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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28화 (628/1,277)

##  628화

약간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야기는 편한 분위기에서 흘러갔다. 세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언어는 음악과 영어 정도였다. 그 정도면 사실 의사소통을 하고 대화를 이어 나가기엔 충분했다.

세연과 승우는 가볍게 안부를 나누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방학을 어떻게 보내는 중이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근데 승우의 다람쥐 쳇바퀴도 세연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세연은 이 애가 러시아어 학원도 다닌다는 것에 약간 놀랐다.

{러시아어 학원? 이미 잘 하는데 왜?}

{더 잘해야 할 테니까. 아직 고급 문법에 너무 약하거든.}

{…….}

당연하다는 듯 승우가 대답했고, 세연은 할 말을 잊었다.

이미 수년간 러시아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이미 승우는 말을 꽤 잘한다. 다른 아이들과 유창하게 대화하는 것도 몇 번이나 봤기 때문에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하다는 듯 한승우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세연은 조금 반성했다. 진짜로 언어를 배우려 한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승우도 세연도 그렇게 방학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사실 그리 재미있진 않았다.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옆에 있는 영국인 친구에게서 나올 참이었다.

리처드는 겨우 3일 전에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그럼 얼마 안 됐네?}

{원래는 올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중국에 갈 일이 생겨서. 한국에도 들렀다 가기로 했지.}

애초에 여행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 같다. 세연은 궁금증이 일기도 했지만, 굳이 뭘 했느냐고 깊게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서 그가 느끼는 것들일 테니까.

{한국은 어때?}

{재밌어. 왜 이런 나라에 와 볼 생각을 못해 봤는지 모르겠어. 알고는 있었는데…… 결국은 아는 녀석이 있었다는 게 중요했지.}

{승우가 잘해 줘?}

{잘해 주냐고? 하!}

리처드는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휙 돌려 한승우를 노려보았다.

그 표정만 봐도 3일간 무엇을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 매운 것부터 먹이고 본 것 아냐……? 그런 스테레오타입은 상당히 실례이기도 한데.

그래도 리처드는 점잖은 성격인지 무엇을 당했다고 사사건건 이야기하며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그저 한승우를 노려보며 네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지금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순간이라고 압박할 뿐이었다.

그런데 한승우는 만만찮았다.

{리처드는 매운 것도 잘 먹어서 재미없어.}

{그런 말은 해도 되냐? 우습게 보지 마. 그리고 각오해. 영국에 오면 진짜 못 먹을 요리가 뭔지 보여 줄 테니까.}

리처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자기 나라 요리를 저렇게 말해도 되나 싶었지만, 식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 것 같은 묘한 어투였다.

그 후로도 리처드와 세연은 이러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리처드는 겉보기엔 조금 쌀쌀맞아 보이지만 말을 걸어 보니 굉장히 유쾌하고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이 먼 나라에서도 긍정적으로 잘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리처드는 커피를 쭉 들이켜며 말했다.

{아무튼…… 모르는 사람들도 친절해서 좋더라. 그런데 여기 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겠어?}

{응? 나?}

{그래, 너.}

리처드의 박식함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난 내가 잘 몰랐던 것들에 대해 알고 싶거든.}

아까 들으니 아침에 임세연을 만나 보자고 했던 것도 한승우가 아니라 리처드였다고 한다. 물론 모스크바에서 안면이 있던 사람을 이곳 서울에서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건 이해가 갈 만한 이유였지만, 지금 보니 리처드는 그 이상으로 세연에게 흥미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세연도 그와 친해지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약간 방어적으로 답했다.

{구체적으론 무슨 흥미?}

{어떤 인과가 있어 우리가 만나게 되었을까, 같은 것. 우리가 서로 몰랐더라도 각자 살고 있었을 텐데 말이지. 다른 사람들처럼.}

이 애 피아노과가 아니라 철학과인가?

서로 모르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 지구에 살고 있을 테니 이렇게 만난 건 아주 희소한 확률이다. 같은 이야기는 너무 많이 봐서 질릴 정도로 고리타분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연을 강조하는 불교와 닿아 있기도 하고.

그러나 리처드의 표정은 그런 뜬구름 잡는 흰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이 만남 자체에 의문 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울에서 아는 사람 두 명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신기해할 일인가?

세연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입장에서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타티아나의 리허설에 초대받은 덕분이겠지?}

저번에 모스크바에 가지 못했다면 이 애들을 만나진 못했을 테니까.

리처드는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듯 다시 물었다.

{그 전엔?}

물론 그렇게 초대받으려면 그 전에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세연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있었던 일부터 이야기했다. 콩쿠르에 나갔다가 러시아 남자애에게 악보를 빼앗겼는데 타티아나가 되찾아 주었던 것도. 지금까지 박 교수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조용히 이야기를 다 들은 리처드는 천천히 말했다.

{그럼 넌 그 전에도 피아노를 하고 있었구나. 그럼 타티아나가 아니라도 언젠가 세계에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 세계에서라는 말은 이렇게 들으니까 정말 멀게만 느껴졌다. 타티아나나 여기 있는 애들이라면 거기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연은 솔직히 잘 모르겠단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여기 있는 모두를 아우르듯 깔끔하게 딱 말을 맺었다.

{인과가 있다면 그 끝도 있겠지.}

세연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리처드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상관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난 하고 싶은 대로 이미 하고 있어. 이상한 말을 하는 건 너 같은데?}

{그런가?}

리처드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세연은 그와 나눈 대화가 잘 이해가 안 가서 약이 올랐지만,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바가 있기도 했다. 이 모임이 타티아나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적어도 세연은 그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제대로 된 실력을 내지 못했을 테고, 그 후에도 콩쿠르 등에 적극적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 같다.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인 중앙음악학교를 견학하거나 정전된 콘서트홀에서 방랑자 환상곡을 듣는 일도 없었겠지.

그 모든 일들은 피아니스트인 세연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세연은 앞자리의 한승우를 바라보았다. 그도 자신과 같은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승우야. 이제야 묻는 거긴 한데, 넌 어땠어? 모스크바에서 그 애랑 처음 만났을 때.}

{그 애라니, 타티아나?}

{응.}

세연이 느끼기엔 타티아나도 약간 차가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연은 하필이면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바람에 첫 단추가 좀 꼬였었다. 자존심 강한 타티아나는 그 때문에라도 더 세연을 쉽게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승우는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건지 궁금했다. 둘 다 8학년 때 편입했다고 하니까 그때 친해진 걸까?

그런데 한승우의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스펙터클했다.

{멱살 잡혔었어.}

{……뭐?}

{푸하하하.}

어안이 벙벙해진 세연이 멀거니 되묻자 갑자기 리처드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세연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덩치의 한승우가 타티아나에게 멱살이 잡히는 상황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신경 거슬리는 말이라도 했나? 그런데 그 애는 애초에 경호원들이 붙어 다니니까 턱짓 한 번이면 해결되었을 텐데.

뭐라 더 자세히 묻지도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자 한승우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땐 내가 실수했던 걸 잡아 주려 했던 거였으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세연은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한참이나 웃던 한승우와 리처드는 잠시 후에야 이쯤 하겠다는 듯 웃음을 멈추고 간략히 말했다.

{오해하지 마. 네가 걱정하는 그런 건 아니야. 그저…… 음악가라고 하면 누구라도 도와주는 애니까. 그 애는.}

아직까지 타티아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점에 대해선 세연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승우가 가만히 바라본다.

세연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겠다는 듯 유심히 지켜보던 한승우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도 그 애와 같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졌구나?}

{뭐야 그게?}

{그냥, 그런 게 아닐까 해서.}

너도, 라고 물은 건 뭐야? 승우도 그랬다는 건가?

이해가 안 가진 않는다. 세연은 선선히 수긍했다.

{뭐, 좋은 애니까.}

{혹시 요즘 그 애와 음악도 닮아 가고 있진 않아?}

{!}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야기에선 깜짝 놀랐다.

아직 세연이 어떤 음악을 구사하는지 들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벌써부터 대충 알겠다는 듯 하는 말이 상상 이상으로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대로 세연은 타티아나의 음악에 상당 부분 젖어 있었다. 이전에 연주했던 쇼팽이나 슈베르트는 물론이고 그 외의 다른 곡들도 찾아보면서, 세연은 어쩐지 그녀의 리듬과 음색에 익숙함을 느끼기도 했다.

여러 이유로 인해 세연은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타티아나는 어떻게 봐도 본받을 점밖에 없는 피아니스트였으니까. 실력은 물론이고 그 태도까지 전부.

한승우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 그런가 보네.}

{그게 나빠?}

{나쁘진 않지만…… 글쎄, 쉽지 않을 거야.}

어쩐지 이미 해 본 사람의 어투였다.

세연은 박 교수와의 레슨을 떠올렸다. 세연이 타티아나를 의식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교수는 세연 본연의 음악을 하라 가르쳤다. 때문에 늘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세연은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교수가 말로는 그러면서도 은근히 타티아나의 음악을 흡수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고.

{거기 바보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리처드가 책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바보라고 했어 지금……?

원래도 스스럼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가깝게 나올 줄은 몰라 눈을 크게 뜨자 리처드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도와준 이가 무엇을 원할지 생각해 보고 답하도록 해.}

리처드는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세연은 생각에 잠겼다. 타티아나에게 음악적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 그녀가 자신의 음악을 레퍼런스로 삼아 따라오길 바랄까? 장담컨대 그렇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우아하고 솜씨 좋게 음악을 연주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자체를 떨쳐 내겠다는 듯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거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다간 언제까지고 그림자만 쫓게 된다. 세연은 그 점을 분명히 알았다.

{내년 콩쿠르 나갈 거야? 너희들도.}

그 때문에 세연은 콩쿠르 출전을 결심했다. 이 아이들도 혹시 그럴까 싶어 물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고개를 저었다.

{난 조금 고민해 봤는데, 같이 뛰는 것도 좋겠지만 일단 이번엔 지켜보려고.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처드라면 자신 있게 나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는 탐구자적 자질이 있는 것 같았지만 조심스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승우도 웃으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나도 안 나가려고.}

{어? 왜?}

{살짝 슬럼프라고 해야 하나. 후유증이 남아 있어서.}

{다쳤어??}

{아니. 음색을 다시 고쳐 보는 중.}

세연은 그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누군가에게 물든 색을 빼내고 다시 순수하게 정립하겠다는 말. 그 대상이 누구였는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생각이 바뀐 걸까? 혹시 타티아나에게 실망해서?

하지만 다시 바라본 한승우의 얼굴엔 실망 같은 감정은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자신의 결정에 대한 만족뿐이다.

그렇게 세 연주자 중 두 명이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콩쿠르에 대해 막 이야기하기도 어색해졌다. 세연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너희가 안 나가는데 내가 나간다고 하니까 이상하네……. 말도 안 되는 일 같고.}

{뭐가 말이 안 돼?}

자신 없는 목소리를 듣더니 리처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지난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가 누군지 잊었어?}

그렇게 리처드를 시작으로 한국인 우승자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한 번 꽃을 피웠다.

세연의 마음속에 있는 결심은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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