 났을걸.”

“그래도…….”

“아무튼 깔끔하게 원하는 대로 정리되었으니 됐잖아. 아무도 모를 테고.”

그 말대로긴 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니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했고, 콩쿠르 참가자 당사자인 루카스는 큰 문제 없이 자기 순서를 마무리했다. 에르네스트는 밖에서 1시간이나 우릴 기다렸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내가 무엇이든 해 줄 생각이 있었다.

가만 이야기를 듣던 아나스타샤가 툭 끼어들며 물었다.

“넌 그걸로 괜찮니? 에르네스트.”

“뭐가 문젠데?”

“……네가 그렇다면 모르겠어.”

에르네스트의 짧은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그녀가 에르네스트와 함께 내게 다신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칠 거라 생각했었는데, 묘하게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아무튼, 정확히 어떻게 된 상황인 건데. 설명 해 줘. 타티아나.”

난 아나스타샤의 상태도 조금 걱정이었지만, 설명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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