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9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파이널 이튿날. 니콜라이 선배와 막심 선배가 무대에 오르는 날이다.
난 아침부터 연락을 해 볼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되도록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점심시간 즈음 니콜라이 선배에게 살짝 전화를 걸어 보았다.
다행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니콜라이 선배는 내 전화를 받더니 반갑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 비행기 표 사 줄 테니까 여기 오지 않을래요.
“그…… 예?”
농담이라는 걸 알아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중요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선배에게 장난처럼 가겠다고 받아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 잘라 못 가겠다고 할 수도……
- 하하하, 그냥 농담이었는데. 괜한 소릴 했네요. 미안해요 타티아나 후배님.
내가 곤란해하자 선배는 크게 웃으며 거꾸로 사과를 해 온다. 어쩌면 선배는 그냥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지 웃고 싶은 계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니콜라이 선배는 늘 태연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서 아직 10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원숙함을 보이는 연주자였지만, 그래도 지금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테니까. 이럴 때 가벼운 웃음은 꽤 중요하다.
난 선배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대신 우승하신 뒤에 연주회 여시면 꼭 갈게요.”
- 그렇다면 전 후배님을 위해 가장 좋은 자리를 준비해 놓아야겠네요.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우승과 이후 연주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자칫 경솔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염려 등은 모조리 미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더 그 목표에 가까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니콜라이 선배는 그런 의욕과 에너지를 가지고 실제로 목표에 다다를 수 있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첼로 연주자이기도 하다.
난 니콜라이 선배의 연주들과, 어제 있었던 다른 첼로 파이널리스트들의 연주를 모두 봤었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의 입장에서 딱 하나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저 중 누군가와 합주를 해야 한다면, 친분 등을 떠나서 니콜라이 선배와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연주자로서의 내 견해이자 평가였고, 때문에 난 니콜라이 선배가 충분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진짜 프로 첼리스트들의 기준은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컨디션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 식사를 안 하는 편이에요.
“허기가 지면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나요?”
- 전 괜찮더라고요. 되레 배가 고파야 더 감성 있게 깊은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예? 아하하하하. 그런 영향을 받으시면 어떡해요?”
- 그러게요.
파이널 무대에 올릴 곡에 대한 이야기나 리허설 상태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몇 시간 뒤에 중계를 보면 전부 알 수 있을 테니까. 난 벌써부터 청중이 된 마음으로 니콜라이 선배의 음악을 기대하고 있었다.
실없는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주고받고, 이윽고 니콜라이 선배가 말했다.
- 잠시…… 가 봐야겠어요. 다음은 무대에서 보여 드리도록 하죠.
“예, 바쁘실 텐데 오래 전화해서 죄송해요.”
- 미안하다 하시지 말고, 응원한다고 말해 줄래요?
“당연히 응원하죠. 첼로 부문에서 꼭 우승하세요!”
- 고마워요. 타티아나.
따뜻한 인사말과 함께 전화는 끝났다. 난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원래 잘 하는 분이었으니까. 방금 전 통화로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고 힘을 얻어서, 하시는 그대로 잘 하셨으면 좋겠다.
단순한 바람이었지만 난 이런 바람도 이루어지려면 진심으로 바라야만 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내가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 중 바이올린 부문의 참가자. 막심 선배도 남아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 있는 니콜라이 선배와 달리 막심 선배의 무대는 직접 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때문에 나와 친구들은 오늘은 바이올린 콩쿠르를 관람하기로 했다.
저번엔 같이 보러 갔다가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만 못 들어오고 덩그러니 밖에서 기다렸던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시간 맞춰 왔네? 타티아나.”
콩쿠르 시작은 오후 6시. 우리는 그 전에 막심 선배를 보기 위해 1시간 정도 일찍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모였다.
오늘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몰려들고 있어서, 우리는 복도 구석을 차지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나 어제 너희들 있나 보려고 중계만 살짝 봤는데 에르네스트밖에 안 보이더라?”
“……그랬냐?”
“당연하지. 혼자서 걸어 나가 버리니까 카메라가 뒤쫓다가 황급히 다시 무대 쪽을 비추더라고. 왜 그랬어? 그 미국 애 별로였어?”
오늘은 발렌티나도 모여서 우리는 네 명이었다.
발렌티나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상황을 잘 모른다. 때문에 중계로 봤을 땐 에르네스트의 벨소리가 울리고, 그가 벌떡 일어나선 나가는 것밖에 못 봤을 것이다.
그가 앉아 있지 않고 나가 준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일단 홀 안에서 벨소리를 꺼 놓지 않은 것은 매너 없는 행위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리고 연주자로 꽤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말 내가 생각이 짧긴 했었다. 뒤늦게 걱정이 든 나는 혹시나 해서 콩쿠르에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다행히 에르네스트에 대한 내용을 담은 기사는 없었다. 대부분 연주에만 중점을 두었지 해프닝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만약 연주가 엉망이 되었다면 그 원인 등을 찾다가 에르네스트에게까지 닿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 문제 없는 좋은 연주로 무난히 지나간 덕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 별 상관 없는데.”
“그랬니?”
이젠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발렌티나는 조금 더 깊게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동시에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 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난 길게 생각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지나가서 알 필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알려 주지 않고 꽁꽁 숨길 이유도 없었다. 발렌티나가 저널리즘이 투철해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벌어질 뻔했던 사건에 대해 대대적으로 이야기할 것도 아니고.
갑자기 시선들이 내 쪽으로 향하자 발렌티나는 의아해하며 날 바라보았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에르네스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발렌티나는 작게 탄성을 토하며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다. 타티아나.”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어요. 그냥 운 좋게 제 눈에 보였던…….”
“아니, 그거 말고. 나라면…… 알고도 가만있었을 것 같거든. 넌 예카테리나를 며칠이나 데리고 있기도 했었잖아? 그렇게나 응원하는데.”
누가 보더라도 내가 이 콩쿠르에서 가장 응원하는 건 예카테리나였다. 때문에 그녀의 우승을 위해선 무언가 행동으로 돕는 것뿐만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서 돕는 방법도 존재할 수 있었다. 나도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인 건 아니다.
발렌티나는 솔직하게 그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자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며칠간 예카테리나와 있으면서 알게 된 것도 있었어요.”
“뭔데?”
“제가 그녀를 위한다는 핑계로 행동한다면 결코 좋아하지 않았겠죠.”
사실 예카테리나에게 직접 물어본 바는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도 자존심 강하며 뛰어난 상대를 바라는 연주자였다. 엉뚱한 이유로 경쟁자 하나가 낙오하는 걸 바랄 리 없다고 생각한다.
내 말을 들은 발렌티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친구가 원할 걸 해야 한다는 거구나.”
짧고 명료하게 발렌티나는 이야기를 정리했다.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각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그 후로도 잡담을 나누던 우리는 대기실에서 잠깐 나왔다는 막심 선배의 메시지를 받고는 선배가 말하는 곳으로 향했다. 3층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와 줬구나.”
미리 와 있던 막심 선배는 반듯한 차림으로 우릴 맞이했다. 바이올린 부문 파이널리스트다운 모습이었다.
탄탄한 체격에 곧게 선 목. 한눈에 봐도 오늘의 주역에 가까워 보이는지,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은 막심 선배 쪽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선배는 답잖게 투덜거렸다.
“오늘 날 찾아온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너희 얼굴이 제일 반갑다.”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반갑다는 건지 모르겠다. 난 이야기나 들어 보기 위해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정말인가요?”
“정말이지. 친구란 놈들은 이제 와서 무슨 자기들은 콩쿠르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늘어놓기나 하고, 부모님은 날 만지면 깨질 유리처럼 대하고, 또 직원들은 두 번이나 와선 내 레퍼토리를 확인하더라고.”
“레퍼토리를요?”
“그래. 아니, 몇 번을 말했는데도 왜 자꾸 묻는 거야?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 같더라니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린 서로를 돌아보았다. 왜 연주자의 레퍼토리를 몇 번이고 확인하는지에 대해 짚이는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거 때문인가?”
“그거 때문일걸.”
“……뭐야? 그거가 뭔데?”
우리끼리 서로 소곤거리며 이야기하자 막심 선배가 궁금해했다. 하지만 발렌티나에게 다 이야기했던 것과 다르게, 막심 선배에겐 말해 주지 않았다. 이제 1시간 뒤면 무대에 올라야 하는 연주자에게 괜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맞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젠장, 너희들까지 그러기냐…….”
선배는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리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는 듯했다. 난 선배의 관심을 더 돌리기 위해 가볍게 물었다.
“컨디션은 괜찮으시죠?”
“당연하지. 오늘은 적당히 10km 정도 뛰고 왔어. 시간 재 보니까 상태 좋던데.”
막심 선배는 자기 몸을 기계처럼 다루듯 말했다. 자기 몸이 곧 재산인 연주자들은 그렇게 말하는 경향이 조금씩은 다 있긴 하지만, 선배의 경우는 그 정도를 한참 넘어 있었다.
선배는 여름이면 래프팅을 하고 겨울이면 스노보드를 타며 모든 계절을 즐기는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콩쿠르 당일 10km씩 달리기를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만약 그렇게 뛰었다면 연주회는커녕 이틀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텐데.
특히 바이올린 연주자는 서서 연주해야 하는데 연주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면 어떻게 하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왕 왔으니까 즐겁게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볼게. 교수님은 퍼포먼스적인 부분에 신경 쓰다가 다 말아먹지 말고 똑바로 하라고 하시지만, 어디 파가니니가 그냥 바이올린만 잘 켜서 뜬 줄 아나?”
“아하하하…….”
잠깐 들었던 걱정은 열정 넘치는 막심 선배의 말에 증발해 버렸다. 이 강한 연주자를 막을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