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7화
근 일주일간 세연의 방학 일과는 늘 일정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못 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영상들을 돌려보고 바로 연습실에 가선 피아노와 씨름했다. 레슨이 있는 날은 레슨을 받고, 그렇지 않다면 거의 하루 종일 공부와 연습만 한다. 피아노와 음악, 영어. 거기에 러시아어 공부까지 조금씩 하려니 시간은 늘 모자랐다.
저녁이 되어 집에 와서야 한숨 돌리며 쉬다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영상을 밤늦게까지 보다가 잠든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하루하루였지만 세연은 그리 큰 불만 같은 건 없었다.
만 16세라는, 성인이 되기 직전의 애매한 나이에 걸쳐 있는 아이들은 마지막 시간까지 그야말로 혼과 몸을 깎아 넣고 있었으니까.
자기 공부의 결실을 맺기 위한 노력이 끝나려면 시간이 흐르는 수밖에 없었다.
「흐아…….」
무념무상. 세연은 오늘도 집 안에서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부터 쥐었다. 그녀가 바로 튼 것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중계 페이지였다. 한 번 더 들어 보고 싶은 연주자가 있었다.
「뭐지?」
그런데 간밤에 잘 들어가지던 페이지가 바로 되지 않고 한참이나 기다리게 하더니, 결국 접속되지 않고 먹통이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세연은 몇 번이나 다시 접속을 시도해 보았고, 혹시 스마트폰 문제일까 싶어 컴퓨터를 틀어서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전혀 안 된다.
대회 중엔 접속 문제가 한 번도 없었는데 끝나고 나서 갑자기 이러니까 당황스럽다. 오늘은 모스크바에서 콩쿠르 갈라쇼가 일정으로 잡혀 있다. 직접 갈 방도가 없는 세연은 중계로밖에 볼 방법이 없는데, 페이지가 먹통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방법이 있나? 고민하던 세연이 바로 떠올린 사람은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였다. 세연이 콩쿠르 중계 페이지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을 할 순 없으니 그 애들에게 부탁한다면 들어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모스크바는 새벽 1시다.
「너무 민폐지…….」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을 할 때마다 세연은 반드시 그쪽의 시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곤 했다. 자신이라 하더라도 느닷없이 새벽에 연락이 날아온다면…… 물론 기쁘겠지만. 어쨌든 멀리 있는 친구로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란 것도 있을 테니까.
조금 기다려 볼까?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는 건 세연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들 말고 차선책이 지금 서울에 있음을 떠올렸다.
여전히 에티켓의 저울은 기우뚱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새벽에 전화를 하는 것보단 아침에 전화를 하는 쪽이 나았다.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깨어 있지 않다면 방학이라고 늦게까지 자지 않도록 모닝콜을 해 주었다고 하면 되고, 깨어 있다면 그냥 물어보면 될 일이다.
전화벨이 두 번이 울리기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 「좋은 아침이네. 세연아.」
나긋나긋한 목소리. 갑자기 아침부터 전화가 와서 당황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한승우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세연은 이 친구가 자기와 같은 나이라는 게 아직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세연은 밝게 인사를 받았다.
「안녕, 일어났니?」
- 「밥 먹고 있었어.」
솔직 그 자체인 답변. 세연은 거꾸로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더듬거렸다.
「그…… 그래, 다음에 전화할까?」
- 「지금 해도 괜찮아. 뭔데?」
하지만 승우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했다면 용건이 있다는 건 빤히 잘 아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투였다.
세연은 이 애가 너무 편하게 받아 주니까 쉽게 대하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먼저 전화를 건 사람으로서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콩쿠르 중계 페이지에 접속이 안 되어서. 혹시 너도 그런가 하고.」
- 「음…… 그래? 잠깐만.」
승우는 말로 이러쿵저러쿵 길게 하지 않았다. 전화가 이어진 채로 잠시 무언가 하는 것 같더니, 직접 확인이 끝난 후 다시 말했다.
- 「나도 안 되네.」
「그렇지!?」
- 「왜 좋아해……? 아무튼 서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이 사람이 몰릴 때는 아니니까, 서버 점검을 하려고 잠깐 내린 게 아닌가 싶어.」
세연은 컴퓨터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냥 기다려 보란 말이야?」
- 「기다리는 게 싫으면…… 아, 그래.」
중얼거리던 승우는 그제야 왜 전화했는지 분명히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 「내가 그쪽에 전화해 볼게.」
「와 정말? 고마워!」
- 「고맙긴.」
승우는 싱겁게 말하더니 바로 해 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밥은 다 먹고 해도 되는데……
세연은 책상에 삐딱하게 앉으며 생각했다. 멀리서 전화를 하는데도 거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승우는 예리하고 사려 깊었다. 덕분에 원하던 걸 바로 알 수 있게 될 것 같아 기분은 좋았지만, 어쩐지 이래선 안 될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저 애도 지금은 방학이라 한국에 돌아와 있지만 사실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에 다니고 있는 애였다. 세연은 올해 예술고에 들어오기 전에 러시아나 독일의 유학도 알아보면서 그게 얼마나 어렵고 굉장한 일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멀게 느껴지는 친구이기도 했다. 연락을 자주 하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잠깐 시간을 보내고 있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2시간 내로 정상화시킬 거래. 기다리면 돼.]
[진짜 고마워!]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몇 개 섞어 보내면서도 세연은 앞으론 이런 일을 자제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아침부터 무턱대고 날린 용건은 순식간에 끝났다. 세연은 승우가 이다음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방학 중에도 한국에서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 멀리 살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굳이 만날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이 정도의 거리감.
[그런데 세연아. 오늘은 뭐 해?]
「어?」
메시지를 본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를 냈다. 이 애가 내 하루를 왜 궁금해하지?
살짝 떨어져 있던 거리감이 갑자기 확 좁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승우에게도 용건이 있을 뿐일지 모르겠지만, 별로 상관 없었다.
세연은 뭐라 답장을 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뭔가 방학답고 그럴싸한 하루 일정이 있으면 좋겠지만, 늘 그렇듯 다람쥐 쳇바퀴는 그냥 동그랗기만 하다. 어떻게 멋지게 설명해 보려 해도 불가능했다.
내 삶엔 왜 특별한 게 없지? 이런 생각도 사춘기라서 드는 건가? 16세 세연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했다.
결국은 승우가 밥 먹는 중이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평범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맨날 하던 거 해야지. 피아노.]
[혹시 점심에 시간 되면 한번 안 볼래? 한국에선 처음이잖아.]
그런데 쳇바퀴에서 나갈 핑계가 생겼다. 세연은 답답하던 마음에 필요했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애도 하루 종일 연습만 하다 보니 핑계가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서울에서 한 번도 안 본 게 마음에 걸려서? 아무튼 무슨 이유든 간에 세연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순수하게 기쁘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생긴 것 같아 즐거워졌다.
[그럴까. 어디에서?]
[전에 은평구 쪽이라고 했었지? 가까운 역 불러 줘. 내가 갈게.]
모스크바에서 봤을 때 서로 어디에 사는지 대충 이야기한 적 있었는데 승우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약속이 잡혔다. 오늘도 대충 연습실에 갈 생각을 하던 세연은 모든 계획을 바꿔 여름옷들을 늘어놓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
8월이 다 되어 가는 날씨라 끔찍하게 더웠다.
세연은 버스를 기다려 탈 생각은 일찌감치 접고 바로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를 기다리는 그 잠깐 동안도 땀이 흐를 정도로 더웠다.
추운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저번에 갔었던 모스크바는 7월에도 정말 시원했었는데……. 물론 겨울엔 그만큼 춥긴 하겠지만, 사실 추운 걸로 치자면 서울도 만만찮지 않은가? 어차피 그게 그거일 것 같다.
「에어컨 좀 세게 틀어 드릴까?」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택시 기사 아저씨가 세연이 더워한다는 걸 알아주어서 다행이었다.
역까진 기본요금만으로도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세연은 요금을 계산하곤 택시에서 내려 약속했던 역 출구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매장에 들어선 그녀는 바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부터 한 잔 시키려다가 멈칫했다. 조금 있으면 약속 시간이라 승우도 올 텐데, 미리 같이 시켜 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도 될 것 같고.
그런 생각으로 세연은 승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도착했는데 뭐 마실래? 미리 시켜 놓을게.]
특별한 답장이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물어볼 것도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문해 놓고 널 위해 시켰다고 하면 승우는 아무 불만 없이 마실 것 같았다.
그런데 돌아온 답장이 조금 기묘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프라페 될까?]
「응?」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라페가 비싸서가 아니라 대체 무슨 주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주문하고 싶다면 컵 크기나 샷, 시럽, 휘핑크림 등을 주문할 수 있겠지만…… 이건 너무 대책 없는 주문으로만 보였다.
암호문이라도 해석하듯 세연은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둘 다 혼자 마시겠다고? 이게 남자애의 커피주문법인가? 날씨가 덥고 목이 마를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하겠지만 커피를 두 컵이나 마시면 점심은 어떻게 할 건데?
워낙 덩치가 크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했다. 세연은 혼자 고민할 것 없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프라페엔 아메리카노보단 카페모카를 블렌딩해 보면 어때? 그게 더 맛있을 것 같은데.]
[블렌딩을 왜 해? 절대 안 할 거야.]
세연은 알 수 없는 상황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결국 승우가 시키는 대로 주문하기로 했다.
카운터에 가서 주문을 하고 벨을 받아와 적당히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데, 변명이라도 하듯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미안해. 내가 이야기를 안 했었네. 지금 다른 친구랑 같이 가고 있어.]
「얘가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중얼거리는 순간, 카페 문이 벌컥 열리며 두 남자가 들어섰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카페 안의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가져갔다.
한 명은 한승우였다. 열여섯 살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체격이 좋은 그는 면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굉장히 크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한 명도 낯이 익었다.
애쉬 브라운의 머리칼은 염색이 아닌 자연적인 색처럼 보였다. 거기에 녹색 눈동자. 무엇보다 딱 봐도 외국인이었다.
세연은 잠깐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떠올리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분명 리처드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성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으로 막 부를 정도로 친하질 않아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세연을 발견한 승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리처드를 데리고 오겠다고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세연은 솔직히 이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승우와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지만, 조금 더 특별한 시간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리처드는 세연을 바라보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물었다.
{안녕. 나 알지?}
{그…… 이름은 알아. 그런데 성이…….}
{그럼 이름으로 부르면 되겠네.}
어림짐작으로 고민하던 것을 리처드는 순식간에 해결해버리더니 맞은편에 툭 앉았다.
갑자기 일행이 세 명이 되어버렸다. 세연은 살짝 눈치를 살폈다.
일단 무슨 언어를 먼저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어, 러시아어, 영어. 그중에 뭘로 이야기를 해야 하지? 물론 러시아어는 아직도 인사 말고 제대로 하는 게 없으니 못 한다.
세연이 고민하는 사이 리처드가 먼저 화두를 던졌다.
{프라페 주문했어?}
{……리처드가 마시려고 했던 거야?}
{응. 난 그 물 탄 에스프레소에 얼음덩어리 띄워 놓은 음료는 도저히 마실 생각이 안 들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싫어해?}
{당연히 싫지. 한승우는 좋아하더라. ……혹시 너도?}
무언가 검증이라도 당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세연도 별다를 바 없었다.
{응, 나도.}
그 대답에 리처드는 진지하게 궁금하다는 듯 의문을 표했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걸 왜 마시는 거지? 성격이 급해서 그런가? 빨리 마시려고?}
{야, 리처드. 너 그런 말 위험해.}
{맞는 말이잖아? 성격 급한 거. 나 오늘 네가 아침에 밥 먹을 때 노트북 보면서 전화 받는 거 보고 어이가 없었어. 런던 증권거래소의 트레이더들도 그렇겐 안 해.}
{그래서 뭐?}
{훌륭하다고.}
{그럼 됐네.}
한승우와 리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두 입장이 다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옆에서 보면 조금 웃기기도 했다. 차분해 보이던 한승우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니.
세연은 저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