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화
예카테리나와 막심 선배가 각각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건 정말 기분 좋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 아쉽게도 니콜라이 선배는 2등 상을 수상했다.
물론 4년마다 각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드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라는 대회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2등도 굉장한 일이다. 2등만 하더라도 당당한 커리어로 내세울 수 있고 거기에 따른 연주회나 협연 자리도 무시무시하게 들어오곤 하니까.
그래도 니콜라이 선배는 약간 낙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나는 홀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니콜라이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쉽다고 위로해도 이상하고 축하한다고 해도 애매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니콜라이 선배는 전화를 받고 싶어 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선배는 언제나 그렇듯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거든요.
“아…… 그러셨나요?”
난 첼로 파이널리스트들의 모든 연주를 다 챙겨 듣진 못했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지만, 니콜라이 선배는 다른 참가자의 연주를 듣고는 바로 이기긴 힘들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대결을 할 때도 바로 직감할 수 있듯, 상대가 내는 소리를 내가 도저히 낼 수 없음을 아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쉽고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니콜라이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역시 30세의 노련함에는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네요.
“……예?”
- 이번 우승자, 뉴질랜드 출신의 31세 연주자였거든요. 첼로를 잡은 시간은 제 인생보다 길고, 다른 굵직한 콩쿠르에서의 수상경력은 열 개도 넘더군요. 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만 채우면 완벽해지는 커리어였어요. 그래서 참가한 듯하고.
“아…….”
태연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살짝 삐딱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한다.
- 그런데 스물두 살 땐 왜 참가하지 않았을까요? 궁금하지 않나요? 서른 살이 되어서야 자기 음악의 완성을 느낀 걸까요……. 저도 서른 살이 된다면 뭔갈 느낄 수 있을까요? 하지만 12년이 남아서야, 너무 오래 걸리겠네요.
“아하하…….”
이 선배도 평소 정말 젠틀하고 나긋나긋하지만 사실 평범한 성격은 아니었지……
음악에 있어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경력의 차이라는 건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선배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조금 억울함도 느끼는 것 같았다.
난 그 마음도 십분 이해한다. 그래서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 잠깐 사이에 니콜라이 선배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되돌아갔다.
- 미안해요. 이해해 줄 사람에게 그냥 한 번쯤은 말하고 싶어져서, 쓸데없이 후배님에게 푸념했네요.
“아, 아뇨! 괜찮아요.”
- 괜찮긴요. 하하, 귀여우시긴.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금 진정된 것 같아서 난 다른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뭐야, 니콜라이야?”
어느샌가 내 옆에 휙 다가온 막심 선배였다. 선배 역시 바로 첼로 부문의 순위를 확인하고 상황파악을 마친 지 오래였다.
막심 선배는 말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선배도 지금 해 주고 싶은 말이 많겠지 싶어서, 난 일단 바통을 터치하듯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전화를 바꾸자마자 느닷없이 막심 선배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하하하하.”
“……???”
난 당황했다. 뭐지 지금?
전화 너머의 니콜라이 선배는 훨씬 더 당황했을 것이다. 막심 선배가 킥 웃으며 말했다.
“난 이겼다. 니콜라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잠시 후, 니콜라이 선배가 무어라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고, 다시 막심 선배가 대답했다.
“뭐긴 뭐야? 나이 많은 노땅들이지.”
“!?!?!”
폭언도 이런 폭언이 없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난 그야말로 기겁했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우승자가 된 건 정말 자랑스럽고 훌륭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면 절대 안 된다.
당장 전화를 빼앗아야 하나. 하지만 나보다 훨씬 큰 막심 선배에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어떻게든 일단 입을 막아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심 선배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고로 거기서 조금 기다려. 갈라쇼 할 때 갈 테니까. 한잔하자.”
난 멈칫했다.
목소리는 일견 놀리는 투였지만, 그 표정엔 깊은 아쉬움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선배는 보지 못했겠지만 바로 옆에 있는 나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지금 여기에서 끼어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단 생각도 동시에 든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곧 전화를 끊은 막심 선배가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그걸 지금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난 아까 폭언에 깜짝 놀랐던 게 억울하기도 해서 결국 한마디 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 살은 나이 많다는 말을 듣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요?”
콩쿠르 나이 제한 끄트머리이니 선배는 그렇게 표현했는지 모르겠지만, 음악가의 생을 놓고 본다면 서른 살은 이제 막 제대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막심 선배는 내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갑자기 그런 정론을 들으니까 할 말이 없어지네.”
“할 말이 없으셔야 해요.”
“뭐, 어쩔 수 없었어. 니콜라이 녀석을 놀려먹으려면.”
다시 한 번 선배는 농담조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난 막심 선배가 일전에 자기 무대를 마친 후 곧바로 니콜라이 선배의 무대 중계를 찾아봤었던 것을 기억한다. 만약 가장 높은 곳을 노릴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의 친구이자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니콜라이 선배가 반드시 옆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 눈빛이 생생하다.
지금은 그 눈에 묘한 감정들이 어려 있었다.
가만히 올려다보던 난 살짝 물어보았다.
“아쉬우신 거죠?”
“약간은.”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다시 선배는 피식 웃더니 삐딱하게 섰다.
“솔직하게 놀리고 싶은 건데?”
“……예?”
“자, 아직 결과가 안 나온 게 하나 있었지? 일단 니콜라이 녀석은 아웃되었으니까 이젠 나와 예카테리나가 정상에서 맞붙겠군.”
8년 전 신설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종합 대상. 그랑프리 상에 대해 막심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일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성악, 목관, 금관까지 총 6개의 부문에서 각각 우승자가 방금 전 결정되었다. 단둘이 저울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분들도 있으시잖아요?”
“여기엔 없잖아?”
지금 그런 문제인가요?
약간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막심 선배는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휙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예카테리나!”
저편에서 부모님과 다른 친구들 사이에 있던 예카테리나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주변에 양해를 구하곤 다가왔다.
가까이 온 예카테리나가 인사가 늦었다며 빠르게 말했다.
“아, 막심. 축하해.”
“너도 축하해. 하지만 유감이란 말을 하고 싶군.”
“?”
“그랑프리는 내 차지니까.”
난데없이 툭 던져진 말에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막심 선배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봐도 이 선배, 지금 대상을 탄 것 때문에 너무 텐션이 올라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럴 때 그냥 듣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왜 정해진 것처럼 말해? 그건 내일 나오는 거잖아.”
“내 감이 말해 주고 있어.”
“심사위원한테 로비라도 했어?”
“……마, 말 너무 막하는데.”
“네가 말이 막 나오게 하잖아.”
예카테리나가 눈을 흘겼다. 막심 선배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막말엔 막말로 상대하겠다는 듯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나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여서, 뒤늦게 끼어들었다.
“저기, 두 분. 진정하세요…….”
“진정하고말고. 막심도 진정할래?”
“지금 진정하다 못해 냉정해……. 고맙다 예카테리나.”
“별말씀을.”
막심 선배를 간단히 무너뜨린 예카테리나는 환하게 웃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내 팔에 달라붙었다.
“그래서, 타티아나는 어때? 누구 편?”
“예?”
“누가 그랑프리 탈 것 같은데?”
누구 편이냐고 묻는 걸 보니 이참에 협공해서 막심 선배를 완전히 침묵시키자는 것 같은데…… 난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중재가 하고 싶을 뿐이다.
우승으로 잔뜩 들떠 있는 막심 선배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진정하라는 의미로 차분히 이야기했다.
“다른 우승자들의 연주를 다 들어 보지도 못했고…… 전 그걸 듣고 공정하게 판단할 실력도 없어요.”
“또 정론이야?”
막심 선배는 목을 짚으며 투덜거렸다. 난 예카테리나가 했던 말을 고쳐서 그대로 하고 싶었다. 정론이 나오게 하시잖아요?
하지만 나까지 휩쓸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정론만 이야기하는 건 재미없다. 나도 바라는 바가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4년 전엔 몽골의 성악가가 그랑프리를 거머쥐었죠. 이번엔 피아노나 바이올린에서 나왔으면 좋겠네요.”
막심 선배는 그럼 그렇지라며 웃었다.
“그래, 우리 둘 중 한 명이 받겠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제발 나였으면 좋겠는데.”
“미안한데 이번엔 나야.”
“말도 섞기 싫어 진짜.”
질색하는 예카테리나가 재미있는지 막심 선배는 계속 그녀와 투닥거렸다.
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그랑프리 상도 받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
어워드 세레모니는 다음 날 갈라쇼가 열리기 전 오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열렸다.
다시 한 번 모든 수상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박수와 찬사를 받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모든 심사위원들의 합의에 의해 그랑프리 상도 수여되었다.
“…….”
일정이 끝난 뒤 막심 선배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그랑프리 결과에 대해 별 상관 없는 듯하다. 다만, 늘어져 있는 막심 선배를 엄청나게 괴롭히고 싶어 했다.
“어제 뭐라고 했었더라? 응? 다시 한 번 말해 줄래?”
“……그냥 죽여 줘.”
“아하하핫, 절대 안 되지. 끝까지 살려놔야지. 아쉽네 정말. 어제 녹음해 뒀어야 했는데.”
“내가 어젠 미쳤었어.”
최종 그랑프리 상은 금관 부문에서 우승한 네덜란드 트롬본 연주자에게 돌아갔다.
난 어제 각 부문 우승자들의 파이널 무대를 감상하면서 이 연주자의 트롬본 소리도 들어 봤었는데, 겨우 29세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깊이 있고 원숙한 소리를 내어 주는 좋은 연주자였다. 그랑프리 상에 선정되기에 충분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막심 선배는 조금 가엾게 되었다. 그랑프리에 대한 발언은 물론이고 자기는 나이 많은 연주자에게 이겼다는 폭언도 자충수가 되었다. 이젠 니콜라이 선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쓰러움 조금, 걱정 약간, 살짝 웃김 등의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선배를 바라보고 있는데. 예카테리나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금관 파이널 무대의 영상을 옆에서 틀어놓았다.
“…….”
조용히 연주를 듣던 막심 선배의 넋 나간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연주였길래 그랑프리 상을 받아간 것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채 몇 분이 되기도 전에 해소되었다. 트롬본 소리는 스마트폰으로 듣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훌륭했다.
막심 선배 역시 음악을 놓고 결코 거짓말을 하진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솔직히 내가 더 잘하지 않냐??”
잔뜩 놀리려고 작정했던 예카테리나도 이번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런 걸로 해 줄게.”
“…….”
막심 선배는 당분간 그냥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이올린 부문 우승자의 모습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하지만 그랑프리를 따지 못했다고 해서 선배가 이룬 것들이 퇴색되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막심 선배가 몇 시간 후 있을 갈라쇼에서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가운데에 서 있을 것이란 점이었다. 그 무대에서 선배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음악을 보란 듯이 선보이길, 나는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