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24화 (624/1,277)

##  624화

방금 전 음악의 여운으로 황홀해진 분위기가 홀 앞 복도에 맴돈다. 우리도 그 근처에서 기다렸다. 지금 시간은 7시 15분경. 예카테리나를 보고 이야기를 조금 나눈 후에…… 아마 밤 11시 정도까진 여기에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결과가 오늘 전부 나오기 때문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물론이고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의 결과도 모두 결정되는데 그 자리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다른 친구들에게도 언제까지 있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빨랐다.

“당연히 결과 보고 가야지.”

다행히 시상식을 놓고 그냥 집에 갈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우린 웃으며 이다음엔 뭘 하며 시간을 보낼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우리 네 명 사이에 두 분이 더 합류하셨다.

“얘들아.”

“아, 어머님.”

예카테리나의 부모님이었다. 홀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우릴 찾아오신 모습이었다.

찬찬히 보니 두 분 역시 기쁨이라는 감정을 눈에 보일 것같이 드러내고 계셨다. 딸이 보여 준 화려한 연주와 거기에 열광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 여느 부모건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본 예카테리나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여기 올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후후후. 너희 같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서 좋고 말이지.”

어머님이 예카테리나의 대단함을 조금 더 자랑하신다면 거기에 말을 보탤 생각이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에게도 대화의 저울이 기울었다.

예카테리나가 부모님에게 우리를 어떻게 설명했을지 조금 예상이 가는 바가 없진 않다. 그녀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며 고마움을 표하는 데에 박하지 않은 스타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부모님이 온전히 그녀에게만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다.

때문에 난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방향을 예카테리나가 했었던 연주 쪽으로 돌렸다.

“다른 연주자들은 모두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었어요. 2번을 연주한 건 예카테리나 혼자예요.”

“정말 그러니? 그럼 특별하게 보였을까?”

협주곡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의 부모님들과 감상에 도움이 될 이야기들을 조금 하다 보니 몇 분쯤은 훌쩍 지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언제쯤 나올까?”

예카테리나의 어머님이 홀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작게 말씀하셨다.

지금 여기에서 예카테리나를 가장 기다리는 건 부모님이겠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아나스타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혼잣말과도 같은 질문에 살짝 끼어들어 대답했다.

“연주자 대기실로 가셔서 부모님이라 말씀하시면 들어가실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냥 여기서 너희들과 함께 기다리도록 할게.”

그냥 가서 미리 만나 보셔도 괜찮은데, 어머님은 꼭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혹시 아버님은 다른 생각이신가 해서 돌아보니 별말씀은 없었다.

연주자에 대한 이야기들은 일단락되어 흘러가고, 그다음은 청중들의 감상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머님이 제일 신나하셨다.

“글쎄, 이 양반이 말이지? 난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결혼하고 나서도 본 적이 없…….”

“여보…… 예카테리나 친구들 앞에서 아빠 망신을 시키는 이유를 좀 들어 보고 싶은데.”

“망신이라니? 그만큼 내 남편이 딸을 사랑한다는 건데.”

“……잠깐 담배 좀.”

예카테리나의 아버지는 헛기침을 연달아 하시더니 품속을 뒤적이며 도망이라도 치듯 빠져나가셨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부담스러우신 것 같았다.

그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계시던 어머님은 장난스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담배 피우고 있을 땐 산적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저 사람이 나한테 프로포즈할 때 시를 써서 줬다면 믿어지니?”

“시요?”

“응.”

의외이지 않냐는 듯 묻고 계시지만, 사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푸시킨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을 암송하며 자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다. 무뚝뚝한 사람이라 하여 문학적 소양이 부족할 거라 여기면 안 된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의 어머님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예카테리나에게 예술가의 재능이 있는 건 다 자기 아빠 덕분일 거야. 후후.”

“…….”

담배를 피우러 가신 아버님보다 여기 어머님 쪽이 더 부끄러움을 잘 숨기신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정말 행복해 보이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 역시 마주 웃었다.

그 후로도 잠시 환담이 오가길 얼마나 지났을까. 약간 소강상태에 이르렀던 홀 앞의 분위기가 갑자기 들썩였다.

“아, 나온다.”

관계자용 입구에서 드레스를 입은 예카테리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주변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아직 수상자로 결정난 건 아니지만 예카테리나는 그만큼 주목받는 파이널리스트였다.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이쪽이야!”

“잠시, 콤스몰스카야 프라우다의 에민입니다!”

{미스 브류하노바! 이쪽 좀 봐 주시죠!}

바이올린 때보다 더 열광적인 것 같다. 아무래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피아노 쪽에 많은 비중을 두는 만큼, 사람들의 관심 또한 이쪽에 많이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예카테리나는 프로답게 적절히 대처했다. 미소를 지으며 사진에도 응하고, 짧은 인터뷰도 간단히 마친다. 역시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 본 노련함이 느껴졌다.

우린 복잡한 그 가운데에 섞여들지 않고 예카테리나를 기다렸다. 잠시 후에야 해방된 예카테리나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우릴 발견하고는 거의 뛰듯이 달려왔다.

“연주할 때보다 더 힘들어…….”

방금 뛰어서 그런 것 아닌가요?

하지만 예카테리나에게 잘 했다고 빨리 말해 주고 싶은 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다렸단다.”

그녀의 어머니가 먼저 따뜻하게 말씀하시며 예카테리나와 포옹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이어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에르네스트에게까지 포옹으로 감사를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마주한 건 나였다.

작게 숨을 씨근거린다. 연주를 막 마치고 난 연주자의 생명력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땠어? 물어봐도 돼?”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나 역시 거기에 맞춰 여러 대답을 해 줄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대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등등 무엇이든 그녀가 기뻐해 줄 말들.

하지만 지금 그녀가 가장 듣고 싶은 건 청중이자 친구로서 수상 여부에 대한 관측 같은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동료이자 음악가로서 내가 보고 할 수 있는 말.

“스스로 만족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 아까 마지막에 지휘자 아저씨가 똑같은 거 물어봤었는데.”

“정말요?”

“응. 정말.”

어지간해선 그런 질문은 안 할 텐데…… 지휘자가 보기에도 예카테리나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잠깐 생각을 하고 있자 그녀가 이어 말했다.

“덕분에, 라고 답했었어.”

“오케스트라도 훌륭했으니…….”

“그리고 너한테도 똑같이 말해 줄래.”

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고는 밝게 웃었다. 나야말로 그녀가 너무나 잘 해 주어서 고마웠다.

이젠 친구 된 입장으로 이야기를 해 줄 때였다.

“전 예카테리나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기뻐하던 모습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이기고 오라고 말씀드렸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전했던 응원의 말.

지금은 그 응원이 예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기고 오셔서 기뻐요.”

“아하하하, 정말? 그럼 일단 한 명은 제친 건가?”

아직 마음을 놓고 있을 때는 아니라 수상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고 있진 못하지만, 예카테리나도 조금은 편하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루카스가 옆에 있다면 실례이기도 한 말. 하지만 우리끼린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예카테리나의 어머님이 제안하셨다.

“모두들 식사하러 가지 않겠니?”

물론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선 다시 음악원으로 돌아왔다.

좀 쉬어야 마땅한 예카테리나는 계속 바빴다. 교수님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오고, SNS에도 쉴 새 없이 메시지가 달린 까닭이었다.

결국 9시 가까이 되서야 조금 잠잠해진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예카테리나는 아버지 옆에 앉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기까지 했다.

잠든 예카테리나를 보고 웃기도 하고, 우리도 느긋하게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 10시가 되자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곧 시상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참가자들은 홀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잠들어 있던 예카테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풀어져 있던 그녀의 눈매에 긴장감이 돌아왔다.

다시 홀 쪽으로 향하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늦은 밤이기도 하고, 파이널리스트 7명과 관계있는 사람들은 훨씬 적었기 때문에 많이 줄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날보단 긴장감의 정도가 달랐다.

이 중 누가 수상자가 될지, 이제 결정되는 것이다.

“들어가자.”

홀로 들어서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이 준비가 되자 이번에도 디아나 의장이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의 파이널리스트들, 그리고 귀빈 여러분. 모두 늦은 시간까지 감사합니다.”

의장이 먼저 이야기하고 옆에서 다시 영어로 통역한다. 그렇게 말이 두 번 반복될 때마다 박수소리 역시 두 번 반복되었다.

인사를 마친 디아나 의장은 뒤편에 앉아 있는 심사위원들 쪽으로 팔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곳에 계신 11명의 심사위원들께서 지난 파이널 3일간 정말 많은 고민을 해 주셨습니다. 좋다 혹은 나쁘다로 간단히 구분할 수 없는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였기에, 이 발표를 확정짓기까지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디아나 의장은 팔을 거두고는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이쪽을 향해 말했다.

“그 까다로움을 믿고 실력을 보여 주신 피아니스트들께 경의를 보냅니다.”

국제 콩쿠르 무대는 학교 시험처럼 절대적인 기준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니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존재를 건 음악가이고, 그것을 심사해야 하는 심사위원들 또한 최소 수십 년을 피아노와 함께 성공적으로 살아온 음악가들이다. 일방적이지 않은, 경의와 믿음이 느껴졌다.

디아나 의장은 다시 청중석을 둘러보며 말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는 원하는 결과를 얻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겠지만. 이 열흘 동안 우리는 격렬한 한때를 보냈습니다.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산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모두의 앞길에 행운을 빕니다.”

격려와 축복.

그리고 발표가 이어졌다.

7위부터 올라가면서 한 명씩 연주자들의 이름이 호명된다. 단상 위로 올라간 연주자는 심사위원에게 짧은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엄격한 다국적 심사위원단의 평가는 각국의 언어로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평가 역시 콩쿠르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부분이었다.

내가 예상했었던 순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순위도 있었다. 하지만 평을 듣고 나면 다 납득이 갔다.

그렇게 한 명씩 불려 올라가는 것을 보다가, 난 벌써 네 명이나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을 보니 예카테리나가 양손을 꼭 쥐고 있었다. 난 가만히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명이 더 불려 올라갔다. 예카테리나는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

단 두 명 남았을 때, 디아나 의장이 동시에 두 명의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맥케이, 그리고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왜 동시에 부르지? 설마 공동 수상인가?

칼같이 숫자로 기록이 떨어지는 스포츠 경기와 달리 음악 콩쿠르는 공동 수상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보통 1등을 두 명 모두에게 주는 건 굉장히 드물고, 아무도 1등상을 수상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1등 없는 2등을 2명에게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좋은 연주였는데 공동 2등은 말도 안 돼.

디아나 의장은 느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두 분 모두 정말 훌륭한 슈만 협주곡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부분에선 우리 심사위원단 외에도 특별히 지휘자의 의견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각 곡에서 최고의 성과를 보였다고 자신하셔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슈만 협주곡에서 차이가 난 건가? 아니, 지휘자의 의견이 있어야 할 정도로 치열했다면 거기서도 별 차이가 없었던 거야?

난 물론이고 예카테리나도 작게 팔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디아나 의장은 다시 빠르게 발표했다.

“하지만 아주 근소한 차이로 순위가 정해졌으니,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 최종 우승자가 결정되었다.

“2위. 루카스 맥케이. 미국.”

“……!”

“1위.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 러시아.”

떨림이 멎었다.

그리고 잠시 후 훨씬 더 큰 울림이 사방에서 일었다.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예카테리나!”

박수와 환호.

그 속에서 예카테리나가 날 돌아보았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원하는데 계속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지. 난 웃으며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어서 가 봐요, 예카테리나.

“……진짜?”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일어선 예카테리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똑바로 걸어 단상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로 함성이 따랐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

난 가슴이 벅차 어떤 말도 하기 힘들었다. 그녀와 보냈던 시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이 마음은 기쁨의 공유인가 아니면 흡족함인가.

거세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뒤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다른 곳에서도 동시에 발표가 진행되어 있을 것이다.

화면을 몇 번 터치하자 바이올린 부문 시상식이 나타났다.

그리고 단상 위엔 가장 큰 상패를 든 막심 선배가 멋진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이 행복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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