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26화 (626/1,277)

##  626화

세연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졸려 죽을 것 같다. 그녀는 적막을 향해 투정을 부렸다.

「왜 쟤들은 새벽 4시에 시상식을 하는 건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투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 모스크바는 오후 10시. 잠깐만…… 그것도 늦은 시간인 것 아닌가?

그런데 대부분 대형 콩쿠르들이 늦은 밤이 되어서야 시상을 하곤 하기에 세연은 길게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피아노 전공인 세연이 주의 깊게 보는 건 당연히 피아노 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라는 이름의 연주자. 바로 타티아나가 응원하고 있다고 했던 피아니스트였다.

저번 타티아나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세연은 바로 예카테리나의 모든 기록과 연주 영상을 찾아보았다. 말할 것도 없이 정말 엄청난 커리어와 실력을 갖춘 연주자였다. 세연은 그 음악성과 테크닉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친구에게 추천받은 음반에 감격하여 빠져드는 것처럼, 세연은 자연스럽게 예카테리나라는 피아니스트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예카테리나가 안 그래도 대단한 커리어를 훨씬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진짜로 대상 타 버렸네.」

엄마가 깰까 싶어 소리를 죽여 놓고 화면만 보던 세연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설마 싶었는데 진짜였다.

세연은 마음속 진심으로 예카테리나가 우승자가 된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곁에 있을 타티아나와 다른 친구들이 기뻐하리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늦은 새벽이라 그런지 조금 더 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예카테리나가 대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처음부터 확신한 걸까? 그녀의 음악적 식견이 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콩쿠르 우승자를 예측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게 쉽다면 뭣하러 이런 대회를 열겠는가?

그렇다면 그냥 다른 이유로 친해져선 응원하게 된 상황일 텐데……. 그건 그것대로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소외감이 느껴졌다.

소외감? 대체 왜?

「왜 이래…….」

환하게 빛나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세연은 중얼거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타티아나의 곁엔 정말 대단한 연주자들밖에 없었다. 지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대상을 탄 예카테리나는 물론이고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 발렌티나도 모두 굉장한 아이들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세연은 모자란 부분이 너무 많다.

소외감 같은 걸 느끼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저 멀리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었고, 두 사람은 영어를 거치지 않으면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것이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었다. 낯가림이 있어 보이는 타티아나는 사실 세연을 그렇게 가까이하고 싶은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연주자 대기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연은 타티아나가 거리를 둔다는 걸 알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녀와 굉장히 가까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짜고짜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건 그런 느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세연은 자신이 외향적인 편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말을 붙이고 친근하게 굴 정도인 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성격이다.

그런데 타티아나에게만큼은 달랐다. 조금 더 용기 내어 다가가서 알고 싶고, 가까이에서 그녀의 음악을 듣고 싶었다.

「…….」

어두운 방에서 시상식이 펼쳐지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만 밝게 깜빡였다.

정말 화려한 세계다. 나에게도 저런 기회가 찾아올까? 적어도 지금 발끝 정도는 담그고 있는 걸까?

세연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소파 옆으로 기울어지며 잠들었다. 잠든 세연의 머릿속은 내년에 있을 콩쿠르들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

방학이 와도 학생들은 쉴 수 없다. 입시를 노리는 학생들은 아침부터 학원에 가서 저녁때까지 책상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 하고, 예체능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각자 자신이 땀을 흘려야 할 장소에 가서 노력을 경주해야만 했다.

세연 역시 등록한 연습실로 아침부터 가선 계속해서 연습만 했다.

전날 봤던 예카테리나의 파이널 무대 협주곡 연주와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던 모습 등이 오버랩되며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 이 정도론 안 된다는 생각뿐이다. 세연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커녕 1번도 그리 만족스럽게 연주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야 간신히 완성했을 뿐이다.

슈만? 이제 겨우 소나티네나 살짝 맛보고 있는걸?

그나마 자신 있는 건 쇼팽이었는데, 이것도 교수가 처음에 집중적으로 잘 지도해 주었기에 만들어진 실력이었다. 최근엔 다른 곡들로 넘어가는 터라 쇼팽엔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감도 있었다.

「몰라.」

일단은 무작정 건반을 누르는 것밖에 모른다. 세연은 머릿속에 있는 잡생각들을 지워버리기 위해 건반을 누르고 또 눌렀다.

가지고 온 빵으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또다시 피아노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 보니 오후 3시경이었다. 신체에 스트레스가 그리 쌓이지 않은 걸 보면 머리는 집중하면서 신체는 릴랙스하는 좋은 연습을 한 것 같긴 한데, 머리를 너무 써서 그런지 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신력의 문제야, 정신력의 문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세연은 연습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집이 아니라 또 다른 피아노가 있는 곳, 박 교수의 아파트였다.

이젠 너무 익숙한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도 알고 있지만 세연은 일부러 노크를 해서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어서 오려무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여느 때와 똑같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박 교수가 세연을 맞이했다.

세연은 교수를 따라 레슨실로 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에서 악보들을 꺼내며 말했다.

「저번에 준비해 오라 하셨던 곡 다 만들어 왔…….」

「그보다 일단 앉으려무나. 차부터 한잔 하자꾸나.」

「……아.」

마음이 급해진 티가 난 모양이다. 교수는 침착하라는 듯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엔 아무도 없었다. 아주머니는 외출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차를 두 잔 준비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교수는 세연이 꺼내 놓은 악보를 보고 있었다. 거기엔 세연이 공부해 놓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방학인데도 열심히구나.」

「열심히 해야죠.」

「천천히 해도 괜찮단다.」

교수는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냥 평범하게 하는 말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연은 가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끼곤 했다.

「정말 괜찮나요?」

자기도 모르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교수는 세연을 바라보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다면 말해 보너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결과 나온 거 보셨어요?」

피아노 학과 교수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지.」

「그 애도 타티아나의 친구예요.」

「…….」

말을 뱉고 나서야 뜬금없는 소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예카테리나라는 연주자이지, 거기에 타티아나가 언급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세연은 자기 머리를 때리고 싶었다. 왜 괜히 어젯밤에 쓸데없는 생각을 해가지곤.

당연히 교수도 영문을 모르겠단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상관인지 난 잘 모르겠구나.」

「전…….」

세연은 다시 입을 열려다가, 꾹 다물었다.

뒤늦게 유치한 자격지심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결국 다시 한 번 후회하면서 세연이 말했다.

「그러게요, 아무 상관도 없는데.」

「…….」

가만 그녀를 바라보던 교수는 다시 한 번 찻물로 입을 축이고는 천천히 말했다.

「세연아.」

「예.」

「혹시 네가 부담스럽다면, 내년 국제 콩쿠르엔 나가지 않고 그냥 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 충격적인 말은 아니었다.

세연은 아직 어리다. 때문에 4년 정도 더 실력을 갈고 닦는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에서 음악가로서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정말 아무 문제가 안 되나? 정말?

「나갈 거예요.」

「…….」

「일단 나가 보면 기회를 한 번은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냥 4년을 보내게 되겠죠.」

「그냥 보내는 일이 있을 리가.」

「아뇨, 그냥 보내게 될 것 같아요.」

잘해서 음대에 가면 조금 더 깊은 공부를 할 수도 있을 테고 시간도 잘 쓸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세연은 이 기회를 그냥 보낸다면 계속 후회를 할 것 같단 강력한 확신을 느꼈다.

다시 한 번 그녀는 스스로의 판단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갈게요.」

1년 전만 하더라도 세연은 교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교수는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달랐다. 세연은 교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은 1년 전보다 더욱 능동적이고 강해져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교수의 마지막 제자를 후회에 빠뜨릴 수 없었다.

세연과 눈을 마주친 박 교수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며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그 고집은…… 그 소리에서 오는 성격인지…….」

「예?」

「아니다, 아니야.」

무언가에 항복한다는 듯, 교수가 말했다.

그리고 곧 학생을 바라보는 눈빛이 되돌아온다.

「아무튼…… 그래. 그래서 어느 곳에 참가할지 결정은 내렸고? 설마 둘 다는 아닐 테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쇼팽 콩쿠르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도 사실 세연이 딱 골라 선택하기엔 너무나 큰 대회들이었다. 때문에 세연은 혼란스러운 고민이 많았다.

대신 몇 가지는 매듭짓고 싶었다.

「교수님. 하나 여쭈어볼게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교수는 찻잔을 들었다.

「질문에 따라 다르겠지.」

「…….」

쉽게 대답해 주진 않을 것 같았다. 세연은 교수에게 여러 과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제자로 거둔 것에도 그 과거가 어느 정도 연류되어 있다는 걸.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면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제가 타티아나와 같은 콩쿠르에 나가길 바라세요? 아니면 제가 그 애를 피하길 바라세요?」

말하면서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가 타티아나를 유망한 연주자로 평가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세연과 비교하고 경쟁시키려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세연은 지금 이 질문을 하지 않고선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교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같은 무대에서, 이겼으면 좋겠구나.」

세연은 눈을 크게 떴다. 교수는 정말 솔직한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다시 확인하거나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교수는 이어 말했다.

「때문에 둘 모두 쇼팽 콩쿠르에서 봤으면 하지만…… 그 아이는 쇼팽을 피하겠지.」

약간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그 뜻은 명확했다.

타티아나가 세연을 피한다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듣고 나서야 어렴풋이 짚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곧 세연은 교수의 통찰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타티아나가 다루는 쇼팽은 원숙의 경지를 넘어선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쇼팽을 주력으로 연주하지 않고 되도록 숨기고 멀리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교수는 이미 그녀의 예전 연주를 보고 그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타티아나가 어떤 곳에 참가할지 물어보란 것도 단지 확인하려던 것일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퀸 엘리자베스로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지 않겠니. 운명이 너희를 그렇게 정해 두었다면…… 그렇게 되겠지.」

「……!」

타티아나가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세연이 눈을 크게 뜨자 교수는 허리를 조금 숙여 다가오며 말했다. 진지하고 솔직한 목소리였다.

「세연아. 확실하게 말해 두지만…… 네가 무언가에 얽매이거나 복잡할 건 없단다. 네가 낼 수 있는 목소리로 네 음악을…… 마음껏 하길 바란단다.」

그런 교수님은 무언가에 얽매인 이유로 절 고르신 게 아닌가요?

문득 그런 삐딱한 목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세연은 은사에게 그렇게 막돼먹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에게 찾아온 인연이다. 세연은 그 무엇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걱정 마세요, 교수님. 전 제 음악을 할 테니깐요.」

조금 시무룩했던 기분을 떨쳐 버리고, 세연은 눈앞의 교수와 자신의 음악에 집중하기로 했다. 교수 역시 세연이 마음을 다잡았음을 깨닫곤 레슨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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