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20화 (620/1,277)

##  620화

막심 선배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던 대로 약 1시간 동안 이어진 무대는 단 1분도 집중을 놓을 수 없었다.

첫 번째 곡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 KV219.

산뜻하고 밝은 음색으로 시작되는 협주곡이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한 명이 일어나 연주 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음악이 흘러간다.

솔리스트 한 명에게 포커싱이 향하는 건 같지만, 피아노 협주곡 등에선 잘 느낄 수 없는 바이올린 협주곡 특유의 조화였다. 특히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물 흐르듯 유연한 전개의 흐름은 굉장히 잘 표현되었다.

막심 선배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된 것처럼 현악들을 이끌고, 그 현악들이 다른 악기들을 부른다.

그리고 어떨 땐 지휘자처럼 먼저 뒤쪽으로 소리를 보내 필요한 악기들을 자신의 옆으로 불러들였다. 연주자들은 지휘자의 지휘봉보단 소리에 더 민감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지휘자는 적절하게 비어 있는 틈을 다른 악기들로 붙여 주었다.

난 막심 선배가 솔리스트로서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오케스트라들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니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특유의 카리스마와 자신감은 수십 명의 노련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하기에 전혀 모자람 없었다.

2악장까지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흘러가던 협주곡은 3악장에 이르러서 귀여운 춤곡으로 발전되다가, 피날레에 이르러 본색을 드러냈다.

조성이 변화하며 화려하고 정열적인 음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 막심 선배는 지금까진 볼 수 없었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바람이 불고 빗줄기가 얼굴을 때린다. 귀가 아닌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듯한 음색이었다.

그 압도적인 연주로 모두를 사로잡은 막심 선배는 곧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본 주제로 돌아갔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연주였다.

연주가 끝난 뒤 청중들의 반응은 정말 폭발적이었다. 콩쿠르가 아니라 콘서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op35이었다.

“모차르트도 정말 좋았지만, 차이코프스키 정말 대단했지?”

“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잘 모르지만…… 차이코프스키가 대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더라. 진짜 소름 돋는 거 있지.”

소곡부터 오페라까지 수많은 음악들로 러시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음악가 중 한 명인 차이코프스키. 하지만 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한 곡만 남겼다.

왜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만을 썼는지에 대해 전문가들에 의한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난 차이코프스키가 이 곡을 완성하고 나서 정말 만족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유럽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게다가 처음 이 곡을 공개했을 땐 거친 러시아적 색채가 너무 짙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뛰어난 러시아 연주자들의 손에서 꾸준히 연주되면서 이 협주곡은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이젠 세계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을 꼽는다면 반드시 순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음악가들에게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프로 바이올린 연주자 중에 이 곡을 연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장조를 기준으로 하는 바이올린 선율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낭만적이고 감미롭다. 그렇게 바이올린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 위에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부피감을 함께 올려놓았다.

아름다운 예술품은 바쁘게 지나가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홀에서 이 음악을 마주하면 절대로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다. 그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영혼을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넋 놓고 봤던 것 같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에 비해 이 곡은 바이올린 솔리스트에게 훨씬 더 많은 조명이 가는 곡이기도 했다. 연주자의 비르투오시즘에 무게를 싣는 낭만 협주곡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막심 선배는 이 협주곡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온몸으로 받아 내며 바이올린과 함께 빛났다.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는 솔로 카덴차 구간에 들어서면서 모든 오케스트라가 침묵하고 막심 선배만이 활을 움직였다.

수십 대에 달하던 악기가 단 하나로 축소되었는데도 청중들이 느낄 수 있는 집중력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되레 더더욱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퍼포먼스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던 것처럼, 막심 선배는 바이올린은 화려하게 다루었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몸짓과 표정 등 한 바이올린 연주자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음악만을 전하는 역할이 아니라, 마치 뮤지컬 배우처럼 화려하게 무대를 장악한다. 전신을 온전히 내보이는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한 동작을 하며 억지를 쓸 필요는 없었다. 그저 손짓 하나에 시선을 빼앗기고 돋보이는 피치카토의 한순간에 귀를 빼앗긴다.

“음악 속에서 솔리스트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랬었지?”

막심 선배는 기술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그리고 예술적으로도 너무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카덴차가 끝난 뒤 다시 오케스트라와 합류해선 이전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음악을 마무리한 막심 선배는 그 존재가 이전보다 더 크게 보일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 빼어난 실력은 2악장에 이르러선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또 다른 면모를 드러냈고, 3악장에선 다시 한 번 비르투오조로서의 진가를 뽐냈다.

러시아 낭만의 완성본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속도의 연주. 그 리듬은 1악장의 난해한 카덴차에 비할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아주 정교했다. 조금이라도 테크닉에 문제가 있거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면 곧바로 그 부족함이 드러나 버릴 수밖에 없는 가혹한 음악이다.

그러나 그 가혹함을 완전하게 이겨 냈을 때 선보일 수 있는 음악은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막심 선배는 초인적인 아르페지오를 말끔하게 해내고, 바로 오케스트라가 밀어붙이는 화성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어 다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음들을 처리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힘든 내색 하지 않는다. 무대 위의 배우가 아무리 지쳐도 거친 숨소리를 내면 안 되는 것처럼, 선배는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전율만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제 열여덟 살로 첫 출전? 대체…….}

{체르체소프? 풀 네임이 뭐였지?}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체르체소프. 내가 이전부터 주의 깊게 봐 두라고 했었잖아. 분명 이 시대의 괴물이 될 바이올리니스트니까.}

{저기 기자들 온다.}

무대가 끝난 후 우리는 복도에 나와서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변의 분위기와 평가 등도 살짝 살피고 있었다. 온갖 언어로 들려오는 반응들은 좋다 못해 격정적이었다. 막심 선배의 연주가 이 사람들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팬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우린 가 볼까.”

“이야기 안 하고?”

“지금은 성공적인 연주자로서의 입장을 즐기게 두지 뭐.”

에르네스트는 굳이 지금 나서서 카메라 플래시를 다 같이 받을 필요가 있냐는 듯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막심 선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워낙에 많았다. 친구로서 우리가 가장 먼저 찬사를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나중에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우린 근처 빈 강의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그냥 들어가도 되나 걱정이 들긴 했지만, 에르네스트가 잠깐 동안은 괜찮다며 먼저 자신 있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음악이론 강의실인가 보네.”

에르네스트는 버릇없이 책상에 탁 걸터앉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 강의실엔 악기나 악보 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칠판과 책상뿐이었다. 일반적인 대학교의 강의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스크바 음악원의 강의실이 보통 교과를 가르칠 리 만무했다. 훨씬 깊고 넓은 음악이론들을 배울 수 있겠지.

만약 나중에 내가 이곳에 입학할 수 있게 된다면 이 강의실에서 공부를 할 날도 오게 될까? 여기 있는 세 사람과 모두 함께?

약간 생소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막심 선배였다.

“아, 선배 아깐 잘…….”

- 너희 어디야? 대체.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다.

느닷없이 전화를 건 선배는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도망친 것 같은 입장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변명조로 말했다.

“강의실에 와 있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께 축하는 다 받으셨나요? 아직 얼마 되지 않았는데.”

- 그런 건 순식간이지. 인터뷰 요청도 꽤 있었는데, 내 모토가 뭐겠어? 짧고 강하게. 순식간에 끝냈지.

“……그러셨나요?”

아까 에르네스트가 말한 대로 연주를 마친 후의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해도 좋을 텐데. 너무 빨리 끝내신 거 아닌가 싶다.

하지만 막심 선배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정확히 어느 강의실이냐고 다시 물었고, 난 에르네스트가 말해 준 강의실 번호를 불러 주었다.

잠시 후 도착한 선배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안 늦었지?”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선배는 다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에르네스트, 지금 중계 틀어 봐 봐.”

“?”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삐딱한 자세를 했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곧 화면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콩쿠르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연주자는 대기 중이었다.

“……후, 놓치나 했네.”

막심 선배는 다행이라는 듯 다시 이마를 훔쳤다.

아무리 친한 친구인 니콜라이 선배의 연주를 챙겨 보고 싶다고 해도 그렇지 자기 연주가 끝나자마자 이렇게 급할 이유가 있나? 난 화면을 바라보는 선배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연주는 잘 들었어요.”

“아…… 타티아나. 듣기에 나쁘진 않았지?”

“예. 여러모로 훌륭하셨으니…… 큰 문제 없지 않을까요?”

“큰 문제 없다는 건, 기대해도 좋다는 건가?”

그렇게 말하면서 선배는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을 본 난 선배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눈치챘다.

스스로의 음악에 만족했음은 물론이고, 우승까지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바이올린 부문에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다면? 그다음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모든 부문에서 한 명을 뽑는 그랑프리 상이다. 선배는 지금 그랑프리 상에까지 현실적으로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연주자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간 자만한다는 말을 듣기에 딱 좋은 말이었기에 절대로 직접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난 선배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아마 시험지의 모든 문제에 완벽하게 올바른 정답을 적어 냈을 때 만점을 예상하는 기분과 비슷하겠지.

그 기분에 괜히 성적표가 나와 봐야 안다고 말하는 건 찬물을 끼얹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나중에 예상한 결과가 안 나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선배에게 교훈이 될 일이라 생각하며 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새어 나오려는 흥분을 자제하면서 선배는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럼 다른 기대할 만한 연주도 봐 둬야겠지.”

스스로의 만점을 예상하지만, 이 시험은 다른 만점자들 사이에서도 추가점수를 매겨서 최종 한 명을 가른다. 때문에 선배는 예상 만점자들이 어떻게 시험을 치르는지 보고 싶어 했다. 때문에 바로 이렇게 달려와서 중계부터 튼 것이다.

선배가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진 나는, 그 옆에 서선 나지막이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어떤 분의 연주가 기대되시나요?”

“일단은 니콜라이지. 첼로를 하기 위해 태어난 자식이나 다름없으니까.”

굉장한 고평가였다. 단순한 친분으로 그렇게 평가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되레 친하기 때문에 평가를 깎으려 해도, 도무지 깎을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막심 선배는 한 명을 더 언급했다.

“그리고…… 저번에 본 예카테리나. 그 애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래. 네가 친하게 지내서 하는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짜로.”

선배는 혹여나 내가 오해할까 그렇게 덧붙였지만, 난 괜한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저 예카테리나도 선배가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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