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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18화 (618/1,277)

##  618화

그 후로도 에르네스트는 모든 일에 모르쇠로, 단지 자신이 스마트폰을 꺼두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대했다. 루카스는 그런 에르네스트에게 직접 고맙다고 말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굉장히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서로 딱히 불만을 가질 일은 없었기에 분위기는 꽤 좋았다.

{아무튼 어떤 결과를 마주해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루카스는 히죽 웃었다. 일단 이 큰 콩쿠르에서 자기 차례를 모두 마무리 지은 연주자의 후련함이 엇비친다.

거기에다가 심사위원들에 앞서 딱 봐도 연주자들로 보이는 우리들에게 평가를 묻고 싶어 하는 모습도 섞여 있었다.

{다만 에르네스트가 제 무대를 직접 보지 못한 건 아쉽군요. 대신 친구분들은 문제없는 무대를 보셔서 다행이기도 하고.}

무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해선 당사자들이라 할 수 있는 에르네스트와 루카스 두 사람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이제 나와 아나스타샤 쪽으로도 시선이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니 아나스타샤가 먼저 인사했다.

{아나스타샤예요. 영어 할 줄 알아요.}

{반갑습니다. 루카스입니다.}

{연주 좋았어요. 슈만은 무대에서 바로 준비했다곤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침착했고요.}

{칭찬 고맙습니다.}

아나스타샤의 평은 간결하고 무난했다. 루카스 역시 뭔가 길고 찬사투성이인 평가를 원한 건 아니었는지 그 정도면 만족하는 듯 웃었다.

그다음은 자연스레 내 쪽으로 시선이 향한다. 난 왠지 모르게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말했다.

{타티아나라고 해요.}

{아…… 그렇죠.}

{?}

그런데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것임에도 루카스는 알은척을 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타티아나. 혹시 미국에서 온 꽉 막히고 괴팍한 아저씨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까?}

{……예?}

{음악가들에 대한 모욕을 참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난 문득 그의 아버지인 잭슨을 떠올렸다. 러시아에서 열리는 콩쿠르를 불신하던 분이었다. 사실 그때 난 에르네스트가 그것을 모욕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일부러 나서서 차근차근 오해를 풀려고 했던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안 봐도 뻔하다는 듯 루카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곧 차분하게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 정말 미안하고, 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진심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 아저씨가 더 이상 삐딱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1회 우승자가 미국인이었다는 걸 다시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니 말이죠.}

{……사실이니까요.}

{아, 그렇다고 제가 미국에서 왔다는 게 포스트 반 클라이번이 되겠다느니 그런 말은 아니고…….}

그는 자기 말이 듣기에 따라 러시아인들 앞에서 굉장히 도발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는지 우왕좌왕하며 말을 되풀이했다.

난 가볍게 웃었다. 순수한 결의와 감사를 곡해해서 들을 생각은 없었다.

{후후, 무슨 말인지 알아요.}

{다행이군요.}

{그리고 우승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주를 지켜보니 충분히 그런 생각도 들던걸요.}

{그게…….}

그런 말을 들을 몰랐다는 듯 루카스는 당황해했다. 난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연주자들도 만만찮을 거예요.}

아직 여섯 명이나 남아 있다. 모레 있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난 그때 가장 좋은 결과를 받아 봤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루카스는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그럼 그렇지 하며 피식 웃었다.

{타티아나는 제 팬이 아니겠죠? 혹시 누굴 응원하시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

{아……! 역시.}

내가 예카테리나와 함께 루카스의 모습을 봤던 것처럼, 그 역시 우리를 봤던 걸까?

루카스는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굳이 내게 더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또한 동시에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곧 그는 시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전 콩쿠르 중엔 다른 경쟁자들의 연주를 안 보는지라 그분의 실력은 잘 모르겠지만…….}

연주자라면 누구나 경쟁에 있어선 예민하고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겨룬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것에 집중하기에도 벅차고, 다른 사람의 음악에 혹여나 영향을 받을까 봐 아예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연주자들도 굉장히 많다. 사람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상대가 뛰어나길 바라면서 동시에 실수하길 바라기도 한다. 실수 또한 실력이니 변명의 여지 없이 냉혹하게 제쳐버릴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뛰어난 상대를 바라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 모순적이고도 호전적인 생물이 바로 우리 연주자들이었다.

그 모든 감정과 생각. 그리고 같은 걸 이해한다는 신뢰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루카스가 말했다.

{어떤 사고도 없이 완전하게 자기 연주를 다 할 수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루카스는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그의 부모님이 우리 이야기가 언제 끝나나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 가 봐야겠네요.}

아쉬움은 하나 없이 무척이나 만족한 목소리.

{다음에 또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연주자 친구들.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루카스는 마치 영화에서처럼 예스럽게 인사를 했다.

친구라 불려도 그리 이상한 기분이 아니었다. 짧게 만났다고 해도 깊은 인상이 남기도 한다. 루카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지고, 아나스타샤가 날 보며 말했다.

“좋게 된 것 같아 다행이네.”

“그렇죠?”

“기쁘니?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무엇에 대해 기쁜지 묻지 않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전달받기를 원하는 듯한 표정.

“기쁘죠.”

“네가 그렇다면 나도 기뻐.”

저도 그래요.

혹시나 아나스타샤가 피곤해할까 걱정했던 마음은 그녀의 웃음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난 마음이 너무나 가벼워졌다.

에르네스트에겐 갚아야 할 빚이 생기긴 했지만, 빚 또한 약속과 결속이라 생각하니 그건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미소를 짓자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말했다.

“다음 것도 봐야겠지? 그냥 가면 에르네스트가 너무 불쌍해지니까.”

“뭘 불쌍해. 난 상관없어.”

“또 그런다.”

에르네스트는 1시간 동안 기다린 것밖에 없으니 사실 불쌍하긴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건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난 지은 죄가 있었기에 가만히 있어야 했음에도 아나스타샤와 함께 웃고 말았다.

***

파이널은 파이널다운 수준의 무대를 보여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두 번째로 나온 참가자의 연주를 되새기다가, 내년에 저런 피아니스트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냥 무대에서 최고의 연주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

두 번째 연주까지 끝나자 파이널 1일 차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시간은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어딘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서 놀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영부영할 것 없이 빨리 보내기로 했다. 타티아나의 집은 꽤 거리가 있어서 지금 출발해도 늦는다.

그리고 타티아나를 보낸 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택시를 잡기 위해 조금 넓은 대로 쪽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 참 별일이었지?”

툭 지나가듯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루카스 이야기야?”

“응.”

오늘 있었던 재밌는 일이라면 그게 가장 크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처음과 달리 꽤나 풀어진 태도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다 행운의 여신이 구제해 준 덕분이겠네.”

루카스가 했던 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말에 농담으로라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한 발자국 더 치고 들어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에르네스트.”

“……무슨 생각?”

“타티아나야말로 행운의 여신에 어울린다고.”

근래 예카테리나에게 들었던 말도 있고, 스스로 미처 몰랐던 무의식을 자각한 점도 있어서 에르네스트는 그런 시각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 실력도 배경도 심지어 인격적인 면도 모자랄 게 없는 사람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친구로서 그녀와 지내왔다. 이제 와서 그 동등한 관계를 자신이 먼저 무너뜨려 버리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약간 딱딱하게 에르네스트는 틀에 박힌 말을 내뱉었다.

“타티아나는 그냥 타티아나야. 그런 수식은 안 어울리는데.”

“뭐라니?”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나스타샤 역시 예카테리나처럼 많은 것을 읽어내어 알고 있다는 걸.

에르네스트는 지금 변명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변명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나스타샤에겐 똑바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애는 신 같은 게 아니야. 연주자 본인도 몰랐던 위화감을 알아차린 것도 모두 그 누구보다 훨씬 더 노력해서 음악뿐만 아니라 무대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지.”

“단순히 노력의 차이라는 거야?”

“단순하지 않은 노력의 차이지.”

“…….”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가 작곡 공부를 하며 저변을 넓혀 나가는 것을 대단하다 말하곤 했지만, 사실 그녀야말로 어쿠스틱 엔지니어링에까지 폭넓게 관심을 두며 다재다능한 연주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노력은 단순한 재능에서 오지 않는다는 걸, 에르네스트는 너무나 잘 안다.

아나스타샤 역시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알았다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었을 거야. 그 애는 행동도 굉장히 빠르고 정확했으니까.”

“난 이제 놀랍지도 않네. 예전부터 그랬잖아?”

입학시험을 쳤을 때부터 타티아나는 그런 모습을 보였었다. 처음엔 그런 그녀에게 얼마나 헛소리도 많이 했던가. 지금은 생각만 해도 죽고 싶어질 정도의 창피한 소리들이었지만, 그때도 타티아나는 참고 들어 주면서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실력으로 관철해 나갔다.

“그리고 그런 판단과 개입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건 그렇지만.”

아나스타샤도 저번 파리에서 봤던 것이 있기 때문인지 쉽게 수긍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면서도 에르네스트가 약간 떨어진 시선으로 담백하게 타티아나를 평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넌 타티아나가 그렇게 전부 나서는 것에 아무 생각도 안 드니?”

“무슨 소리야?”

“왜 타티아나가 해야 하냔 말야.”

그런 생각은 에르네스트도 했었다. 다만 지금은…… 타티아나의 의지를 어떻게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 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또다시 정론 같은 말만 나온다. 아나스타샤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일순 드러냈으나,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에르네스트는 한순간 못 참고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일에 내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진다면, 그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

뱉고 나서 실언임을 깨달았다. 무의식이 정말 무섭긴 하네. 에르네스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애가 하는 일에선 사명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안 따르겠어.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진 에르네스트가 입을 다무는 모습을 본 아나스타샤는 공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조곤조곤 물었다.

“그 애는 신 같은 게 아니라며?”

“……그렇지.”

“……넌 그 애가 너무 착하니까 동조하고 있는 것일 뿐이야. 네 본심은 어떤데?”

내 무의식이 곧 본심인 것 아닌가? 에르네스트는 약간 혼동이 왔지만 이내 아나스타샤가 뭘 묻는 것인지 깨달았다.

타티아나가 하는 행동이 아닌 그녀 본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묻는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그러는 아나스타샤 너야말로.”

“나?”

아나스타샤는 순간 치사하게 굴지 말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고, 여태껏 본 중 가장 솔직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난 그 애가 신은커녕 선생님도 아니길 바라. 난 너보다 훨씬 더 이기적인 애라서.”

“…….”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기적인 애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

종종 타티아나를 선생님 같다고 말하는 친구들은 많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대놓고 그런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하는 일들엔 역시 대단하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본심을 말해 보라는 아나스타샤의 말이 마음대로 그의 입을 움직였다.

“나랑 같네. 아나스타샤.”

“응?”

“나랑 같다고.”

놀란 눈을 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아직도 전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확인할 때마다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아나스타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무슨 심산인지 말로 묻지 않고 독심술로 파악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초능력을 배웠을 리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도로 쪽을 보았다. 운 좋게도 택시 한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도로가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태울 수 있겠다 싶은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더 할 이야기 있으면 그냥 보낼게.”

가벼우면서도 진지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에르네스트는 묘한 균형감각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의 날카로운 눈매에 잠시 망설임이 맺혔다가, 곧 사라졌다. 그녀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래, 빨리 가.”

“…….”

지금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도로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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