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3화
음악에 파묻혀 있다.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살짝 들며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악센트가 터져 나오며 반원을 그린 오케스트라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간다.
그렇게 흐르는 음의 끝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쉼 없이 손을 움직였다.
‘리허설은 리허설일 뿐이었구나.’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와 했었던 몇 번의 리허설에서 예카테리나는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었다. 붙임성 좋고 사근사근한 새 친구를 사귄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대에 오른 뒤의 그 친구는 생각보다 무서웠다.
좁은 연습실에서 자제하고 있던 목소리는 홀에서 훨씬 더 크게 울려 퍼졌고, 당연히 그에 따른 주장 역시 강력했다. 단신인 솔리스트는 잠깐 긴장을 늦추면 곧바로 거기에 휩쓸려 버릴 정도다.
보통 콩쿠르에 함께하는 오케스트라들이 적당히 색을 옅게 조절하는 것에 비해 이 오케스트라는 정말 쉽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연주자들이 이 오케스트라의 압력에 버거워하며 끌려갔을지 예상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 풍성한 음색은 그야말로 파이널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이 최선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연주자가 잘한다면 그만큼 잘 해 주고, 못 한다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폭로해 버리는 오케스트라다.
다시 말해, 정말 멋진 오케스트라다.
예카테리나는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팔 동작을 상상하며 건반을 눌렀다. 그 정확한 타이밍을 오케스트라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수십 명의 음악가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 음악을 꾸려 나간다.
“…….”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완성하고 난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로 귀가 어지럽고, 주변을 감싼 오케스트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카테리나를 인정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여기저기에서 와닿는다.
물론 그렇다고 슈만을 연주하며 비협조적으로 예카테리나를 시험했던 건 아니다. 오케스트라는 항상 그녀의 의도에 잘 따라 주는 좋은 동료였다. 그러나 함께 멋지게 일을 하나 해내고 난 뒤에 서로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예카테리나는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엄격한 지휘자 레프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리허설이 아닌 제대로 된 연주를 마친 뒤의 흡족함과 유대감 등이 느껴진다. 예카테리나 역시 미소를 돌려주고는 어깨를 추슬렀다.
그다음으로 준비한 곡은 마지막까지 정말 많이 고민했던 곡이다.
‘어려운 곡이긴 해.’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총 3곡이었다.
1번은 가장 무난한 내림나단조.
2번은 고난도의 사장조.
3번은 단악장의 내림마장조였다.
그중에서 3번은 단편적인 주제로 작곡된 하나의 악장만을 가지고 있고, 연주 시간도 15분 정도로 콩쿠르에서 연주할 협주곡으론 그리 적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2번은 라흐마니노프에 필적할 정도로 기교적으로 까다롭고, 실수했을 때 티도 많이 나는 지옥 같은 곡이었다. 거기에다가 음악적으로 완성시키는 일도 끔찍하게 어렵다. 연주자의 역량을 하나부터 끝까지 다 까발리는 곡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세계적인 피아노 콩쿠르라 할지라도 2번 협주곡은 잘 연주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다른 모든 참가자들은 전부 1번 협주곡을 연주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튀기 위해 다른 곡을 골라 봐야 실수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할 뿐, 별로 얻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당연하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도전적으로 2번 협주곡을 선택했다.
그리 똑똑한 결정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그녀를 지도하는 아르카디도 선선히 허락해 주긴 했지만 걱정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어쩐지 이 2번 협주곡이야말로 자신과 잘 어울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평생에 걸쳐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한 곡을 완성시킨다면, 그건 분명 1번이 아니라 2번일 것이라는 그런 자기분석적 믿음이었다.
그야말로 곡에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어느 정도 완성한 결과물을 손에 쥔 예카테리나는 그 뒤에도 믿음 하나로 무대에 오를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마지막으로 타티아나가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애는 이기고 오라고 했었어.’
단순한 응원일 수도 있지만, 이미 레퍼토리를 전부 타티아나에게 보여 준 예카테리나로선 그녀의 말이 단순하게 들리지 않았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루카스의 것과 겹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루카스를 도와주어 그가 준비한 곡을 미련 없이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거기엔 예카테리나에 대한 신뢰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역시,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1번을 연주하는데 어째서 예카테리나만 2번을 골랐는지에 대해 타티아나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저 이 음악이라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예카테리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타티아나가 그렇게 판단한 음악이라면 어디에서든 자신 있게 보일 수 있었다.
“…….”
마음의 준비를 마친 예카테리나는 지휘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지휘봉이 허공을 가르고, 오케스트라는 그녀를 포위하고 객석 쪽으로 밀어내듯 강렬한 사운드를 뿜어낸다.
예카테리나는 마지막 순간 한숨을 내쉰 뒤, 양손으로 건반을 눌렀다. 한 발자국도 밀리지 않고 오케스트라의 무게와 마주한다.
단신으로 가운데에 선 예카테리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적이다.
수백 킬로그램의 검은 무기를 들고 당당히 서서 눈을 부라린다.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은 그녀를 거대한 깃발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곧 오케스트라는 천천히 사그라들다가, 예카테리나가 이끄는 음악으로 포섭되었다.
첫 악장은 알레그로 브릴리안테allegro brillante. 빠르고 찬란한 시를 노래한다.
예카테리나는 팔을 들어 올려 시선을 집중시키고는, 내리꽂아 퍼뜨렸다. 이 1초를 연습하기 위해 수십 시간이 들어갔다. 수만 배에 달하는 시간의 압축이 공기를 뒤흔들고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이렇게 쉬웠던가?’
처음 마주했을 땐 괴물처럼만 느껴졌던 곡인데, 이 어려운 무대에서 펼치는 데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간의 노력과 집중. 그리고 선생님과 부모님, 친구들에게서 얻은 믿음. 그 모든 것이 자신감으로 화하여 예카테리나가 완벽하게 원하는 대로 건반을 연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모든 것이 선명했다. 왼쪽 등 쪽에서 느껴지는 바이올린과 앞의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발밑으로 파고드는 호른. 그 모두가 이 음악의 길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단지 그 가운데를 걷기만 하면 되었다.
당당하게 예카테리나는 발을 내디뎠다.
“…….”
웅장한 행진 다음은 예카테리나만을 위한 무대도 주어졌다.
길을 밝히던 오케스트라가 동시에 침묵하며 양옆으로 물러섰다. 가운데를 걷던 예카테리나는 잠시 멈춰 선 뒤, 가볍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의 비르투오시즘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는 카덴차 구간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가혹한 연타와 쉴 틈 없는 박자. 거기에 엄청난 음량까지 필요로 한다.
카덴차가 있는 수많은 협주곡들 중에서도 이 협주곡의 카덴차는 굉장히 유명했다. 피아니스트들의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1번 협주곡과 큰 차이가 나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 카덴차를 잘 연주하느냐 망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카테리나는 거침없이 손을 내뻗었다.
옥타브를 연타하며 높은 음을 튕긴다. 복잡한 스케일을 빠르게 해치우고는 트릴을 연타하고 글리산도로 긁어 올렸다. 깜짝 놀랄 정도의 기교로 빠르게 위치를 바꾸며 정확하게 건반을 타건했다. 예카테리나는 전신을 사용해서 모든 힘을 쏟아냈다.
그 모습은 마치 격렬한 사투를 벌이는 듯했다.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청중들은 예카테리나의 화려한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곧 오케스트라가 그런 그녀의 위용을 찬미하듯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죽는 줄…….’
미친 듯이 건반을 연주하던 예카테리나는 간신히 한숨 돌리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카덴차 덕분인지 오케스트라가 할 수 있는 음악적 스펙트럼의 범위도 훨씬 더 넓어져 있었다. 오케스트라와의 이해가 한층 더 깊어지고, 결속이 단단해진 기분이 든다.
예카테리나는 팔을 내리고 한동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다가, 다시 팔을 들어 올린다. 끝까지 화려한 하이라이트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
“…….”
그렇게 1악장을 마무리하고 나면, 보다 서정적인 다음 악장이 다가온다.
천천히 걷는 빠르기로 건반을 연주하고, 현악기가 그 위에 선율을 그린다.
협주곡이 아니라 콰르텟 혹은 퀸텟 연주를 하는 것 같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홀로 카덴차를 연주하기도 했다. 몇 명의 연주자에게 음악이 집중되고, 천천히 음미할 수 있게 한다.
그 중심에 선 예카테리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고 하여 밸런스를 잡기 쉬워진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녀는 최선의 집중을 다하여 곡을 이어 나갔다.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화성은 마치 어둑어둑한 저녁처럼 살포시 깔렸다. 그 앞에서 예카테리나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저물었다.
“…….”
마지막 3악장은 다시 빠른 사장조로 돌아왔다. 신나는 리듬에 맞추어 예카테리나는 건반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타카토가 통통 뛰놀고 악센트가 좌우로 균형을 흔들며 무대 전체를 가지고 놀듯 한다.
이 낙천적이고 멋진 음악은 이전까지 있었던 모든 악장뿐만 아니라 차이코프스키의 정수를 내포하고 있었다. 낭만시대 특유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러시아적 색채, 모든 악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조화까지. 예카테리나는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연주에 임했다.
주제는 오케스트라에 넘어가서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다시 피아노에게 와서 귀엽게 찰랑거렸다. 종잡을 수 없는 것 같다가도 너무나 친숙한 음색이라 듣기에 편안하다.
피날레에 이르러 모든 연주자들이 다시 마지막으로 악기의 소리를 홀 전체에 폭발시켰다.
서커스의 마지막 쇼를 보는 것 같은 화려한 옥타브 상승과 하강, 퍼커션의 연타와 폭죽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화려하게 터져 나오는 금관의 화성.
그 모든 조화로 차이코프스키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멋지게 완성되었다.
“좋아!”
“브라비!”
환호 속에서 예카테리나는 간신히 일어나 청중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신이 땀이라 드레스가 달라붙는다.
여기 에어컨은 대체 언제쯤 달 건데?
괜히 한 번 투덜거려 보았지만, 더위 따윈 상관 않고 찬사를 보내오는 청중들을 보니 그런 불평은 쏙 들어갔다.
모두들 자신이 들은 음악에 대한 감상을 전하고 싶다는 듯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절대로 흔치 않다.
예카테리나는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드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부모님들이었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빠도 참. 그렇게 쑥스러움도 많이 타면서.
“……아핫.”
부끄럽지 않은 연주를 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목 아래를 가득 메워서 숨을 뱉는 웃음만 나왔다.
그다음으로 들어오는 시야엔 아르카디 교수님과 친구들이 보였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그리고 에르네스트.
어려서 음악원에 입학한 예카테리나는 음악학교를 다닌 적이 없기에 또래 친구가 적었다. 교수님에게 각자 수업을 듣다 보면 친하게 지내긴 더더욱 힘들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중앙음악학교의 학생들에게 이 정도로 도움과 응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심지어 타티아나와 처음 만났을 땐 바로 대결로 시작된 관계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타티아나 덕분이었다. 물론 그녀는 예카테리나의 성격을 칭찬하곤 했지만…… 예카테리나는 타티아나가 아니었다면 다른 누구와도 이렇게까지 친해지진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들어갑시다. 예카테리나.”
끊임없이 박수를 보내고 있는 청중들을 보며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지휘자 레프가 예카테리나를 불렀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번 인사한 뒤 뒤돌아 레프를 따라 나왔다.
레프는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만족스러웠습니까?”
예카테리나는 레프를 바라보고,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덕분이에요.”
“하하.”
레프 역시 기분 좋은 웃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