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17화 (617/1,277)

##  617화

난 어째서 혼자서 독단적으로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무대에서 직감했던 전체적인 부조화와 그에 대한 확신 등. 사실 그렇게 명쾌한 근거로 댈 이유들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슈만의 협주곡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니라서 알아차렸다고? 어떻게 그렇게 알 수가 있어?”

“그냥…… 알 수 있었어요.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몇 번 보기도 했으니.”

“몇 번 봤다고 알 수 있는 거야……?”

그녀는 내 설명을 듣고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의외로 가볍게 받아들였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어. 나도 차이코프스키를 준비할 때와 슈만을 시작할 때는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니까.”

“그건 나도 달라. 그런데 겉으로 보이냐고.”

“보일지도 모르지. 저 애 눈에는.”

“…….”

에르네스트 본인도 그게 가능한지 이해하고 있진 못하지만 그냥 내가 했으니 믿겠다는 투였다. 난 약간 난감했다. 믿어 주는 건 좋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나스타샤가 할 말이 너무 없지 않나요?

차라리 두 사람이 같은 입장이라면 나도 대하기 조금 편할 것 같은데, 정작 피해를 가장 많이 봐서 의문을 표하고 의심해야 할 에르네스트가 대수롭지 않게 대해 버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일단 내가 가능한 해명을 이어 나갔다.

“루카스가 특히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면이 많은 연주자였기 때문일 거예요. 저도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었어요.”

아나스타샤는 날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타티아나. 난 네가 그렇게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래서 충분히 고민했을 테고…… 다른 연주자 일에……. 아니다, 나도 생각이 정리가 잘 안 되네. 미안해.”

“미안하실 건 없어요. 사실 저도 아나스타샤에게 야단맞을 생각 정도는 하고 있…….”

“야단? 그랬니?”

그녀가 복잡해하고 있을 때 슬쩍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실수를 했다가 딱 걸렸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빛내며 날 돌아보았다. 난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곧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럼 해도 되겠네?”

“……예?”

“후후후, 농담이야.”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런 상황에 마주하게 되더라도 난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하고, 가능하다면 시도해 버리겠지. 거기에 대한 후회는 없다. 단지 아나스타샤가 그런 날 피곤해한다면…… 슬플 것 같다.

귀찮아하진 않아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그녀가 싱긋 웃었다.

“난 되레 칭찬해 주고 싶은데?”

“정말인가요?”

“응. 잘했어.”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날 배려한 걸까?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정말 예상외였다.

“직접 나서지 않고 암약하며 에르네스트를 내세운 것 말이야. 정확한 조치였어.”

“……?”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꼭 이렇게 해. 알았지?”

“저, 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당황해서 부정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듣지도 않고 웃기만 했다. 거기에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바로 그거라는 투로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나도 비밀 임무를 받은 기분이었다니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행동부터 지시하니까 어떻게 안 따르겠어?”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그만두란 의미였는데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완전히 의기투합해선 날 놀려먹기 시작했다.

결국 세상 모든 스테이지 매니저들을 위한 위기관리 매뉴얼이라도 써서 출판하면 잘 팔릴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나왔고, 이 상황에 대항하길 포기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웃다 기절하기 직전까지 갔다.

이 와중에도 난 친구들이 웃어 주는 게 좋다.

내가 한 일은 일반 청중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고 또 민폐라 볼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그 상황을 위기라 생각했던 날 믿고 이해해 주고, 또 나와 같은 긍지와 명예를 공유하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홀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아나스타샤가 그 끝에 매듭을 지으려 했다.

“아무튼…… 우리만 아는 비밀로 남겨 두자.”

“어디 알릴 일도 아니긴 하지.”

“연주자인 루카스 본인도 아마 모를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카스에게 가서 직접 물어본 건 아니지만 그가 지휘자와 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똑똑히 본 바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벨소리로부터 문제를 알아차렸기에 그렇게 한 것 아닌가?

내가 의문을 표하자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연주회 시작하려는데 벨이 울렸고, 그것 때문에 시작이 잠깐 미뤄진 사이에 벨이 울린 것과는 전혀 상관 없이 프로그램을 확인해 보았다가 실수를 알아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걸?”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냥 연주 시작이 잠깐 미뤄진 것이 그에게 행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별 상관 없긴 하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우리 세 사람만이 공유하는 비밀이 생긴 걸까? 갑자기 무언가 재미있어지기도 했다.

곧 그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나오나 보네?”

우리가 있는 복도는 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홀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해서 봤더니 방금 전 무대 위에 올라 있던 연주자, 루카스 맥케이가 막 대기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루카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는 미국에서 온 터라 그의 부모님 외엔 현지에 알 사람이 별로 없었을 텐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카메라도 몇 대 보이는 걸 보니 언론에서도 취재 중인 것 같았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는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뉴스감이긴 하다.

난 루카스가 연주를 제대로 마치고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인터뷰도 하는 것에 꽤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짧은 인터뷰를 마친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장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에르네스트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지만.

루카스는 시원스런 미소와 함께 영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까 홀에서 뵈었던 분들이군요.}

홀에서 뵌 사람들은 저기에도 많고 그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건 이유는 명백했다.

{제가 러시아어를 몰라 죄송하지만 꼭 이야기하고 싶은게 있어서. 혹시 영어로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시죠.}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이렇게 불러야 하는 게 맞나요?}

루카스는 곧장 에르네스트에게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이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그리 친분이 없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래도 루카스는 꽤나 친근하게 말을 붙였고, 에르네스트는 짧게 받았다.

{그냥 에르네스트면 됩니다.}

{오…… 그럼 저도 그냥 루카스라고 불러 주세요.}

{…….}

이렇게 친하게 굴 줄은 몰랐는지 에르네스트도 조금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벌인 일의 실질적 시행자였다. 때문에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당히 고민하고 있었다.

{홀에서 있었던 사고에 대해선 미안합니다.}

고민 끝에 에르네스트가 내린 결론은 혼자서 이 모든 매듭을 짓는 것이었다. 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루카스의 반응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하, 연주 전이라 괜찮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사과받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군요.}

{뭐가 다르죠?}

{당신의 그 전화벨이 최소한 두 사람의 목숨을 살렸거든요.}

{?}

에르네스트가 시치미를 뚝 떼고 궁금해하는 표정을 하자, 루카스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엔 행운을 얻어 낸 사람 특유의 은근한 기쁨이 깔려 있었다.

{다른 분들에겐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이번에 저와 오케스트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어서 사실 첫 곡에 엄청난 사고가 벌어질 뻔했습니다.}

{사고? 무슨 사고입니까?}

{알고 보니 오케스트라의 직원이 제 프로그램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순서를 거꾸로 했더군요. 그리고 안내 방송에선 순서를 다시 반대로 읽었다가 정정하는 바람에 전 문제를 못 알아차렸고요.}

내가 무대 상황을 보고 예측했던 그대로였다. 설마하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처럼 큰 콩쿠르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살짝 놀라워했다. 끝까지 모른 척할 심산처럼 보인다.

{무슨 말입니까? 첫 곡은 슈만이었는데.}

{하하, 전 원래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려 했습니다.}

루카스는 솔직한 목소리로 덕분에 살았다는 듯 말했다.

{벨소리가 제 시야를 환기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문제를 전혀 느끼지 못했겠죠.}

{그랬습니까? 그래서 다시 오케스트라와 상의하고 연주를 잘 했기에 콩쿠르에서 살아남으셨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정확합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살아남은 다른 한 사람은? 지휘자입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오케스트라와 연주자가 각기 다른 곡을 준비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면…… 단순히 연주자인 루카스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지휘자의 안일함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부족에 대한 질타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전체의 신뢰와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었다. 거기에 끼어 곤혹을 치러야 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려들었을까? 그런데 그중에 딱 두 명을 꼽자면 에르네스트가 말한 대로 연주자와 지휘자 두 사람일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카스가 다 지나간 일이니 이젠 말할 수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뇨, 레프가 죽일 뻔했던 오케스트라 직원이죠.}

{죽인다고요?}

{문제없이 제 무대가 잘 진행되었음에도, 연주가 끝나고 나서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 직원을 거의 반쯤 죽일 기세더군요. 만약 무대 위에서 진짜로 문제가 터졌다면…… 생각만 해도 무섭군요.}

아마 정직이나 심하면 해고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루카스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끼어들어서 다행이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지막이 웃었다. 루카스 한 명만을 구한 게 아니라 크게는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구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루카스는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한 가지 묻고 싶었습니다. 혹시 모든 걸 다 알고 일부러 그 타이밍에 벨소리를 울린 겁니까?}

{무슨 말이죠?}

{그 타이밍에 울린 곡이 슈만이었잖습니까. 다른 곡이었다면 전 아마 끝까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겠죠. 벨소리가 아니라 음악 파일이었다거나? 혹시 그런 거 아닙니까?}

루카스는 이런 우연이 그냥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말하고 있었다. 난 움찔했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그 벨소리는 내가 일부러 울린 것이 맞았으니까.

난 조금 고민했다. 모든 게 에르네스트의 실례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내가 한 일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해도 루카스는 좋게 받아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수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한 번 시작한 연기를 거둘 생각이 없었다. 지금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난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진짜 전화가 왔었습니다.}

{누구에게서?}

{친구입니다.}

{그 친구분과 혹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

소름이 다 끼쳤다. 뭐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알고 있다기엔, 루카스는 처음에 내 얼굴을 힐긋 봤을 뿐 그 후론 별다른 제스처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고.

날 의심하고 있다면 내 쪽을 봐야 할 텐데,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도 에르네스트는 혹시나 싶었는지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그 친구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루카스는 오해라며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정확한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 준 친구분이야말로 제게 있어선 행운의 여신 같은 존재라서 말이죠.}

{행운의 여신?}

{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

포르투나라는 행운의 여신이 있기에 고유명사처럼 사용한 말이었다. 루카스가 생각하기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졸지에 행운의 여신이 된 나는 가볍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냥 농담으로 받아 주어도 될 텐데, 그렇게 대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종종 퉁명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농담을 농담으로 못 받는 사람은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심각한지 모르겠다.

되레 루카스가 조금 난처해할 무렵,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제가 잘 전해 주도록 하죠.}

루카스는 그 정도만 해 줘도 만족이라는 듯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